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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영국 전쟁(살영전쟁 / 사츠에이 전쟁)
게시물ID : history_159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uphony
추천 : 4/4
조회수 : 232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5/27 00:04:12
크기변환_sakuzu12 (1).gif


1862년 9월 14일, 나마무기에서 상하이 상인조합 소속이었던 리차드슨을 포함한 영국인 4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나마무기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산킨코타이 기간을 채우고 사츠마로 복귀하던 사츠마번 다이묘의 섭정대리이자 부친인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에 반하여 반대편쪽으로부터 이 영국상인들이 행렬에 난입해 버린것이다. 이러한 영국인들의 '무례'에 빡돌아버린 사츠마번 사무라이(사츠마 사무라이는 일본에서도 가장 성질급하고 용맹하기로 유명하다)들이 이들을 베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사츠마 사무라이들은 영주의 존엄을 지킬수는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외교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난다. 당시 일본은 불평등조약을 통해 서구각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었고, 영국도 이의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대사는 이에 강력히 항의하고, 일본측에 배상을 요구했는데, 에도막부에 10만파운드, 사츠마 번에 2만 5000파운드를 뱉어낼 것, 그리고 추가적으로 리차드슨 일행 살해자의 신병인도를 요구하였다.
 에도막부는 순순히 이를 물어냈지만 사츠마번은 이 요구에 뻐팅겼는데, 이에 빡친 영국대사는 사츠마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하여 영국 동양함대의 일단을 소집하여 큐퍼제독을 함대의 사령관으로 한 사츠마 정벌함대를 편성하였다.

 사츠에이 전쟁의 막이 오른것이다.


800px-Bombing_of_Kagoshima_Map_-_1863.PNG

Satsuei-Sensou.gif
(△ 새로고침을 누르면 재생할 수 있습니다)

전투의 대략적인 경위는 다음과 같다.

페이즈 1 : 사츠마 번의 수도인 카고시마 연안에 영국 동양함대 출현

페이즈 2 : 카고시마에 기항해있던 기선 3척을 영국 동양함대가 나포

페이즈 3,4 : 영국함대의 갑작스런 기선나포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인 사츠마번 포대의 반격, 그리고 포격전의 개시

페이즈 5 : 사츠마번의 기선을 나포한 상태로 전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영국함대는 나포한 기선들을 귀중품을 수거한후 해상에서 소각

페이즈 6,7 : 영국함대가 뱃머리를 돌려 카고시마 만에서 이탈, 그리고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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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퍼제독 함대 전력 (아래 함선번호와 상기 GIF자료의 함선번호는 상호일치함)

1. HMS Euryalus(기함)
함종 : 프리깃
승무원 수 : 54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5문
- 40파운드 암스트롱포 8문
- 기타 포 38문

2. HMS Pearl
함종 : 코르벳
승무원 수 : 400
무장
- 68파운드 포 1문
- 10인치 포 20문

3. HMS Coquette
함종 : 포함
승무원 수 : 90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1문
- 20파운드 포 2문

4. HMS Argus
함종 : 슬루프
승무원 수 : 175
무장
- 110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4문

5. HMS Perseus
함종 : 슬루프
승무원 수 : 175
무장
- 40파운드 암스트롱포 5문
- 32파운드 포 12문

6. HMS Racehorse
함종 : 포함
승무원 수 : 90
무장
- 110 파운드 암스트롱포 1문
- 10인치 포 1문
- 32파운드 포 1문
- 20파운드 포 2문

7. HMS Havock
함종 : 건보트
승무원 수 : 37
무장
- 68파운드 포 2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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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번 포대 포문 수 : 8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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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 피해규모

영국 : 기함 대파, 2척 중파, 기함 함장 및 부함장 전사, 수병 11명 전사, 부상자 50명
사츠마 : 기선 3척 상실, 포대 대포 8문 파괴, 전투원 1명 부상, 비전투원 8명 사망, 카고시마 도심지가 상당한 피해를 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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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자체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종결되었지만, 곧 영국 대사관에서 막부의 중재하에 양측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서 긴장관계는 막을 내리게 된다. 사츠마번은 영국의 25,000파운드 배상 요구를 승인하였고 지불하였지만, 사실 그 배상금은 막부로부터 차입한 금액이었으며, 이 사건 이후 불과 5년 후에 막부가 멸망함에 따라 결국 차입금을 상환하지도 않게 된다. 또한 영국측도 살해자 신병인도건에 대한 요구는 실질적으로 철회하여 양국간 평화협정은 상호간 만족할만한 선에서 타결되게 된다.

전투는 1863년 8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고작 3일간 치러졌지만, 이 짧은 전투는 전투의 기간에 비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사츠마는 당시 존황양이, 즉 서구'오랑캐'들을 배척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으나 이 전쟁으로 인하여 서구의 무력을 실감하고 양이노선에서 개화노선으로 돌아서게 된다. 영국 또한 대일본정책에서 종래의 막부지지노선에서 서남웅번지지노선으로 돌아서게 되고, 이러한 배경하에 훗날 토막파 군대는 영국으로부터 신식무기를 수급하게 된다.

당시 세계최강국이었던 대영제국의 함대가 극동의 작은 섬나라의 일개 지방정부를 상대로 빌빌거리다 퇴각한 사실이 알려지자, 서구사회는 신선한 충격을 받게된다.
미국의 유력일간지인 뉴욕타임스는 전쟁종결 후 작성된 몇몇 기사에서 일본이 비록 큰 피해를 입긴했지만, 일본은 의외로 서구의 군사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따라서 군사적인 실력은 무시할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살영전쟁에 관해 기고한 당시 뉴욕타임스의 사설(1863년) : http://www.nytimes.com/1863/10/04/news/the-progress-of-the-japanese-w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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