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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훈족과 아틸라 이야기 - 세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7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0
조회수 : 10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15 15:33:39

아틸라를 필두로 하는 훈의 대공세 앞에 동로마측은 막대한 양의 배상금과 연공금을 훈에게 주기로 결정하였지만, 당시 동로마의 재정 상태로는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과 3배나 인상된 연공을 조달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재정은 파탄일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한편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환관들 중 한명인 크리사피우스는 아틸라가 많은 영토를 요구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보낸 사절단의 대표들 중 한명인 스키리 왕 에디카(Edika)와 만나고 있었습니다. 에디카는 크리사피우스와 만난 자리에서 통역자 비길라스를 통해 황궁의 화려하고 화려하고 장대한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에 크리사피우스는 에디카에게 “스키타이의 관습을 버리고 로마의 관습을 따르기만 하면 황금지붕으로 된 대저택의 주인으로서 부와 사치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사피우스의 말에 에디카는 “다른 주인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못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크리사피우스는 에디카에게 “아틸라의 곁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느냐? 아틸라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느냐?” 등을 물었습니다. 이에 에디카는 자신이 아틸라의 절친한 친구이며,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아틸라의 신변을 경호하는 임무를 띄었고 그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정해진 날에 무장을 하고 아틸라를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사피우스는 에디카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그리고 에디카 혼자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만찬은 크리사피우스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크리사피우스는 통역관인 비길라스에게 지금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발설하지 말라고 말한 뒤, 에디카에게 아틸라의 목을 베고 로마로 돌아오기만 하면 여생을 더할 나위 없이 부유하고 행보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에디카는 그 제의에 수락하면서 약간의 돈을 요구했습니다. 물론 그 돈은 터무니없이 큰 돈은 아니었습니다. 에디카가 말하길 자신의 지시에 따라 아틸라를 공격할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협조하게끔 하는데 금 50파운드 정도면 적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확실히 계획을 잡은 크리사피우스는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자신이 꾸민 아틸라 암살 음모에 대해 보고하고 이어서 모든 사자들과 통역관들 그리고 제국의 경호원들을 관장하고 있는 관리들의 수장인 마르티알루스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의논하고 검토한 뒤, 아틸라에게 사절단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절단 대표들에게는 이러한 암살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대신 그 사절단 가운데 암살을 담당할 사람들을 끼워넣었습니다. 사절단의 대표로 뽑힌 사람은 25년 전 사산조 페르시아와 조약을 맺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외교관이자 군인이며 탁월한 웅변가로 알려진 막시미누스였습니다. 그리고 막시미누스는 훗날 7권이나 되는 ‘비잔티움사‘를 쓴 프리스쿠스에게 요청하여 그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케 했습니다.



이렇게 암살자를 동반한 동로마의 사절단은 훈족이 차지하고 있는 영지를 가로질러 아틸라가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사절단의 대표들은 아틸라에 만찬에 초대되어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크리사피우스나 테오도시우스 2세 등은 아틸라가 그 만찬에서 자신이 믿는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였습니다. 에디카는 크리사피우스의 말에 혹해서 아틸라를 배신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암살 음모에 대해 아틸라에게 보고한 것이었습니다. 아틸라는 암살자 일당을 모두 사로잡았고 암살자 일당으로부터 황제가 꾸민 음모를 생생하게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틸라는 암살자 일당을 죽이지 않는 아량을 베풀었고, 오레스테스로 하여금 암살자들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에 가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틸라는 황제가 이 치졸하고 비열한 음모에 지상에서 가장 큰 제국의 상속자가 가담해있다는 사실을 알리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아틸라는 테오도시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통지문을 전달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당신도 아틸라처럼 훌륭한 한 아버지의 아들이오. 아틸라가 부친인 문주크로부터 물려받은 존엄성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테오도시우스는 부왕의 영예를 실추시켜 아틸라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주왕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구나. 더욱이 주인인 아틸라를 살해하려고 했으니, 예속된 노예로써 상하의 도리조차 지키지 못한 처지에....’



