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홍위병에 대해서
게시물ID : history_9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눈비비고
추천 : 4
조회수 : 1096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4/25 18:32:17
1. 마오 쩌뚱의 정치적 위기 1960년대, 마오 쩌뚱이 밀어붙였던 대약진 운동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 납니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얘기가 "저 새는 해로운 새다"였죠. 참새를 가리키며 마오 쩌뚱이 한 이 한 마디로 중국의 참새는 씨가 마르고 해충이 번식해서 농업이 망해 버리죠. 결국 중국은 20만 마리의 참새를 소련에게서 받아 와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각 마을마다 재래식 용광로를 만들어 철강을 생산,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자고 했죠. 그 후 각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농업생산량, 철강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거였죠.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제대로 조사를 하자는 펑 더 화이는 실각합니다. 그 실상은 위에서 말한 참새 몰살로 인한 해충 번식, 한 곳에 너무 많은 작물을 심어서 생산량이 떨어짐 등이었습니다. 철강 역시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1%도 못 됐고, 나머지는 이른바 "똥철"이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그 중 10% 정도만 다시 가공해서 그럭저럭 쓸 수 있을 정도였고 90%는 그냥 버려야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거기에 인력을 투입했으니 농업생산력은 더 떨어졌죠. 하지만 이걸 사실대로 보고하면 반동 분자로 몰리는 현실 때문에 관료들은 부풀려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오 쩌뚱은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한편 인도의 수상 네루는 통계 기관까지 만들며 정확한 수치를 알아내려고 노력했다고 하죠. 이런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아사자는 최고 오천만명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중국의 주장은 천만, 통설은 이천만에서 사천만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습니다. 결국 덩 샤오핑 등의 신진세력들이 하야를 요구했고, 마오 쩌뚱도 류 사오치와 덩 샤오핑에게 주석과 당서기를 넘겨줍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바로 홍위병입니다. 2. 해서파관 마오 쩌뚱은 자신을 지지하는 젊은 층을 모았고, 그들을 홍위병이라 일컬었습니다. 홍위병이라 한꺼번에 말하긴 하지만 이들은 통일된 철학 및 지침이 없었죠. 그저 마오 쩌뚱의 말을 신격화 하는 모임들일 뿐이었습니다. 63년, 마오 쩌뚱은 4청 운동,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사상을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시동을 걸기 시작했고 여기에 결정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해서파관"이죠. 해서파관은 역사 연극으로 베이징 부시장직에 있던 우한이 발표한 연극입니다. 청렴한 관리가 폭군 황제에게 파직당한다는 내용이죠. 마오의 부인이 이것을 마오 쩌뚱을 까는 물건이라고 비난했고, 격렬한 키배가 벌어지면서 마오도 직접 끼어들어 비판합니다. 여기에 빠돌이 린뱌오가 "마오의 말씀이 모두 옳다"는 내용의 녀설을 했고, 66년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자!"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냅니다. 이것을 "조반유리"라고 합니다. 마오는 이 젊은이들을 칭찬하며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하죠.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 사오치와 덩 샤오핑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1966년, 이렇게 문화대혁명이 시작됩니다. 3. 관료주의와 구 문화의 잔재를 없애자 마오 쩌뚱이 홍위병의 활동에 자유를 부여하면서 홍위병들은 중국 전토에서 일어납니다. "낡은 것들" 절, 사당 등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은 무차별로 붙들려 구타당하고 살해당합니다. 경찰 역할을 하는 공안은 말리지 않았고, 말릴 엄두도 내지 못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마오는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 걸지 말라는 교시를 내립니다. 이제 이들을 막는다는 건 곧 반동 분자로 몰리는 거였죠. 10월 10일,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됩니다. 린 뱌오는 류 사오치와 덩 샤오핑을 주자파(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라고 비난했으며, 펑 더 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다니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67년에는 린 뱌오와 마오의 아내 장칭이 상하이의 홍위병들을 이용해 상하이 고위직들을 숙청했고, 베이징에서는 부총리 타오주를 숙청합니다. 공산당 내에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를 반혁명분자로 모는 일이 빈번했고, 마오는 이것을 잘 했다고 칭찬합니다. 