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조선판 레골라스
게시물ID : history_15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생겼어용♥
추천 : 11
조회수 : 1584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1/06/03 23:59:40
=============================================================================== 태조 1권 총서 29번째기사 태조 이성계가 화살 하나로 다섯 마리의 까마귀를 떨어뜨린 것을 발설치 못하게 하다 =============================================================================== 태조가 젊을 때, 정안 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는 이를 이상히 여겨 태조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 하였다. 김씨는 환왕(桓王)의 천첩(賤妾)이니, 곧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어머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3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태조 1권 총서 30번째기사 태조가 20마리의 담비를 쇠살로 명중시키다 ======================================== 태조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담비[蜜狗]가 달려 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한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3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태조 1권 총서 31번째기사 태조가 용맹스럽게 멧돼지·범 등을 사냥하다 ========================================== 태조가 소시(少時)에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쫓아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갑자기 백 길[仞]의 낭떠러지에 다다르니, 그 사이가 능히 한 자[尺]도 되지 않았다. 태조는 말 뒤로 몸을 빼어 섰고,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 사람이 고(告)하기를, “큰 범[虎]이 아무 숲속에 있습니다.” 하니, 태조는 활과 화살을 쥐고, 또 화살 한 개는 허리 사이에 꽂고 가서 숲 뒤의 고개에 오르고, 사람을 시켜 아래에서 몰이하게 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보니, 범이 자기 곁에 있는데 매우 가까운지라, 즉시 말을 달려서 피하였다. 범이 태조를 쫓아와서 말 궁둥이에 올라 움켜채려고 하므로, 태조가 오른손으로 휘둘러 이를 치니, 범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태조가 말을 돌이켜서 이를 쏘아 죽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3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태조 1권 총서 32번째기사 동북면 도순문사 이달충이 태조가 비범한 인물임을 말하다 ======================================================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이달충(李達衷)이 고을을 순시(巡視)하다가 안변부(安邊府)에 이르렀는데, 달충(達衷)의 진무(鎭撫) 한 사람이 어떤 사건으로 태조를 불쾌하게 여겨 달충에게 말하였다. 달충이 태조를 불러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뜰에 내려와 영접해 앉으면서 술자리를 베풀고는 진무(鎭撫)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그와 겨루지 말라.” 하였다. 환조(桓祖)가 달충을 보고 그가 태조를 후하게 대접한 것을 사례하였다. 달충이 서울로 돌아갈 적에 환조가 들에서 전송하니, 태조는 환조의 뒤에 서 있었다. 환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니 달충이 서서 마시었으나 태조가 잔에 술을 부어 돌리는데 이르러서는 달충이 무릎을 끓고 마시었다. 환조가 괴이히 여겨 물으니, 달충이 말하기를, “귀랑(貴郞)은 참으로 비범한 사람입니다. 공(公)께서도 아마 미치지 못할 것이며, 공의 가업(家業)을 번창(繁昌)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드님일 것입니다.” 하면서, 이내 그 자손을 부탁하였다. 이때 건너편의 언덕에 일곱 마리의 노루가 모여 서 있으므로, 달충이 말하기를, “어떻게 해서 노루 한 마리를 잡아 오늘의 반찬을 하지 않겠는가?” 하니, 환조가 태조에게 명하여 휘하(麾下)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태조가 휘하의 군사들로 하여금 산 뒤에서 노루를 놀라게 했더니, 일곱 마리의 노루가 즉시 달려 내려오는지라 태조가 다섯 번 쏘아 다섯 마리의 노루를 죽이고, 또 한마리의 노루를 쫓아서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마침 큰 못이 앞에 가로막아 있고, 얼음이 얼었으므로, 태조는 말고삐를 잡고 질러 건너가서 이를 쏘고, 또 나머지 한 마리의 노루를 쏘아 죽이고는, 화살이 떨어져서 그치었다. 또 일찍이 강음(江陰) 산수(酸水)의 땅에서 사냥했는데, 한 떼의 다섯 마리 노루를 쫓아서 다섯 번 쏘아 다 죽였다. 평상시에도 3, 4마리의 노루를 연달아 쏘아 죽인 것은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숨어 엎드린 꿩을 쏠 적에는 반드시 놀래켜서 두서너 길 높이 날게 한 다음에 쳐다보고 쏘아 번번이 맞히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3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태조 1권 총서 33번째기사 무거운 활을 들고 태조가 노루 7마리를 모두 명중시키다 ====================================================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鶴)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깍지[哨]를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사람의 쓸 것이 못된다.” 