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쓰신 김민섭 선생님과 그 글을 읽고 활용하는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글을 씁니다.
▶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었으나,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
김민섭 선생님
최근 매체들에서 얘기하는 대로라면,
김 선생님을 압박하고 공격하여 선생님을 학교에서 떠나게 만든 선배들 중 하나에 속하는 배현자입니다.
김민섭 선생님에게는 제가 선배임에도 김민섭 선생을 ‘선생님’이라고 호칭하고 존대어를 쓰는 것이
김민섭 선생님은 낯설지 않을 것이기에 이 어조를 그대로 씁니다.
평소에도 전 김 선생님에게 ‘선생’을 붙였었고, 존대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님이 연구실에서 나가고 난 후, 「조선일보」 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났을 때
전 김 선생님에게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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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께
메일 내용
김민섭 선생님
오늘 김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어요.
연구실에서 나갔다는 소리를 듣고..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전화를 했을 때 연락이 닿지 않아 문자를 남겼는데도 소식이 없기에..
아직은 뭘 말하고 싶은 때가 아닌가보다.. 뭔가 말하고 싶은 때가 되면 연락을 주겠지..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사를 통해 김 선생님의 심경을 알게 되는군요.
우리가 그날 만났던 것이 학교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많은 얘기들이 단순히 '공격'으로 느껴졌다니 더더 안타까워요.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이 공간과 시간들을 함께 잘 가꾸어가보려고 했던 의도가
이렇게 오히려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내 마음과 진심이 무엇이었든,
김 선생님이 그것을 '공격'으로 느꼈다면, 내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또 다른 공격으로 느껴질까봐 지금은 말을 아껴두어야 할 듯합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메일을 쓰는 것은
그날 '언젠가 훗날 우리가 이런 시간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말을 다시 전달하고 싶어서입니다.
지금 이렇게 김 선생님이 이 공간을 떠나지만...
나는 김 선생님과 함께하면서 가진 좋은 시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함께 책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서로의 지향점을 알아가고,
또 배드민턴을 치면서, 산과 계곡에 함께 가면서.. 나누었던 즐거운 시간들..
선거가 끝나고 허탈함을 공감할 거 같았다면서 김 선생님이 전화했을 때 가졌던 그 유대감...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김 선생님이 소설을 쓰고자 하시던데... 좋은 소설을 쓰시길...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김 선생님 앞길이 순조롭고 평탄하길 바랄게요.
오랫동안 김 선생님 떠난 자리가 또 휑~하겠네요...
배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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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메일은 ‘읽지 않음’으로 나오는군요.
이 메일을 쓸 때만 해도, 현재 이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 모이기까지 동료들은 정말 수많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오늘의 유머>라는 곳에 글을 쓸 때 이미 김민섭 선생이라는 것을 감지하고, 동료들이 물었을 때 ‘아니다’라고 극구 부정을 했다고 해서, 쉽게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동료는 ‘그게 너라면 그만 쓰라’는 말을 했다지요. 그런데 나중에 오히려 은연중 ‘격려하는 줄 알았다’고 그것마저 그렇게 자기식대로 이해한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글이 퍼져나가면 우리가 속해있는 공간이 얼마나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염려가 됨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사실들에 대해 반박을 했을 경우, 동학인 김민섭 선생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면서 지새웠던 밤들을 김민섭 선생님은 알까요? 먼저 그런 글을 쓴다는 사실을 감지했던 동료들이, 저에게는 나중에서야 말을 했었습니다. 제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였지요. 우리 동료들은 그런 동료들이었어요. <오늘의 유머>라는 곳에 올린 글을 전 나중에 읽고, 곧바로 반박의 글을 쓰고도 싶었지만, 그랬을 때 인터넷이라는 공간의 속성상 이전투구의 모습으로 비쳐지면서 원치 않는 상황으로 비화되는 것이 염려도 되었고, 또 나중에 페이스북에는 강단에 섰던 일들을 주로 올리기에, 그렇게 그냥 묻혀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후 책을 냈고, 그것을 여러 매체에서 주목했습니다. 그때 동료들은 더는 모른 척할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어떤 곳인가를 사람들이 알아서 그것이 퍼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김민섭 선생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민섭 선생님은, 그날 그 자리에 모였을 때, 이 학교와 학과가 다른 어떤 곳보다 더 인간적이고 좋은 학문의 전당이라는 사실, 그래서 이곳이 폄하되거나 질타받는 상황이 되어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날 자리를 파하면서 저와 또 다른 동료의 목을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었습니다. 전 그날 그 말과 모습을 믿었고, 그럼 이후의 전개과정은 내가 염려하는 바와는 좀 더 다르게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그 전날 보였던 모습과 너무나 상이한 모습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실들만은 이제 바로잡겠거니...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이제 실명으로 자신을 밝혔으니, 익명으로 쓸 때 왜곡하고 과장했던 부분들을 바로잡고, 학교와 학과에서 있었던 사실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을 확산시키지 않았더라면... 이 공간과 구성원들을, 그렇게 비인간적인 공간과 파렴치한 인간들로 폄하하고 희화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위의 인터뷰 기사에서 비록 ‘동료를 쫓아낸 선배들’로 매도되었다고 해도 이런 글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김민섭 선생님의 출신 학교와 학과가 만천하에 공개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이곳과 이곳 구성원들을 파렴치하게 그려나가는 글을 계속해서 인터넷 다음의 <스토리펀딩>이라는 곳에 올리고 있더군요. 이렇게 대치되는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요?