암살 음모도 실패해버리고 동로마 측은 아틸라를 진정시키기 위해 집정관인 노모스를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아틸라에게 보냈습니다. 막시미아누스 사절단에 뒤이은 이번 사절단과의 협상과정에서 아틸라는 전과는 달리 동로마측이 내놓은 제안들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로마인 포로들을 배상금도 받지 않고 인도해주는 데 동의하고 자신에 전에 제시한 요구조건들도 철회했습니다. 단, 자신을 암살하기로 계획한 크리사피우스를 처형한다는 전제조건을 이행한다면 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니시 북쪽에 있는 넓은 영토를 할양해 달라는 요구조건도 철회했습니다.



아틸라과 전과는 달리 동로마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관심이 동로마가 아닌 서로마쪽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황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뭉쳐 조직적인 모습을 보인 동로마보다는 내분과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서로마를 상대하는 것이 좋다고 아틸라는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약이 맺어지고 난 다음해인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낙마하여 사망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은 후 동로마 제국의 권력은 풀케리아가 장악했고 그녀는 수십 년 동안 전쟁에서 몸담고 살았던 60세의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고 그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황제가 된 마르키아누스는 크리사피우스를 공개처형하였고 훈에게 지급하던 공납금에 대한 지급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동로마측의 반응에도 아틸라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관심은 서로마로 가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 역시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변 유목 종족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용병을 사들이고, 훈 군대를 모방하여 기동성 있는 기병을 양성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훈 치하에 있는 민족들과도 비밀리에 접촉하였습니다. 물론 아틸라도 이런 서로마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틸라는 443년 갈리아에서 스페인까지 확산된 농민 반란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서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반달족과의 협력 가능성을 신중히 모색하는 동시에 자체적으로도 충분한 전투력 배양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448년 군비증강과 정치적 안정이 일단락 되자,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의 여동생이자, 한때 자신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약혼반지를 보낸 바 있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의사를 받아들일 의사를 밝히며 지참금으로 갈리아 지방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의 무례한 요구를 묵살하였습니다. 아틸라는 서로마를 침공할 명분을 찾았습니다. 게다가 라인강 주위에서는 리프아르 프랑크족 및 서고트족과 훈과의 불화도 서로마와 훈과의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451년. 헝가리 초원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훈 군대가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훈의 군대는 최소 8만에서 10만에 이르는 대 병력이었고 여기에 훈의 복속민들인 게르만과 슬라브의 민족들이 가세하여 훈의 군대는 20만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서로마도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서로마군과 훈에 적대적인 종족들을 규합하여 역시 20만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를 지나 북상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두 세력은 파리 근교의 아우렐리아눔(현 오를레앙)에서 맞부딪쳤습니다. 하지만 양 세력간의 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벌어졌습니다. 고대 최대의 전투라고 불릴만한 이 전투는 24시간 동안의 치열한 접전 끝에 쌍방 모두 16만 5천명이라는 전사자를 남기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틸라가 다스리는 훈 제국이 이 전투로 인해 세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카탈라우눔 전투는 거대한 거인이 대로변을 달리다가 자그마한 돌에 걸려 넘어진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틸라는 다음해인 452년 봄, 다시 10만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습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 제국의 군대는 아퀼레이아를 정복하고 롬바르디아 지방의 도시들을 하나둘 무너뜨리고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압박하였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서로마 제국은 레오 1세를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구성해서 7월 중순 경 만시오 강과 포 강이 만나는 강변에 진주하고 있던 아틸라에게 보냈습니다.



사절단은 아틸라에게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아틸라는 5년 전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진격하고 점령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철수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며 문화 보호 차원에서 로마 폐허를 막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아틸라로써는 굳이 로마까지 진군하여 파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틸라는 로마 교황이 자신에게 찾아와 정중히 요청한 것을 통해 서로마가 동로마 제국처럼 자신의 통치 하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상 동서로마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게 한 아틸라는 다시 자신의 본거지가 있는 헝가리의 초원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강력한 지배자의 말로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453년 그는 일디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그는 붉은 피를 흥건히 흘린 채 시종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동서로마를 공포로 떨게 만들고 그들을 자신의 발아래 둔 영웅의 최후였습니다.



*출처 

세계 각국사 시리즈 ‘이희수 著 터키사’

르네 그루쎄 著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패트릭 하워스 著 ‘훈족의 왕 아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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