하면서, 이를 땅에 던지니, 태조는 이를 주워 화살통에 꽂고 앞에 섰는데,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태조가 달려가서 쏘니 화살 한 개에 죽었다. 또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이같이 한 것이 일곱 번이나 되니, 환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웃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3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歷史) / *왕실(王室) ======================== 태조 1권 총서 41번째기사 태조와 나하추와의 전투 ======================== 7월, 나하추(納哈出)가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조소생(趙小生)·탁도경(卓都卿) 등과 함께 홍원(洪原)의 달단동(韃靼洞)에 둔치고, 합라 만호(哈剌萬戶) 나연첩목아(那延帖木兒)를 보내어 여러 백안보하 지휘(伯顔甫下指揮)와 함께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선봉(先鋒)으로 삼았는데, 태조는 덕산동원(德山洞院)의 들에서 만나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고, 함관령(咸關嶺)·차유령(車踰嶺) 두 재[嶺]를 넘어 거의 다 죽였으나, 군기(軍器)를 버린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이 날에 태조는 답상곡(答相谷)에 물러와서 둔치니, 나하추가 노하여 덕산동(德山洞)으로 옮겨서 둔쳤다. 태조는 밤을 이용하여 습격하여 이를 패퇴(敗退)시키니, 나하추가 달단동(韃靼洞)으로 돌아가므로, 태조는 사음동(舍音洞)에 둔쳤다. 태조가 척후(斥候)를 보내어 차유령(車踰嶺)에 이르니, 적이 산에 올라가서 나무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지라, 척후병(斥候兵)이 돌아와서 아뢰니, 태조는 말하기를, “병법(兵法)에는 마땅히 먼저 약한 적을 공격해야 된다.” 하면서, 드디어 적을 사로잡고 목 베어 거의 다 없애고, 스스로 날랜 기병(騎兵) 6백명을 거느리고 뒤따라 가서 차유령(車踰嶺)을 넘어 영(嶺) 아래에 이르니, 적이 그제야 깨닫고 맞아 싸우려고 하였다. 태조는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과 맞붙어 그 비장(裨將) 한 사람을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이곳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싸워서 패배(敗北)한 형상을 물으니, 여러 장수들은 말하기를, “매양 싸움이 한창일 때에 적의 장수 한 사람이 쇠갑옷[鐵甲]에 붉은 기꼬리[朱旄尾]로써 장식하고 창을 휘두르면서 갑자기 뛰어나오니, 여러 사람이 무서워 쓰러져서 감히 당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태조는 그 사람을 물색(物色)하여 혼자 이를 당적하기로 하고,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니, 그 사람이 과연 앞으로 뛰어와서 창을 겨누어 대기를 심히 급하게 하는지라, 태조는 몸을 뒤쳐 말다래에 붙으니, 적의 장수가 헛찌르[失中]고 창을 따라 거꾸러지는지라, 태조는 즉시 안장에 걸터앉아 쏘아서 또 이를 죽이니, 이에 적이 낭패(狼狽)하여 도망하였다. 태조는 이를 추격하여 적의 둔친 곳에 이르렀으나, 해가 저물어서 그만 돌아왔다. 나하추의 아내가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래 되었지만, 다시 이와 같은 장군이 있습디까? 마땅히 피하여 속히 돌아오시오.” 하였으나, 나하추는 따르지 않았다. 그 후 며칠 만에 태조가 함관령(咸關嶺)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韃靼洞)에 이르니, 나하추도 또 진을 치고 서로 대하여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오므로, 태조 또한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 앞에 나가서 서로 대하였다. 나하추가 속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 올 적에는 본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반성(潘誠) 등을 뒤쫓아 온 것이고, 귀국(貴國)의 경계를 침범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여러 번 패전하여 군사 만여 명을 죽이고 비장(裨將) 몇 사람을 죽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궁지(窮地)에 몰렸으니,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합니다. 다만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적의 병세(兵勢)가 매우 강성하므로, 태조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그들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하였다. 한 장수가 나하추의 곁에 서 있으므로, 태조가 이를 쏘니,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또 나하추의 말을 쏘아서 죽이니 바꾸어 타므로, 또 쏘아서 죽였다. 이에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니, 서로 승부(勝負)가 있었다. 태조가 나하추를 몰아 쫓으니, 나하추가 급히 말하기를, “이 만호(李萬戶)여, 두 장수끼리 어찌 서로 핍박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면서 이에 말을 돌리니,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나하추의 휘하(麾下) 군사가 말에서 내려, 그 말을 나하추에게 주어 드디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해가 또한 저물었으므로, 태조는 군사를 지휘하여 물러가는데, 자신이 맨 뒤에 서서 적의 추격을 막았다. 영(嶺)의 길이 몇 층으로 꼬불꼬불한데, 환자(宦者) 이파라실(李波羅實)이 맨 아랫층에 있다가 급히 부르기를, “영공(令公),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영공, 사람을 구원해 주시오.” 