그때 그 만남의 자리를 가지기까지도 정말 많은 번민의 시간이 뒤따랐듯이, 이 글을 쓰기까지 참 많이도 주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 그 어떤 글보다 힘이 듭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이 넘쳤지만, 그럼에도 김민섭 선생님이 쓰는 글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다는 반박의 글을, 그것도 공개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더 철저하게 사실들을 알아보아야 하는 과정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쉽사리 내가 알고 있는 사실만으로 ‘아니다’라고 말을 했을 때, 내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을 수 있고, 그러면 김민섭 선생님이 더 억울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요.
또 글을 써서 올릴 때, 에너지 소모가 클 것이기에, 그 부담감도 크게 작용을 했습니다. 이 일이 아니고도 집중해야 할 일이 많아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여력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곳곳에서 비난과 조롱 섞인 시선을 받으면서, 그리고 의혹에 찬 질문을 받으면서, 실상을 밝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가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아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데 망설이게 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김민섭 선생님이 공부한 이곳에 돌을 던지는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김민섭 선생님을 흠집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학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김 선생님에게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김 선생님을 의혹에 찬 눈길로 바라보지 않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왜곡된 사실이 근거가 되었을지언정, 한가닥이나마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지금보다 더 개선이 된다면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는, 김민섭 선생님의 글이 왜곡과 과장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밝혔을 때, 진실하게 글을 써서 자신들의 상황을 피력하는 수많은 다른 글마저 의혹의 눈초리를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때 생겨날 수 있는 또 다른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쓰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쓰지 않는 것은, 저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고,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이 상황을 외면한다면 두고두고 이것이 또 저 자신을 괴롭힐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김민섭 선생님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더는 이런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을 유포하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주목받고 있으니 그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더욱 미화해나가겠지만, 그것은 결국 언젠가 독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로 자신을 가르치고 함께 공부했던 교수님들과 동료들을 흠집내면서 이곳에서 공부할 수많은 후배들을 자괴감에 빠트리게 할 김민섭 선생님보다는, 이곳에 남아있는 동료와 교수님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민섭 선생님이 만들어낸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로 인해 부당한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면서도 오늘도 후학들을 훌륭하게 길러내기 위해 고심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동료들과 교수님들이 더는 뭇사람들의 의혹에 찬 눈길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지금까지 이곳 교수님들과 동료 시간강사들에게 수업을 들었고, 들어야 할 학생들을 위해서입니다.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을 머리 속에 담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을 가르치는 이들에게 의혹의 시선을 가지면서 학문의 진전이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셋째는,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지금보다 더 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왜곡된 사실들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아무리 대의명분이 훌륭하다고 해도, 어느 한 곳을 억울한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핍박받고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글들에 대해서 그것이 진실한 것인가를 되짚어보는 과정이 뒤따라야만 더 억울한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왜곡된 상황만이 부각될 때, 그래서 대학이 파렴치한 공간이 되어갈 때, 좁게는 인문학이, 넓게는 학문의 영역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로 한 이상, 제가 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것이 회자되는 현 상황을 보면서 느꼈던 지점들과 제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솔직하게 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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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의 글은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해서조차 그 일이 일어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쉽게 댈 수 없을 경우, 서로의 기억이 상충한다면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점을 다 감안하여 뒤로 미뤄둔다고 할지라도 김민섭 선생님이 하시는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는 근거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쓴 글에서 자신이 대학원 시절과 시간강사 시절에 열악한 환경에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가장 큰 전제로 삼는 두 가지 근거가 모두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강의를 하면서 받았다는 연봉, 또 하나는 대학원생 시절의 조교 근무 시간.
