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핀란드 노키아와 한국 재벌
입력 : 2012.01.09 23:30
김기천 논설위원
'핀란드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 핀란드가 고성장 벤처기업을 키워내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핀란드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와 대학경쟁력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는 세계 3위다. 국가경쟁력을 비롯해 혁신과 관련된 각종 국제 비교에서 핀란드는 항상 세계 최상위권이다.
그런데도 핀란드는 선진국 중에서 창업활동이 가장 부진한 나라다. 정부가 신생기업 지원 정책을 꾸준히 펴왔지만 성과는 없었다. 우수한 인력과 기술, 혁신적인 제도·시스템에도 불구하고 벤처 창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건 핀란드의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최근 1~2년 동안 핀란드의 벤처 생태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정보통신 분야 창업이 크게 늘었고, 스마트폰 게임 시장을 휩쓸고 있는 '앵그리버드' 개발업체인 로비오 같은 성공사례도 나왔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자들도 유망기업을 발굴하기 위해 핀란드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핀란드의 창업 붐은 세계 휴대폰 업계의 제왕(帝王)이었던 노키아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노키아는 핀란드 수출의 25%, 법인세 세수(稅收)의 22%를 차지하며 핀란드 경제를 떠받쳐왔던 기업이다. "핀란드는 노키아란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노키아가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우수 인재·엔지니어를 싹쓸이하고, 국가 경제가 온통 노키아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신생기업은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다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밀려나 곤두박질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구조조정으로 노키아를 떠난 엔지니어들이 수십개 기업을 세웠고, 노키아 입사만 꿈꾸던 젊은 인재들도 창업으로 돌아섰다. 핀란드 경제를 뒤덮었던 노키아의 그늘이 걷히면서 잠자고 있던 기업가 정신이 깨어난 것이다. 그로 인해 핀란드 경제가 노키아 충격을 딛고 일어나 예전보다 훨씬 강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움트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노키아의 손실이 핀란드의 이익이 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의 재벌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재벌의 손실이 한국의 이익"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불확실성과 위험부담이 크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재벌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순익을 올리며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는데 대다수 중소기업과 서민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기업들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성적을 내고 있다는 사실보다 오너 경영의 독단(獨斷)과 편법 상속, 문어발 확장, 납품 단가 후려치기 같은 재벌경제의 그늘이 더 부각되고 있다.
최근 여당인 한나라당이 대기업 규제를 주장하고 나서고, 야당은 한 술 더 떠 재벌 해체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는 '재벌 때리기'의 고질병일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에게 이런 주장이 먹혀드는 근본원인은 재벌의 이익과 한국의 이익이 서로 어긋나 있는 데 있다.
재벌은 스스로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소유와 경영의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함께 중소 협력업체들과의 동반성장, 비정규직 처우 개선, 청년실업 해소, 벤처 생태계 육성, 빈부격차·양극화 완화 같은 현안에 대기업이 적극 기여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한국경제와 대기업의 이익이 서로 충돌하고 모두 루저(loser)가 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1/09/20120109019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