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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당나라의 부병제와 병모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0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2
조회수 : 76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31 00:09:41

당나라의 부병제 하에서는 600개의 절충부에 60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수도를 방비하는 12위 6솔부는 각 위와 솔 아래 50개의 절충부를 두고 그곳에서 병력원을 공급 받았습니다. 국경 경비에는 245진(鎭) 332수(戍)가 있어 진장(鎭長)과 수주(戍主)가 절충부에서 교체 파견되는 병사인 방인(防人)을 통솔해 경비에 임했습니다.



- 당이 전국에 설치한 600여 개의 절충부 중 80%가 장안 중심의 경조부(京兆府)를 포함하는 관내도(關內道), 낙양 중심의 하남부(河南府)를 포함하는 하남도(河南道), 태원을 포함하는 하동도(河東道)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3도 중에서도 관내도에만 당나라 절충부의 44%가 배치되어있었습니다. 게다가 관내도의 경조부에만 전체 절충부의 20%에 해당하는 131개의 절충부가 배치되었습니다. 이에 비해 장강(양자강) 이남의 강남도나 영남도의 2도에 설치된 절충부는 전체의 17%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절충부 배치의 편차는 당이 명목상으로는 전국적인 지배체제를 표방했지만 그 안으로는 근거지의 물자와 인력에 상당수를 의존하는 영역적 지배국가의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나라뿐만이 아니라 전한 이후 왕조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절충부 병력 60만으로는 막대한 병력이 소요되는 외정(外征)을 행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이를 충원하기 위해 절충부가 있는 주이건 없는 주이건 상관없이 병사를 모병하여 충당했습니다. 이를 병모(兵募)라고 했습니다. 부병의 경우 식량은 자기부담이지만 병모의 경우 국가에서 식량을 제공하였습니다.

 


부병의 경우 수도 근번(勤番)의 임무에 중점을 두었기에 외국 원정시 당나라 야전군인 행군(行軍)의 주체는 부병보다는 병모가 되었습니다. 병모는 임시모행자(臨時募行者)라고도 불렸습니다. 당나라의 기미정책 파탄으로 인해 기존의 부병제와 진수제로는 외적을 막기가 어려워지자 당나라 군사력의 근간은 차츰 부병제에서 병모 등에 의존하는 형태로 옮겨져 나갔습니다.


 

당 초기의 군사력 : 60만명(부병) + a (병모, 건아)


 

여기서 더 덧붙여서 현종시대에 부병제는 파탄이 나고 장정건아제라는 모병제의 개념으로 당나라 군대가 이루어집니다. 780년에 당나라 전군은 77만 명으로 중앙의 금군이 17만이고 변경의 번진병사가 60만명이었습니다.


 

* 출처: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 세미나 수당오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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