군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이들 역시 홍위병에 의해 실각했고, 마오가 인민해방군보다 홍위병이 더 위에 있다고 하면서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이 과정에서 홍위병끼리도 분파가 발생, 서로와 전쟁 수준으로 싸웠다고 합니다. 그저 마오 쩌뚱의 말만 따르는 거였으니 그 내부에서 말이 똑같을 수 없으니까요. 심할 경우 상대를 폭행해서 죽인 다음 공개적으로 인육을 먹은 일까지 있다고 합니다. 68년. 드디어 홍위병들은 류 사오치의 집에 쳐들어가 2시간 동안 폭행 당하고 카이펑(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이죠)으로 유배당하고 사망합니다. 덩 샤오핑 역시 폭행당한 후 집단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으며, 그 아들은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을 강요당했고, 하반신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오 쩌뚱의 반대파가 완전히 몰락하면서 홍위병은 그 이용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이 홍위병보다 우위라고 하면서 진압을 시작했고, 상산하향 운동을 내걸면서 홍위병들을 모두 농촌으로 내쫓습니다. 그들이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건 70년대 후반이었죠. 76년, 마오가 죽고 화 궈펑과 덩 샤오핑이 4인방을 축출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홍위병들의 성과는 모두 부정당했고, 지금도 그들은 시골에 은둔하면서 자기가 홍위병이라는 말도 하지 못 한다고 합니다. 4. 문제점 이 때 숙청된 사람은 대학교수, 학자, 의사 등의 지식인과 음악, 무술, 전통문화 등을 연구하던 예술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의사가 부족해서 환자들이 죽어 나갔고 대학 교수가 없어져서 이 시기 중국의 교육 인프라는 철저하게 박살났습니다. 이건 후술하겠습니다. 심지어는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과학자들까지 반동 지식인으로 몰려 두들겨맞고 쫓겨났죠. 다수의 유적들이 과거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파괴되었고, 이 때 고구려, 발해의 유적도 제법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공장 노동자들이 홍위병들에게 제발 투쟁을 그만 두라며 파업을 했고, 마오도 "무투 말고 문투를 하라"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먹히지가 않았습니다. 이미 이들의 폭주는 마오라도 막기 힘들었던 거죠. 결국 마오는 대대적인 진압을 해 버립니다. 사실 이들의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습니다. 대약진 기간 동안 관료제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으니까요. 마오의 말도 그리 틀린 건 없었습니다."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라"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자" 그럼 뭐가 문제였을까요? 이 때 중국에서는 백지답안 사건이 발생합니다. 마오의 뜻을 따라서 노동하는 게 중요하지 공부가 뭐가 중요하냐, 이런 식이었죠. 문제는... 이걸 마오가 인정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서 백지답안은 일반화 되었고, 중국에서 대학생의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 줄 대학 교수 역시 그들이 숙청했으니... 이들은 분명 애국심을 가지고 일 했을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된 부패한 관료들을 없애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국의 제도 자체가 붕괴될 정도로 해 버립니다. 그저 자기를 반대하면 반동인 것이죠. 결정적으로, 이들은 문제의 가장 핵심이었던 마오를 공격하지 못 했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지도 못 했죠. 맹목적인 믿음과 신격화 때문이었습니다. 관료제는 그저 마오가 핑계를 돌린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마오는 그걸 이용해 정치적인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썼습니다. 그 자신들도 철저하게 이용당한 거죠. 백지답안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은 그것을 의심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미워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뭐가 문제인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게 동반되지 않는 믿음은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결과를 내게 됩니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 최대의 암흑기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오를 부정 못 하는 걸 보면 그의 신격화가 대단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역사는 믿으니까 아는 게 아니라, 아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게 뒤바뀌는 순간 그것은 역사가 아닌 종교가 됩니다. 출처 http://www.angelhalowiki.com/r1/wiki.php/%ED%99%8D%EC%9C%84%EB%B3%91#rfn2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