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 1985년
1980년 하반기부터 1981년까지 서울대 좌익 운동권 내부에서 투쟁 노선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난다.
이 논쟁의 한 축은 ‘무림’ 계열로 불리는 세력으로 지금(1980년 초)과 같이 극단적인 투쟁은 정부에 대한 탄압을 유발하고 혁명 역량을 소모하므로 투쟁을 지양하고 대중 역량을 확보한 다음, 적절한 투쟁의 시기를 도모하자는 단계적 투쟁론(투쟁 지양론)이었고 다른 한 축은 ‘학림’ 계열로써 무림의 주장 은 투쟁을 포기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가장 조직적인 운동 세력인 학생들이 더욱 강한 투쟁을 통하여 당시 정부의 문제점을 대중들에게 폭로하고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통해 정권의 재집권을 분쇄하자는 주장이었다.(그 당시 유명한 釜林 사건은 부산의 학림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들은 이 노선 분쟁으로 결국 갈라지게 된다. 이러한 논쟁은 1982 년에 다시 일어나는데, 무림 계열의 노선을 계승한 ’야비(야학비판)’ 와 학림 계열의 노선을 계승한 ’전망(학생운동의 전망)’간의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무림 계열은 ‘야학 비판’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현재는 혁명 전위 세력이 없으므로, 이를 만들기 위해 각각의 운동 주체들은 단계적 발전을 통해 정치적 혁명을 위한 주도력과 역량을 이루어 내야 한다’며, ‘학생 운동 세력은 지나친 정치 활동보다는 다른 세력의 정치 운동을 돕는 매개체 역할과 동시에 전위 세력의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학림 세력은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학생운동 세력은 현대 사회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전위 세력이며, 정부에 대해 끊임없는 폭로와 투쟁을 통해 전면 대응에 나서야 한다’며 ‘학생운동세력이 전면 활동을 통해 공간을 확보해야 다른 운동 세력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 이를 위한 투쟁 방식을 가두시위를 통한 정치 활동으로 보았다.
이들의 논쟁은 학생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방법이 아닌, 적극적 정치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는 저의를 내포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일어난 논쟁은 1982 년 하반기, 소위 MT-MC 논쟁으로 불리는 ‘깃발-反 깃발’ 논쟁이다. 이 논쟁은 무림 계열의 ‘민주화투쟁위원회(MT)’에서 당시 학생 운동의 주류 세력(MC: Main Current)의 투쟁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이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면서 시작된 논쟁으로 주로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다음에는 1985년 학생운동세력 분파의 분수령이 된 CㆍNㆍP 논쟁, 일명 사회구성체 논쟁, 또는 사회변혁 논쟁으로써 그 이전까지의 논쟁이 학생 지도 세력 간의 헤게모니 논쟁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 때는 사회 전반에 대한 접근 방식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인한 논쟁이었다.
이 때 소위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이라고 불리던 ‘민주화청년운동연합(民靑聯)’의 내부에서 ‘시민민주혁명론(CDR)’계열과 ‘민족민주혁명론(NDR)’계열, 그리고, ‘민중민주혁명론(PDR)’로 나뉜 입장으로 나중에 CDR 은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小시민적 사회관과 낭만적 운동관이라고 비판 받음과 동시에 사회혁명가의 입장에서 지양해야 할 자세로 인식되어 소멸되고, 결국 학생 운동의 갈래가 ‘민족민주혁명론(NDR)’ 과 ‘민중민주혁명론(PDR)’,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변 되는 계기를 가져온다.