김민섭 선생님이 처음 <오늘의 유머>라는 공간에 글을 쓸 때 김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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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둘,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원,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원 곱하기 8달, 560만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수료때까지 꼬박 메꾼 학자금대출에서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과 공과금을 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고,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 후 전화기를 돌려 놓는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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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김 선생님은 시간강사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 한 달 세 전 80만원, 세 후 70만원, 그래서 연봉 560만원으로 책정하고 시작하는군요. 그리고 이것은 책으로 출간할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실명을 밝히면서 신문 지상에 인터뷰를 할 때는 금액을 조금 높여서 1,000만원 내외였다고 하셨더군요.
그런데 김민섭 선생님이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고서부터 받은 급여는, 주당 2강좌 8시간 강의를 하고, 월 세 전 200만원이 넘고, 세 후 190만원에서 1~2만이 빠지는 금액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1,500만원은 넘는군요. 게다가 김민섭 선생님이 시간강사를 하는 3년 동안 두 번 계절학기를 했으니 실 수령액 880만원 가량 되는군요.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지요. 이곳 학교는 시간강사들에게 건강보험은 들어주지 않지만, 고용보험을 들어주는데, 김민섭 선생님은 그것을 활용하여 고용보험에서 실직수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김민섭 선생님이 저에게 ‘고급 정보’라면서 알려주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매 학기 시간강사 특별 수당도 60만원씩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 이 외에도 더 수입이 있었다는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김민섭 선생님은 알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김민섭 선생님이 글쓰기 강의를 시작하고 학교에 있으면서 벌어들인 수입은 실 수령액으로 연 평균 2,00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이 수치들은 모두 증거를 분명하게 댈 수 있는 것들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지요. 이 중 강의 시수는 학교 학사포털에 들어가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강의편람에 나오는 것들이고, 이곳에 강의를 나오는 이에게 물어보면 시간당 강의료를 쉽게 알 수 있을 테니까 증명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강의료를 대폭 낮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변명은 하지 않으시리라 봅니다. 만일 그랬다면, 실명을 밝힌 이후에는 사실에 근접하게 말씀하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명을 밝히기 이전으로 비교하면 4배, 실명을 밝히고 난 이후 한 인터뷰와 비교해도 2배가 넘으니까요. 적어도 두 배가 넘는 금액을 1,000만원 ‘내외’라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이렇게 대폭 강의료를 낮추어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상황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어 맥도날드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지요. 그래서 선량한 뭇 사람들의 동정표를 받기 위함은 아니었는지요. 이에 화답하듯 김민섭 선생님의 글과 책을 띄우는 곳에서 ‘일주일에 이틀은 교수님, 사흘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었지요.
만일 김민섭 선생님이 자신이 느낀 곤궁함을 바탕으로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삶을 논픽션으로 다루고 싶었다면,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그보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시간강사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곳보다 더 형편없는 강의료를 책정하고, 교통비도 책정되어 있지 않은 대학들이 부지기수이니까요.
김민섭 선생님
강의료만 사실과 다른 것이 아니더군요. 대학원 시절, 전일제 조교로 근무했다고 여러 곳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런가요? 제가 알기로 김민섭 선생님이 조교로 근무할 때는 여러 조교가 파트를 나누어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민섭 선생님 근무 당시 조교들 스스로 작성한 <조교일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역시 김민섭 선생님이 쓴 글과는 다르더군요. 장학금 명목으로 수령한 금액 역시 달랐습니다. 김민섭 선생님의 글에서 조교 근무 시간은 부풀려졌고, 수령 금액은 축소되어 있더군요. 이것은 위에처럼 세세한 숫자 나열까지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수치들이 사실이 아닌 것이 걸렸는지, 팟캐스트 인터뷰에서는 글에 쓰인 수치들에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거기에서 예로 든 것은 위와 같은 사실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몇 가지 사실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8층 건물이라고 했는데, 5층까지만 있다 등.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진행자는 그런 정도는 별것 아닌 듯이 웃고 넘어갔지요. 그때 위 예시들을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것도 별게 아니라고 웃고 넘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 나르는 일을 하고 학과사무실을 오갔다는 연구소 위치를 7층이라는 높이에 배치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대학원생들에게 주어지는, 그래서 김민섭 선생님의 연구 공간이었던 합동연구실 위치가 2층이었고, 연구소도 2층이었으며, 학과 사무실은 3층인데요. 만일 익명성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적당히 1층 정도로 했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요?
