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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연 이야기 - 세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8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4
조회수 : 66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19 14:43:03

333년 5월 모용부 발전의 기틀을 닦은 모용외가 사망했습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모용외가 죽자 모용외 못지 않은 카리스마와 실력을 지니고 있던 모용외의 아들들 사이에서 계승전쟁이 발발했습니다. 321년에 세자(世子)로 지정되어 모용외의 뒤를 이어 모용부의 지도자 자리에 오른 모용황(慕容皝)과 그의 서형(序兄)인 모용한(慕容翰)과 동생 모용인(慕容仁)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모용황과 모용한 그리고 모용인 모두 실적 면에서도 모용부 내에서도 인정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계승전쟁 초반은 모용황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모용부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요동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모용인은 요동을 장악하여 모용황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모용황에게 밀린 모용한은 같은 선비 일파인 단부로 망명하였지만 단부의 군대를 안내하여 모용황을 공격했습니다. 1대 2라는 불리한 상황에서 모용황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지만 모용한이 모용부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철군함으로써 모용황은 간신히 세력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반란세력인 모용인은 아직 모용황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용황과 모용인의 전쟁은 336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336년 모용황이 얼음이 얼은 바닷길로부터 모용인을 기습 공격해 모용부 내의 제위계승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 사실 모용외의 즉위 그리고 모용황의 즉위 내에서 발생했던 왕족들간의 제위계승다툼은 5호의 여러 나라들이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인 종실적인 군사봉건제 때문이었습니다. 

 

 

제위계승 전쟁을 마무리지은 모용황은 잠시 여러가지 문제를 처리한 후 아버지인 모용외가 동진에게는 비교적 저자세로 나아갔다는 것과는 달리 모용황은 모용부 자립의 길을 선언하고 스스로 337년 9월 연왕(燕王)으로 즉위하였고 백관의 설치 등 지배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스스로 연왕이 된 모용황은 동진에게 연왕위(燕王位) 수여를 요구했습니다. 이 모용황의 요구는 7년 뒤인 341년에 실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연이 동진의 황제권을 인정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왕의 자리에 모용황은 다시 외부로 눈을 돌립니다. 그의 눈에 첫번째로 들어온 것은 지난날 제위계승 전쟁에서 자신을 괴롭힌 단부였습니다. 338년모용황은 당시 석호(石虎)가 다스리고 있던 후조(後趙)와 동맹을 맺고 단부를 공격했습니다. 비록 포악한 통치자였지만 전쟁에서만큼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와 같았던 석호가 이끄는 후조군과 이미 세자시절 부터 여러 군공을 쌓아올린 모용황이 이끄는 전연군(이제부터는 모용부가 아닌 전연이라 하게습니다.)의 공격에 단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전연은 이 혼란을 틈타 단부의 민호와 가축을 약탈하고 그대로 전선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갑작스런 전연의 이탈에 석호는 분노하였고 이후 후조와 전연은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338년 5월 석호는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극성을 포위하였습니다. 석호가 이끄는 후조군의 기세가 얼마나 사나웠는지 전연 내부에서도 모용황에게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하지만 모용황은 신하들의 반대를 뿌리치며 「나는 천하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항복을 할 수 있겠느냐!」라며 아들인 모용각(慕容恪)에게 군사를 주어 후조 군사를 급습케 하여 이 위기를 벗어나고 오히려 영토까지 확보했습니다. 훗날 전연의 국군 총사령관으로써 전연을 진두지휘하는 모용각의 첫 출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39년 모용황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모용황이 이끄는 대군은 신성(新城)에까지 진군하여 당시 고구려의 왕이었던 고국원왕에게 맹약을 요구했습니다. 고국원왕은 그 요구를 수락하였고 양측은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340년에 세자를 전연에게 보내 조회하는 등 이전의 미천왕보다 상당히 저자세로 전연과의 관계를 이어나갑니다.

 

 

340년 다시 후조의 대군이 전연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후조군을 격파한 경험이 있는 모용황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군대를 우회하여 후방이었던 계(薊)를 습격하여 후조군을 또다시 격파했습니다. 후조군의 격파와 동시에 전연은 계성(薊城)부터 고양(高陽)에 이르는 지역을 침공하고 후조가 단부를 멸망시키면서 얻은 단부의 영역을 획득하고 한족을 포함한 3만여호를 획득하였습니다. 후조를 격파하면서 전연의 중원 진출은 가속화되었습니다. 342년 모용황은 도읍을 극성에서 용성(龍城)으로 옮겼습니다. 용성으로 도읍을 옮긴 모용황은 국유지를 풀어 유민들에게 둔전케하고 학교제도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중원을 진출하려면 처리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339년 맹약을 맺었지만 그냥 두기에는 껄끄러운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 내부에서도 이런 전연과의 전쟁을 예측했는지 환도성을 정비한 후 천도하고 국내성을 쌓는 등 전연과의 공격에 대비하여 수도 방어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모용황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때마침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용한은 평탄하고 넓은 북도(北道)와 험하고 좁은 남도(南道) 중 남도를 선택하여 기습적으로 적을 공격하자는 계책 또한 건의합니다.

