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흠... 그야... 앞날을 볼 수 있다면... 보고야 싶죠... 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궁금하고..." "그러면 저를 잠자코 따라 오세요. 좋은 것을 보여 드릴테니..."
마른 남자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허기적 허기적 어두운 산길을 올라 갔다. 김사장은 약간 무서워졌으나 이미 내친 걸음이라 그의 뒤를 다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체격으로 보나 뭘로 보나 여차하면 저리도 야윈 남자 정도야 한방에 날리고 도망갈 수 있겠다 싶은 안도감 도 들었고...
"자, 여기예요. 다 왔어요." "여기에 뭐가 있는데요?"
김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괴괴한 달빛만이 조용히 비추어 사방이 깜깜해 잘 분간이 가지를 않았는데 자신의 앞에서 졸졸 졸 하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남자는 김사장의 손을 잡고 그 물흐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안내 를 했다. 김사장이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살펴보니 거칠게 파여진 돌 속에 한방울씩 물방울이 떨어져 자그마한 약수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 다.
"이... 이게 뭐예요?"
마른 남자는 피식하고 한번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너무 지난날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에 제가 앞날을 볼 수 있는 약수터로 모시고 온 거죠. 자, 자세히 물 속을 들여다 보세요. 뭐가 보일 겁니다."
김사장은 희미하게 비쳐지는 웅덩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물밖에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자 점차 희끄무래하게 영상이 나 타나기 시작했다.
"엇? 저... 저건..."
물속에서는 김사장과 부인이 신나게 싸우는 장면이 보였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저런 적이 여지껏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 진짜로 앞날의 일이...
"선생님의 눈에 보이는 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랍니다. 뭐가 보이죠?"
김사장은 마른 남자와 웅덩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더듬거렸다.
"제... 제가 마누라와 싸우는 데요... 헉... 그런데... 왜..." "아하... 그래요? 앞날이란건 알지 않는게 더 좋을 때가 있죠. 하지만 보고 말았으니...반드시 그 일은 일어날겁니다. 혹시 보지 않았다면 몰 라도..." "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마른 남자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앞날이란... 자신의 의지와 많은 상관이 있죠. 그래서 이렇게 될 것 같다고 마음을 먹으면 안될 일도 잘 되는 경우가 허다 하잖아요? 같은 이유죠." "이런... 그럼 안 봤다면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 "훗...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이런... 젠장."
김사장은 약수 웅덩이를 한참동안 다시 쳐다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휴... 그래도 저는 저 정도의 일만 봤으니 다행이네요." "흠...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음... 아,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것 같군요. 저는 이제 산을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요?"
마른 남자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목례를 하고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 했다. 왠지 모를 허전함이 김사장의 머리 속에 밀려왔다.
"이, 마누라가. 정말 왜 이래!" "아이고, 내가 못살어. 허구헌날 야밤에 운동이랍시고 돌아다니더니 저 양반이 돌았나?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왜 소리를 질러... 아이고 내 팔자야."
김사장은 한시간째 부인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결혼 후 30여년동안 이토록 심하게 싸운 것은 처음이다시피한 엄청난 부부 싸움이었다. 결국에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달려나와 엉겨붙은 둘을 뜯어 말리는 사태 까지 발생하고 종내에는 민첩한 시민 신고정신이 발휘되어 경찰까지 달 려 오고 말았다.
"내참... 살다보니 남사스러워서..."
파출소 안에서 김사장은 부인과 나란히 앉아 취조를 받고 있었다.
"아니, 겨우 그정도 일가지고 동네사람들이 모두 자는 한밤중에 그랬단 말이예요?"
이순경이 서로 눈을 흘기고 있는 김사장 내외를 바라보며 나무랬다.
"아니, 글쎄 그게요... 이놈의 여편네가... 하늘같은 남편이 말을 하면 믿어야지.. 자꾸 따지고 드니까..." "뭐라고? 아니... 하늘같은?"
다짜고자 날아드는 부인의 손바닥이 김사장의 뺨에 정확히 명중하자 코 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어, 어... 이 여편네가 돌았나?"
김사장이 벌떡 일어나 아무생각없이 자신이 앉고 있던 의자를 냅다 집 어 던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의자는 부인의 얼굴을 강타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부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김사 장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이순경이 다짜고짜 김사장의 팔을 부여잡고는 유치장으로 떠밀어 넣으며 말했다.
"아니, 김사장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경찰이 두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폭력을 휘둘려요? 어쨌든 일단 여기서 기다리세요."