또 학자금 대출로 어려웠다고 하는데, 정말로 학자금 대출만이었나요? 김민섭 선생님은 분명 시간강사를 하기도 이전 대학원생 시절에 집을 샀고, 준중형 승용차를 새차로 뽑아 몰고 다녔습니다. 김 선생님 스스로, 집에서 조금 대주고 나머지는 대출을 얻어서 샀는데, 집값이 올라 재테크를 한 셈이 되었다고 동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했으니까요. 그 동료들 중에는 집에서 학비를 대주기는커녕 집안을 돌보며 학업을 지속하는 동료도 있었습니다. 책에서 ‘학자금 대출을 갚고나면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문구를 보면서, 왜 집이 없는 것처럼 표현했을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기대고 싶지 않은 김민섭 선생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또 훌륭한 자세이기도 하지만, 서울에 리모델링한 5층 건물을 소유한 집안에서, 집에 들어오라는 부모님들의 권유가 있다고 누누이 얘기했다던 김민섭 선생님의 처지에서, 천몇백 원의 대출금 독촉 때문에 곤궁에 처했었다는 말들은, 그런 상황에서 저녁에 술을 마셨다는 말들은, 정말로 비빌 언덕이 없고, 그 돈이 없어서 절박한 사람들을 더욱 자괴감에 빠트릴 수 있는 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짚어가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만큼 김민섭 선생님의 글 속에는 사실과 다른 지점들, 그리고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이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을 만큼, 받은 것은 한결같이 축소되어 있고, 핍박당하거나 부당함을 당했다고 한 일들은 한결같이 부풀려져 있더군요.
이 사실들을 짚는 것은, 대학원생의 생활상과 시간강사의 처우가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김민섭 선생님의 글에서 자신이 처해있었다고 밝힌 사실들과 실상은 너무나 다르게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짚고자 한 것입니다.
동료들도 다들 어렵게 공부합니다. 대학원생 시절, 그리고 시간강사를 하면서, 생활하기 힘들어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고, 부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부터도 그러했으니까요. 오히려 김민섭 선생님은 학부 때는 집에서 학비를 보내주어서 공부를 했다지만, 전 학부 때부터 고학을 했습니다. 그런 저조차도 김민섭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공감하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너무나 많은 왜곡과 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15쪽)면, 사실에 근접하게 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신이 공부한 모교와 학과를 흠집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김민섭 선생님이 공부했던 시절에 비해서 지금 현재는 어떤 상황으로 변해 있는가 정도는 서술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민섭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기 이전 학기에 이미, 저희 학과에 전액 장학금으로 들어와 있는 대학원생이 있었고, 또 이번 학기에도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원생들이 진입했으니까요. 이런 사실은 몰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몰랐다면, 적어도 알아보려는 노력은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민섭 선생님을 아는 누군가 그러더군요. ‘차라리 소설을 쓰지’ 라구요.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열악함을 알리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 듯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상황을 보며 워싱턴포스트지에서 ‘지미의 세계’로 기사를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가 취소된 기자의 일이 떠올랐다고도 하더군요.
▶ 어떤 ‘부분’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하고, 그것에 혹 불만이 있더라도, ‘전체’를 훼손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민섭 선생님의 글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면,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도 써져 있습니다. ‘뼈까지 보일 정도로 다쳤는데,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것’처럼 묘사된 일이 그런 것의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2012년 초에서 2014년 여름 정도까지 연구실에 다시 나가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한 달 가까이 김민섭 선생님을 못 본 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고, 뼈까지 보일 정도로 다쳤다면 피가 흐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로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보았음에도 모른 척할 동료와 선생님들이 아니기에,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그렇게 심하게 다쳤던 사실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더군요. 심지어, 그때 곁에 있었다던 동료 한 명도 어느 때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다친 사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은 몰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상황도 김민섭 선생님이 장난치다가 다쳤고, 그래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길 본인이 원했다는 말도 했구요. 다른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 후에 김민섭 선생님이 한 말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군요. 누구의 말이 사실인 걸까요. 전 솔직히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보아온 바로는, 앞서 말했듯 그렇게 많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김민섭 선생님의 말보다 다른 동료들의 말에 더 신뢰가 갑니다.