하매, 태조가 윗층에서 이를 보니, 은갑옷[銀甲]을 입은 두 적장(賊將)이 파라실을 쫓아 창을 겨누어 거의 미치게 되었는지라 태조는 말을 돌려 두 장수를 쏘아 모두 죽이고, 즉시 20여 인을 연달아 죽이고는, 이에 다시 군사를 돌려 쳐서 이들을 달아나게 하였다. 한 적병이 태조를 쫓아 창을 들어 찌르려고 하므로, 태조는 갑자기 몸을 한쪽으로 돌려 떨어지는 것처럼 하면서 그 겨드랑을 쳐다보고 쏘고는 즉시 다시 말을 탔다. 또 한 적병이 앞으로 나와서 태조를 보고 쏘므로, 태조는 즉시 말 위에서 일어나 서니, 화살이 사타구니 밑으로 빠져 나가는지라, 태조는 이에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적병을 쏘아 그 무릎을 맞혔다. 또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頤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이미 세 사람을 죽이니 이에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태조는 용감한 기병[鐵騎]으로써 이를 짓밟으니, 적병이 저희들끼리 서로 밟았으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돌아와서 정주(定州)에 둔치고 수일(數日) 동안 머물면서 사졸을 휴식시켰다. 먼저 요충지(要衝地)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이에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은 성곶(城串)으로 나아가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로 나아가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송두(松豆) 등에 나아가서 나하추와 함흥(咸興) 들판에서 만났다.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내어 돌진(突進)하면서 적을 시험해 보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 곧바로 전진하는지라, 태조는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면서 그 고삐를 당겨 그 말을 채찍직하여 말을 재촉하는 형상을 하니, 세 장수가 다투어 뒤쫓아 가까이 왔다. 태조가 갑자기 또 나가니, 세 장수의 말이 노(怒)하여,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바로 앞으로 나오는지라, 태조는 뒤에서 그들을 쏘니, 모두 시위소리가 나자마자 넘어졌다.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유인하여 요충지(要衝地)에 이르러, 좌우(左右)의 복병이 함께 일어나서 합력해 쳐서 이를 크게 부수니, 나하추는 당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도망해 갔다. 은패(銀牌)와 동인(銅印) 등의 물건을 얻어서 왕에게 바치고, 그 나머지 얻은 물건들은 이루 다 셀 수도 없었다. 이에 동북 변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보내어 화호(和好)를 통하여 왕에게 말[馬]을 바치고, 또 비고(鞞鼓) 21)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주어 예의(禮意)를 차렸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복종[心服]한 때문이었다. 나하추의 누이[妹]가 군중(軍中)에 있다가 태조의 뛰어난 무용[神武]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또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 하였다. 환조(桓祖)가 일찍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조회할 때에 도중에 나하추에게 지나가면서 태조의 재주를 칭찬하여 말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나하추가 패전하여 돌아가서 말하기를, “이자춘(李子春)이 지난날에 ‘내가 재주 있는 아들이 있노라.’고 하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였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9년(1376) 병진 겨울에 이르러 신우(辛禑) 22) 가 개성 윤(開城尹) 황숙경(黃淑卿)을 보내어 가서 교빙(交聘)하니, 나하추가 말하였다. “내가 본디 고려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백안첩목아왕(伯顔帖木兒王) 23) 이 나이 젊은 이 장군(李將軍) 24) 을 보내어 나를 쳐서 거의 죽음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소. 이 장군께서 평안하신가? 나이 젊으면서도 용병(用兵)함이 신(神)과 같으니 참으로 천재(天才)이오! 장차 그대 나라에서 큰일을 맡을 것이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4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人事)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외교(外交) 이외에도 많은데 더 올리면 너무 많아서 몇개 간추렸습니다. 과장이 좀 심각한듯하지만, 창업자를 신격화시키는건 어느 왕조나 다 똑같으니 일단 넘어가죠. 아무튼 실제로도 이성계는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전설에 가까운(..) 전공들을 세웠으니까요. 왠진 모르겠지만, 2천여명에 불과한 이성계의 사병들이 나하추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벌였으며, 고려 최고의 정예 기병대였다는 사실에 신경쓰는 분들은 별로 없네요? 조선은 무조건 약했으며 그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개새끼고, 광해군은 무슨 위대한 명군이였다고 하시는 분들은 많은데 말이죠. 참고로 이성계휘하 사병들은 동북면 출신답게 여진족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고 합니다. 밑엔 태조의 어궁시(활과 화살)인데, 조선의 각궁보단 여진족의 각궁과 더 비슷하네요:D (1),(2) 일제시대때 찍힌 태조의 어궁시. 현재엔 어디론가 사라졌음. (3) 여진족의 각궁. (4) 조선의 각궁.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