이때 사라진 ‘시민민주혁명론(CDR)’계열이 소위 경실련 등의 온건파 시민단체들이 추구하는 성향이다. 이에 대해 성공회大 曺喜聯(조희연) 교수는 ‘이 논쟁은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사회의 변혁운동단계는 무엇이며, 무엇을 대립물로 하는가’ 라는 것을 주제로 한다고 보았다. 즉, 기존에는 주도 세력 간의 선도 세력의 노선과 활동에 대한 것 위주였으나 이 때부터 본격적인 사회 구성원들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 혁명에 대한 구상을 하는 시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5년 ~ 1989년
1985년 CNP 논쟁과 三民鬪(민족통일-민주쟁취-민족해방 투쟁위원회)의 검거 이후 학생운동세력은 두 가지 계열로 완전히 갈라지는데, 바로 1986년 反美자주화反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自民鬪)와 反제反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民民鬪)라는 운동노선의 등장과 상호 대립이다.
이들 중 自民鬪 계열이 바로 ‘민족민주혁명론(NDR)’을 계승한, 주체사상파의 활동 조직이다.
이들의 투쟁 노선은 북한의 對南 혁명노선과 동일한 것으로 북한노동당 제5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노선(NLPDR)’을 지도 이념으로 삼고, 북한과의 연계는 물론, 학생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후 自民鬪 계열은 전국 反외세反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등을 결성, 조직 확대 과정을 거쳐 1987년 8월 19일 사상 최대 규모의 학생 조직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를 결성,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全大協 결성 이후 이들은 북한의 對南 혁명 노선으로 “자주ㆍ민주ㆍ통일”을 채택하고, 북한과의 연계 및 親北 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체 사상파의 효시는 1986년 3월 결성된 구국학생연맹(求學聯)이다. 이 계파는 1985년 일부에서 제기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해방노선, 즉, AIPDR 에서 시작됐으며, 김영환이 이를 본격적으로 해석하여 강철 서신-한 노동자가 청년에게-라는 팜플렛을 통해 전파하게 된다)
한 편, 民民鬪 계열은 레닌 노선을 수용하여 전면적이고 극단적인 투쟁을 전개하며 북한과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民民鬪 계열은 모든 학생들의 이념학습과 전면적 투쟁을 주장했으나, 행동보다는 말만 무성한데다 조직 운영에서의 권위주의적인 태도, 대중과 동떨어진 사회인식, 지도자로써의 자질 부족 등으로 인하여 내부적 혼란을 겪게 된다.
결국, 民民鬪 계열은 또 다시 내부 분파를 거쳐 CA파, CPC파, CPA 파 등으로 갈라졌다.
이 중에서 CA 파는 1987 년 대선과 1988 년 총선을 거치면서 다시 다수파와 소수파로 갈라졌고, 또 다수파 내에서 A 그룹과 B 그룹으로 갈라졌으며, 이 중 A그룹은 NL 非주사파 계열, B그룹은 反제국주의 PD 계열로 변하였다. 한편, CPC, CPA 파는 反파쇼PD 계열로 분파되는 등 그 이후에도 수 많은 내분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때 주체사상파인 自民鬪 계열이 그 이전까지 운동권 세력을 주도하던 民民鬪 계열을 능가하게 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다.
民民鬪 계열은 운동권 지도자의 능력이라는 것을 주로 언변, 이론적인 박식함, 노선의 과격함에 중점을 둠으로 인하여 그 언변과 지식에 의해 지도자가 바뀌는 경우가 많았으며, 선후배 간의 권위주의적 태도로 인하여 내부적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도덕적 기준에서도 점점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반면 自民鬪 계열은 운동권의 투쟁이라는 것은 결국 대중과 함께 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론무장은 지도자들을 위주로 하고 일반 대중에게는 간단명료한 자료집 등의 제공을 통해 운동권의 저변을 확대하며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지도자의 자질과 인격, 도덕적 결백성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거의 대부분 운동권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즉, 가족 중심 사회,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선시되는 한국적 정서에 맞춘 이념과 노선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들의 활동이 이전과 확실히 구분되는 점은 과거의 재야 활동이 민주화 운동을 목표로 했던 것에 반해, 80 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대부분이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위한 反체제활동이었다는 것과 북한과의 연계를 통한 공산주의 혁명ㆍ통일을 지향하는 활동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이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 활동이 공개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나타나고, 이념적인 부분에서도 점점 더 체계화를 이루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