누구나 자신이 생활하는 곳에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받은 것들은 깡그리 잊고, 자신이 당했다고 생각한 부분만 확대하여 만방에 토로한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겠는지요.
심지어, <잡일 돕는 아이, 대학원생 조교>라는 글에서는 길 잃어버리고 제자를 불러 이동한 뒤, 함께 밥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권하지 않았다고 마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것처럼 묘사를 할 때, 그분들이 제자들을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는 생각이 나질 않던가요? 교수님들께 받은 것들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던가요? 그 상황이 제자를 데려가겠다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던가요? 그 당장에 물질적 보답이 주어져야만 ‘받은 것’일까요.
‘잡일 돕는 아이’라고 말했다는 그분이 설사 그때 그런 언급을 하셨다고 해도,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는 분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았나요. 최소한 10년 넘게 보아온 선생님들이라면, 최소한 선생님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어떤 보직에 올라도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낮추어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모를 수 있었을까요. 평소 그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닌가요. 제가 볼 때,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상대를 얕잡아보고 그래서 비하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었다고 하니, 되묻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모욕감이 들었다면, 김민섭 선생님 마음속에 ‘잡일 돕는 아이’를 얕잡아 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요. 그때 당시에는 적어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해도,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느꼈다면, 그래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을 쓰는 시점이라면, 그때 그런 말을 들으며 ‘잡일 돕는 아이’를 비하하는 듯이 받아들여졌던 자신의 마음을 성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때 비로소 ‘잡일 돕는 아이’의 일이 신성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런 일을 해도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사회가 되는 것이며, 너도나도 그런 일을 회피하려는 분위기가 일신될 수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인문학을 하는 이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는지요.
제가 지금까지 마음으로 신뢰하며, 이분들 곁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한없이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교수님들이 비인간적인 분들인 것처럼 묘사되고, 또 그분들을 향한 질타의 목소리가 댓글 등을 통해 보일 때,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묵과하는 것이 제자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보아온 우리 학과의 교수님들은 한분 한분 각기 성향은 다르지만, 그 면면에서 정말 본받고 싶은 면모들이 많은 분들이었습니다. 연구자로서 학문적으로도 게으름이 없지만, 스승으로서 제자를 보살피고 챙기는 부분에서도 정이 넘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제자들만 챙기는 좁은 시야가 아니라 제자를 아끼면서도 공정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하신 선생님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전공분야의 제자가 아닐지라도 제자가 필요로 할 때 아낌없는 조언과 가르침을 베풀던 분들이었습니다.
김민섭 선생님도 그 은혜와 배려 속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민섭 선생님은 대학원 과정을 마치기도 전 어학당 강의를 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 어학당 강의를 한 것도, 그 어학당 강의를 하기 위해 땄다는 자격증도, 제자들을 조금이라도 보살피기 위한 교수님들의 배려였다는 사실을 설마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니신지요.
그분들은 학교에서 임금 동결을 하고자 할 때, 교수들의 임금은 동결해도 시간강사들의 급여는 인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던 분들입니다. 이런 사실까지는 모른다고 해도, 박사학위가 없는 제자들에게 강의를 배당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는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글쓰기 시간강사들을 공개채용하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과 교수님들이 여러 가지로 적격인 강사들을 채용하는 데 애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들을 갖추어 학위가 없는 제자들에게 강의가 돌아가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당장 그 제도를 시행한 것도 아니고 몇 년에 걸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안내를 하여 준비하도록 했지요. 물론 그런 교수님들의 배려가 짐이 되지 않도록 저희 내부에서 강의를 맡게 된 시간강사들도 부단한 노력을 했지요. 그래서 어느 과목보다도 강의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맡는 과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게 준 믿음을 배신하지 않으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민섭 선생님이 책을 낸 후, 다음의 <스토리펀딩>이라는 곳에서 쓰는 글들 속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당혹스러웠습니다. 연구비로 치킨을 먹은 일을 언급하는 글에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제가 김민섭 선생님이 쓰신 글만 보아도 학과장 선생님의 발언은 상대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한 상황까지도 자신의 입장에서만 해석하여 상대를 폄하하는 식의 글을 쓰더군요. 또 우리 학과 교수님은 아니었지만, 재난이 있던 후 가진 모임 자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면서 전달 받은 이야기만으로 그분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희화화하는 글을 보았을 때, 그 모임에 참여했었던 저는 놀랍기마저 했습니다. 대학원의 동료들에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성명을 내자고 제의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다른 동료의 말을 통해 들었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은 것도 ‘분노하는 것도 눈치를 보는 것’으로 뭉뚱그려져 있더군요. 하지만 그때 제게 그 말을 전해준 동료가 김민섭 선생님의 견해에 찬성하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연구실에 있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또다른 폭력’으로 전개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우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이해 없이 동료들을 ‘비겁한 이들’로 읽혀지게 만드는 글을 쓰셨더군요. 이런 글들이 오히려 김민섭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시는지요.
