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다.
영재교육원도 다녔고 공부도 항상 잘했다.
엄마아빠는 늘 나에게 열심이셨다.
고등학교가 끝나면 항상 나는 아빠차를 타고 독서실에 갔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이 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는 것은 아주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곱게 자란 딸이었다.
아니 곱게 자랐다기에는 엄마한테 혼도 많이 났다.
손가락 물어뜯었다고 식칼 앞에서 싹싹 빌기도 하고
죽어도 학원 가서 죽으라는 말 듣고 아픈데 학원에 갔다가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학원 안 가고 스스로 공부하겠다고 했다가 그럴 바에는 공장에나 가버리라는 말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곱게 자란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았고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다른 직업을 하면서는 글을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면서 다른 직업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작가도, 역사 연구원도 엄마의 반대로 나는 접었다.
대신에 대학은 대학만큼은 서울로 가고 싶었다.
수능이 끝나고 엄마는 동생들을 가르치려면 네가 서울로 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식이 셋인 우리집에 무리라고 했다.
악을 쓰면서 울었지만 나는 결국 지방 교대에 입학했다.
엄마의 뜻이었다.
교대에서도 곧잘 공부를 했다.
대학생활 4년을 마치고 나는 임용에 한 번에 합격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다행히도 선생님은 내 적성에 맞았다.
운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내 말 듣기 잘하지 않았냐고만 하셨다.
나는 서울로 대학을 못 간 게 아직도 아쉽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것도 네가 배가 불러서 할 수 있는 소리라고 했다.
연애를 했다.
패스트푸드점 매니저였다. 한 달을 사귀고 헤어졌다.
부모님 반대였다.
딸도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C급이나 만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었다.
소개해 준 친구도 만나지 말라고 하셨다.
결국 남자에게 울면서 헤어지자고 했다.
나 때문에 우리 부모님께 심한 말을 듣는 그 사람한테 너무 미안해서.
지금도 엄마아빠는 내 결혼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에는 의사였는데 지금은 학교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신다.
엄마아빠는 예전에 힘들게 사셨다고 한다.
엄마는 전문직 여성이 부러웠다고 한다.
나는 이미 전문직 여성이 되었으니까 이제 힘들지 않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에는 관심이 없다.
내 꿈은 시골학교 선생님이고, 작은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부모가 될 것이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될 것이다.
아이들의 모습에 내 삶을 겹쳐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내 남자친구는 농산물 유통업에 종사하고 있다.
작은 회사지만 회사가 얼마 전 학교 급식과 계약을 맺었으니 평생 안정적인 수입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애인은 인간됨도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정말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다.
나는 가끔 내가 자기혐오와 애정결핍 등 정신병에 걸린 것 같거든.
이 남자를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분명 반대하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남자와 꼭 함께하고 싶다.
그럼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벌써 이십대 중반이고 평생 직장까지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내가 선택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정말 무섭다.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