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역사적 실존 여부 및 실존 시기, 노자가 대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영역에 속한다. 한마디로 그 누구도 이에 관해 속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또,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일화 역시 극단적으로 보일 정도 까지 공자는 낮추고 노자는 높이고 있어 이미 명성을 얻은 공자를 깎아내림으로써 노자 지지자들이 자기 유리하게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고 입지를 굳히고자 하였던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불러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일화를 노자를 대표적 인물로 전면에 내세워 사상, 철학, 정치사조를 주장하고자 했던 이들이 특정 목적으로 공자 사후에 지어낸 위작으로 보고 있다.
천하를 품안에 담아내고자하는 큰 그릇이 되기를 진실로 추구하는 이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면 자연히 인격 또한 그에 걸맞은 수준으로 잘 닦이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기준에서 노자는 저 일화를 통해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은 태산만하다.고 나는 냉정히 평가한다. 최근에 있었던 도올 선생과 달라이 라마 성하의 대화만 하더라도 지성 자체로는 도올 선생이 앞서나 앎의 실천을 기준으로는 단연코 달라이 라마 성하가 앞섬이 여실히 드러난다. 도올 선생이 그 길을 아는 자라면 달라이 라마 성하는 그 길을 걸어온 자다. 두 사람이 진솔하게 서로를 넉넉히 포용하고 인정하는 결말은 내게 큰 깨우침을 준다. 이것이 일가를 이룬 철인과 철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맺음의 기본 정석이지 어떻게 한 철인이 다른 철인에게 일방적으로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플라톤과 디오게네스의 관계도 그렇다. 디오게네스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부른 플라톤이 디오게네스를 무치, 무소유 등을 추구하는 철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디오게네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는가?
또, 노자의 무위자연은 문명, 국가, 사회 등 기본 질서가 이미 존재함을 전제로 국가와 사회 그 자체와 이들 주도로 행해지기 쉬운 과도한 통제, 규제, 구속 및 억압 등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또, 대안 문명으로서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지, 정말 문자 그대로 모든 이들이 무위자연으로 산다면 그 의도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 즉 야생 상태의 적자 생존을 불러오기 쉽다. 노자의 철학이 이렇게 한계가 분명하다면 보편 철학이나 사상이 되기에는 수준 및 함량 미달이라고 볼 수 밖에는 없다. 다만, 새로운 판본의 발굴로 유학의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이 다소 유화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천만다행이라고 나는 본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원음 자체일까?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소크라테스의 원음 자체일까? 논어가 공자의 원음 자체일까? 숫타니타파가 석가의 원음 그 자체일까? 석가의 원음이 그 무엇이라고 그 누구도 감히 단정하거나 장담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천하에 그 뉘 있어 노자의 원음에 대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책을 덮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사람에 대해 기나긴 탐구 여정에 들어서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