▶ 조금만 더 다른 이를 존중하는 모습을 가졌더라면...
김민섭 선생님이 강단에 서서 느낀 점들을 풀어내면서 ‘교학상장’을 강조한 글들 속에서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그동안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더군요. 그런데 간혹 그 글들 속에서도 조금만 더 자기가 아닌 타인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 있더군요. 예를 든다면, 과제를 많이 내는 선생님들이 마치 선생은 ‘하나의 수업만 하면 되기 때문에 여러 과목을 듣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는 듯이 서술한 대목 같은 부분이 그런 부분이었습니다. 하나의 과제를 냈을 때 그것을 가르치는 과목의 선생님은 몇 부의 과제를 검토해야 하는지는 간과한 듯합니다. 특히 우리 글쓰기 과목의 경우 단순히 읽고 점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첨삭하고 강평해야 하는 작업이 뒤따르기에 1000자 가량 쓰는 하나의 과제를 더 냈을 경우, 적어도 30명~40명씩 되는 두 분반의 것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과제를 검토해도, 꼬박 20~24시간의 절대적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떠오르지 않던가요. 그것을 감수하면서 한번이라도 더 써보게 하고 더 강평을 해주기 위해서 과제를 내고 그것을 검토하느라 밤을 새는 선생님들의 노고는 보이지 않던가요.
수업 시간에 쉬는 시간을 꼬박꼬박 지키는 대목에 대해 서술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집중도를 따지며 선생님의 방식대로 하는 것이 좋은 것임을 서술하는 것은 좋았지만, 수업 시간을 넘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자기 도취에 빠진 것을 열정으로 미화’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게 만드는 지점들은 아쉬웠습니다. 자신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하는 선생님들을 지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강의실 간의 이동 시간과 휴식 시간, 혹은 점심 시간을 배려하기 위해서 중간 휴식 시간을 앞뒤로 활용하고 조금 일찍 끝내는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과제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는 방식에서도 다들 생각이 다르기도 하지요. 자세하게 풀어서 조목조목 가르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들이 있는가 하면, 학생 스스로 깨닫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말을 아끼는 선생님들이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학생들을 만나다보면 어떤 학생은 전자의 방식이, 어떤 학생은 후자의 방식이 더욱 적절하기도 하지요. 또 같은 학생이라도 상황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이것들을 온전히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방식대로 접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식이겠지요.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이 그러한 지점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생들도 사람인지라, 그것이 마음만큼 수행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조금 어긋났다고 해서 그 선생님이 노력을 게을리하는 선생이고, 그래서 그 선생 전체를 ‘나쁜 선생’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판단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배려하고 또 그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김민섭 선생님의 자세는 본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김민섭 선생님의 방식이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을 배려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하는 것이 어땠을까요. 김민섭 선생님이 자신의 방식만이 최고이고 최선인 것처럼 서술하기 전에, 학생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 각기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대로 최선의 지점을 생각하면서 학생들과 만난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조금은 서술을 달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김민섭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여러 부분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가 아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이것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를 되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저 역시 부단히 돌아보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 김민섭 선생님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콘텐츠를 활용하면서, 이곳 구성원들을 폄하하는 글들을 보면서 저를 반성했습니다.
인터넷에 가끔 억울한 사연이 올라오고, 그것에 네티즌이 열광해서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했다가 이후 더 억울한 대상을 만들어낸 일들이 간혹 있었지요. 그래서 요즘에는 상대편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는 움직임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일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억울함을 당한 사람의 말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전후 사정 파악 없이 일방적인 마녀사냥식의 여론몰이가 옳지 않다는 자성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언급하는 최근 출판사 관계자와, 기자, 그리고 책을 소개하는 이들의 글을 보면서, 이분들의 일방적인 여론몰이와 마녀사냥 식의 거침없는 상대 비난에 전 놀랍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현상을 파악하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상대편의 입장을 들어보려는 단 한 번의 시도조차 없이, 이렇게 무모해도 되는 것일까, 적어도 책을 출판하고, 또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는, 지식과 상식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이들이라면 일반 독자나 네티즌보다 더 신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홍선애, 김성신의 북톡카톡>이라는 글로 스포츠경향 2월 2일자에 올라온 기사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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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애: 책을 읽다가 느낀 건데, 시간강사도 선생님이잖아요? 그것도 한 분야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해서 박사학위까지 있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이건 참혹하다고 해야 하나, 어이없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가 막히더라고요.