김사장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태에 멍하니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며칠후 유치장에서 풀려난 김사장은 낙심한 채로 집으로 돌아와 부인을 불러냈다. 부인은 그간의 일이 조금은 미안했던지 많이 얌전해진 태도로 김사장의 넋두리를 잠자코 들었다.
"어쨌든... 내가 때린 건 미안했고... 그나저나, 참 희한한 일이야..." "뭐가요?" "아, 그게 말이야..."
김사장은 부인과의 어색해진 분위기도 가라앉힐 겸 며칠전 약수터 가는 길에 만났던 마른 남자와 또 그 약수터에서 앞날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 를 쉬지도 않고 해댔다.
"여보. 정말 그런게 있어요? 신기하네요?"
부인은 김사장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글쎄... 나도 귀신에 홀린 것 같긴 했지만... 정말 그날 내가 본 장면 하고 똑같더라니까? 나중에 파출소에 가는 것까지..." "햐... 마치 옛날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얘기네요."
김사장은 부인이 자신의 얘기를 듣고 신기해 하는 것을 보고는 예전 신 혼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땐 지금의 이 표정처럼 참으로 여리고 순진한 아가씨였는데...
"어쨌든... 내일은 회사에 일찍 가봐야하니 먼저 자겠소. 며칠 고생했더 니 피곤하기도 하고... " "예, 그러세요."
부인의 친절한 말투에 왠지 마음이 포근해져서 잠자리에 들었다.
"여보. 회사 가시는 길에 집앞 은행에 들러 여기 적힌 계좌번호로 돈 좀 부쳐 주세요."
김사장의 부인은 출근길에 늦은 김사장을 붙잡고 쪼그맣게 접은 쪽지를 내밀며 말했다.
"흠... 회사에 늦었는데... 나중에 부치면 안될까?" "안돼요. 중요한 거니 가시는 길에 꼭 부치세요. 아참, 그리고 주민등록 증 가지고 계시죠? 요새는 실명제라 돈 부칠때 확인한단 말이예요." "알아. 주민등록증은 늘 가지고 다닌다고. 그나저나 늦었는데..." "에이, 오래 걸리지도 않아요. 잠시 들렸다 가세요. "아... 알았소. 그럼 다녀오리다."
김사장은 부인의 배웅을 뒤로하고 집 앞에 있는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 은 말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꽤 많았는데 김사장은 씩씩하게 걸어들어가 번호표를 뽑아 들고는 조금전 부인이 건네준 쪽지를 펴들었다.
"어디다가 돈을 부치라는거야? 이거 원 눈이 많이 나빠져서... 돋보기 가... 어디있더라?"
김사장은 품에서 부시럭 거리며 낡은 돋보기를 꺼내어 끼고는 부인이 적 어준 쪽지를 읽었다.
[여보... 이글을 읽을 때쯤에는 모든게 결판이 나 있겠군요. 그래요. 전 더이상 당신의 이상한 성격에 못견디겠어요. 30여년동안 당신과 살면서 헤어지려고 많이도 생각했지만 그러지도 못하고... 근래에는 잠이 든 당 신 얼굴만 봐도 미워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당신을 소리 소 문 없이 죽일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훗... 오늘 새벽에 당신이 말해준 그 약수터를 갔었거든요? 그런데 정말 로 서글픈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 당신이 말한 그 마른 남자 가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그를 따라 그 약수터로 갔더니...
제가 본 앞날이 무엇이었는 줄 아세요? 바로 당신이 계신 그 은행 건물 이 그 시간에 무너지는 것이었어요. 건물안에 있던 사람들은 시멘트 덩 어리들에 깔려 처참하리만치 찢어지고 으깨져 죽어가는데... 여기 저기 서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도 보였고... 더욱이 불까지 나서 죽은 시신들의 형체는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처음에는 너무 놀라 한동안 숨도 제대로 못쉬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신을 깨끗이 죽일 방법이 떠오르더군요. 건물이 무너지는 시간에 맞추어 당신을 그곳으로 보내면.... 아무에게도 의심 받지 않고... 게다가 죽은 사람의 신원이 확인되면 보상도 많이 받을 수 있겠죠? 참, 주민등록증은 잘 가지고 계시죠? 호. 호. 호.
아,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그 은행 옆가게가 가스집인데... 그 집 에서 먼저 폭음이 들리고 불이 날거에요... 그 다음은... 건물이... ]
김사장이 사색이 되어 어쩔줄 몰라 멍하니 서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두 런두런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