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서울 왔다 가는 길에,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동대문에서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비키니뽕을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비키니뽕 한 쌍을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했더니,
"비키니뽕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마냥 늑장이다.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타야 할 차 시간이 빠듯해 왔다.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노인은 화를 버럭 내며,
"옷도 멋있게 차려입고, 머리도 깔끔하게 자르고,시간과 공을 들여야 소개팅도 성공하지,오유인이 공도 안들이고 생길거같은가?"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얼마 후에야, 뽕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뽕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뽕을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비키니뽕이 너무 배부르면, 사람들의 눈썰미 피하기 어렵고또한, 뽕이 너무 얇으면, 무용지물이란다.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참으로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