성신: 연봉 560만원의 삶이었다고 하더군.
선애: 그래서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죠.
성신: 처자식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었으니까 뭐든 해야 했겠지. 그것도 저자의 남다른 면이라고 나는 생각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고 한 거잖아. 그 어떤 허위나 자기기만도 없이 말이야.
<중략>
성신: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이 책이 나오자 같은 학교 선배와 동료들이 저자에게 찾아 왔다고 하지? 찾아와서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느냐? 너 때문에 학교 망신이다.’ 뭐 이딴 이야기나 했다더군.
선애: 쯧! 격려는 못해줄망정… 비겁하네요.
성신: 맞아! 그런 비겁이 쌓여 불합리의 영원한 미궁을 만드는 것이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들이 바로 이런 놈들이라고 생각해. 뭐가 정의고 불의인지, 뭐가 합리고 불합리인지, 다 구분할 줄 아는 인간들이, 정의로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용기를 부정하고 뭉개려고 드는 것. 그 논리를 조금만 확대하면 식민지 시대에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반역자들과 똑같아진다는 생각은 안 해보나?
선애: 그런 생각 안 해봤다면 무식한 거고, 생각해봤다면 나쁜 거고, 그 둘 중 하나네요.
성신: 아무튼 참 큰 걱정이야. 당장의 이윤추구에 눈이 멀어서 꽃 같은 청년들을 모두 이렇게 망가져 가면, 대체 나라에 미래가 있느냔 말이야! 우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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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김성신님은 ‘연봉 560만원의 삶’을 강조하시는군요. 그리고 홍선애님은 그렇게 열악한 환경의 삶을 폭로한 이를 격려는 못 해줄망정 비겁하다고 선배들을 몰아부칩니다. 김성신님은 거기에 ‘식민지 시대에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반역자들과 똑같다’고 쐐기를 박는군요.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 죄로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동료이자 선배 네 명은 그렇게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반역자”와 같은 처지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서 얘기한 연봉 정도는 조금만 알려는 생각을 했다면,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았다면 얼마든지 쉽게 알 수 있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한 사람의 말만을 진실로 받아들여 왜곡된 수치를 그렇게 거침없이 부각하여 대중들이 실제인 것처럼 믿게 하고, ‘누군가를 거침없이 비난’하는 데에는 그렇게 과감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습니다.
책을 출판했다는 관계자는 우리 동료들을 향해 “문학을 가르치신다는 분들의 문해력이 그 정도라니” 이렇게 비난하더군요.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현상 너머를 사유할 줄 아는 게 진정한 인문학”이라고. 전 이 글을 쓰신 출판사 관계자분께 감히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말만을 듣고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동료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뭔가 문제를 제기했다면 왜 그랬을까를 되짚어서 생각해볼 수는 없었겠느냐고. 김민섭 선생님이 앞서 서술한 사실들을 저렇게 왜곡하여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책을 ‘소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묶어서 책으로 출판하고 싶었겠느냐고.
그리고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이 책에 묘사된 학교의 학과가 이 실상대로라면 이 학교의 학과에 입학하고 싶겠습니까?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어떠할까요? 진솔하게 답해보세요. 만일 ‘아니요’라는 답이 나온다면 우리 동료들이 염려한 지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 묘사된 실상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동료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을까요.
또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제도권 대학의 문제를 쇄신하고 싶은 대의를 위해서 실제와 다른 사실들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하나의 대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이미 학교와 학과가 밝혀진 뒤에, 일련의 기사를 쓰는 기자분들에게도 묻고 싶었습니다. 익명성을 지켜주어야 할 때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다 밝혀졌는데, 해당 학교의 학과에 진실 여부를 알아보려는 아무런 시도조차 없이 왜곡된 사실들을 그대로 옮겨쓰는 기사를 쓰는 것이 적합한지.