 

 

「 적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체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황은 모용한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11월에 군사 4만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섭니다. 이 군대의 선봉에는 이번 전략을 제시한 모용한 그리고 모용패(慕容覇)가 있었습니다. 모용황은 양동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장사(長史) 왕우(王㝢) 등에게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남도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당시 북도에는 고국원왕의 동생 무(武)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전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고 고국원왕은 북도에 배치된 정예군보다 약한 군대를 이끌고 남도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도를 지키고 있던 선봉으로 온 모용한과 모용패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은 고구려가 막아냈지만 뒤이어 따라온 전연의 본대 공격까지는 고구려군은 버티지 못하였습니다. 고구려군은 크게 패퇴하였고 전연의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를 장악했습니다.

 


고국원왕은 단웅곡(斷熊谷)으로 도망갔습니다. 전연의 장군 모여니(慕輿埿)가 환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왕족들을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본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패배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북도를 지키고 있던 고국원왕의 동생 무가 이끄는 5만 고구려군을 상대한 왕우 등이 이끄는 전연군 1만 5천명은 괴멸하였고 이로 인해 모용황은 환도성에서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국원왕을 불러내려 했지만 이미 고국원왕도 무의 소식을 듣고 있었기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전체 4만 명에서 3분의 1인 1만 5천에 이르는 병력을 잃은 모용황은 더 이상 이 전쟁에서 소득이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 때 아불화도가의 머리를 베어 환도성 장악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좌장사 한수가 모용황에게 말했습니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한수는 승리자의 기쁨에 취하지 않고 상당히 냉정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짜피 전연의 목적은 고구려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용황의 목적은 모용한의 말처럼 중원 공략이었지 고구려 장악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전연군이 환도성을 장악했다지만 그 수는 2만 5천에 불과한 상태였고 고국원왕이 단웅곡으로 도망쳤다고는 하지만 아직 북도에는 고국원왕의 동생 무가 이끄는 5만 고구려군이 있었습니다. 병력 수에서조차 차이가 나는 전연군으로써는 환도성 장악까지가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돌아가면 더욱 독이 오른 고구려와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질 것이고 모용황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중원 입성에는 차질이 생길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에 한수는 볼모를 잡아서 전연의 군사 1명도 잃지 않고 고구려를 복속시키려고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용황도 이런 한수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고구려로써는 동천왕 20년(246년) 관구검의 환도성 장악 이후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이었지만 전연에 있어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은 비록 1만 5천의 군대를 잃기는 했지만 5만이라는 인구 확보와 고구려의 공격을 막은 보험까지 확보한 크나큰 승리였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전연이 전진에게 멸망하는 날까지 거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신세를 지내야 했습니다.

 

 

343년 고국원왕은 아우인 무를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습니다. 모용황은 이에 따라 미천왕의 시신을 고구려에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구려를 경계하며 어머니인 주씨는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344년 모용황은 아직 복속되지 않은 우문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45년에는 아들인 모용각에게 고구려를 공격하여 남소성(南蘇城)을 함락시켰습니다. 346년에는 부여마저 멸망시켰습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단부 멸망시키고 그 다음에는 후조를 격퇴하고 그리고 고구려를 복속시키고 우문부를 멸망시킨 전연은 사실상 동방 최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모용황의 정복전쟁으로 전연의 인구는 모용외 시절보다 10배나 증가했습니다. 전연의 국력 역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인 모용외보다 더 뛰어난 군사적 활약으로 전연의 힘을 길러놓은 모용황은 348년 9월 수렵도중 낙마하여 머리를 다친 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비록 11년간 (333년 기준으로는 15년간)었지만 이 기간동안 모용황은 지칠 줄 모르는 정복활동과 체제 정비로 아버지가 남겨준 모용부를 더욱 성장시켰습니다. 모용황은 사후 아들인 모용준(慕容儁)에 의해 태조(太祖) 문명제(文明濟)에 추존되었습니다.

 

 

※ 출처 : 삼국사기, 전쟁과 역사 삼국편,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중국의 역사「위진남북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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