처음에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한편의 말만을 맹목적으로 믿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이분들의 잘못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이 부분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더군요. 여전히 신중하지 않은 그런 책임은 이분들에게도 있겠지만, 잘못을 모두 이들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사실, 이런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이 쓰여질 때, 실상을 알면서도 입다물고 있었던 나의 잘못도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김민섭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출신 대학을 실상보다 폄하하고 희화화시키는 일을 중단해 주세요. 김민섭 선생님은 자신의 출신 학교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말하지만, 김민섭 선생님의 글 안에 서술된 왜곡되고 과장된 사실들로 인해 이미 현실에서는 지탄과 비난 혹은 의혹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대학원생과 시간강사의 열악함을 개선하고 대학의 잘못된 제도를 고쳐나가고 싶은 대의를 수행하고 싶다면, 적어도 실상을 철저히 조사하는 노력을 수반하여 진실된 글로 접근하시길 부탁드립니다.
김민섭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께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어쩔 수 없이 김민섭 선생님의 글들 속에서 이루어진 거짓된 사실들을 밝혔지만, 여러분들을 만나면서는 진실된 모습으로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본 선생님의 모습까지 의심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우리 학과 학생들과 남아 있는 교수님 그리고 시간강사들에게 강의를 들을 학생들께 부탁드립니다.
혹여라도 김민섭 선생님의 글로 인해서 선생님들에게 불신 혹은 의혹의 마음을 품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선입견을 가지지도 말고, 실제로 여러분들이 듣고, 보고, 경험한 일들을 토대로 판단해 주십시오.
우리 학과 교수님들께 부탁드립니다.
김민섭 선생님의 일로 인해서 상처를 많이 받으셨겠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거리를 둔다거나 그러지는 말아주십시오. 물론 지금까지 보아온 선생님들은 또 묵묵히 제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실 거라는 걸 알지만 혹여나 하는 노파심에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혹시 이 글을 대학 운영 관계자분들이 보신다면 참고해주십시오.
이번 사건을 단순히 일회성의 해프닝으로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김민섭 선생님의 글이 일파만파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대학에서도 대학원생들과 시간강사들, 교수들을 포함하여 구성원의 처우에 관해 개선해나가야 할 점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해주십시오.
앞으로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든 학생들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인문학을 하는 일이 ‘돈’과 멀다고 해서, 그 잣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임을 상기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대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을 가장 중심에서 성찰하고 그 부조리와 불합리함을 깨뜨려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는 중심에 인문학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십시오.
일반 독자들께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글을 쓴 것은, 실제로 시간강사들의 처우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삼시세끼 밥 굶지 않고 몸 눕힐 자리가 있기에, 인문학을 공부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김민섭 선생님의 말대로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전 가정을 꾸리지 않았기에 그나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저희 학교의 시간강사들에 대한 처우는 현 대한민국 시간강사들에 대한 처우에서 본다면 평균 이상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저희 학교 시간강사들 역시 시간강사의 일만으로는 한 가정을 꾸리면서 연구활동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의 대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위에 서술한 김민섭 선생님의 경우는, 저희 학교 보통의 시간강사들보다 많은 금액을 수령한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부족함이 느껴졌기에 자신의 상황을 과장하면서까지 그런 부족함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희보다 처우가 열악한 시간강사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이 글로 인해 그런 사실들에까지 눈감지는 말아 주십시오.
김민섭 선생님의 글에서 가장 크게 동조할 수 있었던 말은, “아파도 되는 청춘은 없으니까 모두 아프지 않기를”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청춘’에게만 해당되는 말도 아닐 것입니다.
가장 큰 아픔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의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픔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 누가 됐든,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서 질타와 비난을 던져서 아프게 하는 일은 조금 더 신중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분명 김민섭 선생님도 그동안 아픔의 시간들을 겪었기에, 어떤 사실들을 과장하면서까지 아프다고 토로했을 것인데, 나 사는 일에 몰두하느라, 내 코 앞이 석자라고 그동안 무심했던 듯하여 여전히 마음이 쓰입니다. 그러니 혹여 제 글로 인해서 김민섭 선생님을 향해 비난과 질타의 목소리를 내고 싶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 한번만 더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끝내고 있는 이 시점에도, 전 여전히 이 글을 올리는 일에 대해 망설여집니다.
그리고 이 글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지, 이후의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을지, 그것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아닐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그런 저에 대한 배려도 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지만, 지적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 역시 제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겠기에, 제가 수용하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