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군의 전설 > .........-ㅂ-; 이탈리아군은 존재감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지난 두 번의 대전에서 최종적으로는 승전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진정한 사막의 여우, 지상 최강의 남자들!!! 이것이 이탈리아군의 진정한 퀄리티인 것입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이탈리아군은 왜 약한것인가? ................이탈리아군은 왜 약한가? .........그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맛좋은 음식을 먹는 멋쟁이들이 예쁜 여자와 잔다. 더이상의 행복은 있겠습니까? 인생은 즐기는 것입니다. -------------------------------------------------------------------------------------------- 이탈리아군의 전력 (근대 이후 이탈리아) * 좌측부터 발생년도와 일시, 상대방입니다. 1. 1866년 6월 상대는 오스트리아군 20만의 이탈리아군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인솔하는 오스트리아군 7만 5천명에게 대패 2. 1866년 7월 리사 섬 공략 첫번째 출격시는 해상에서 사령관의 장황한 연설만으로 종료. 두번째 출격때는 리사섬을 유람 주유하고 종료. 이후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정부와 국내 여론이 들끓어 비난을 받자 페르사노 사령관의 말은 「 아직 우리 함대는 전투를 할 수 없다! 」 3번째의 출격때에야 마지못해 전투를 시작, 리사 섬의 오스트리아군은 1개연대 반의 병력에 80문의 구식포가 전부여서 이탈리아군도 승리를 낙관하고 함대 28척에서 4시간동안 예비 포격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 포대의 반격에 페르사노 제독은 즉각 후퇴(...) 최종적으로 이탈리아군은 군함 32척을 동원하고 병력 26,000명을 상륙시키고 나서 리사섬을 간신히 점령. 3. 1866년 7월 리사 해전 상대인 오스트리아 함대의 함포는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이탈리아 함대는 함포의 성능, 장갑함의 수, 함대의 총 숫자와 배수량에서도 상대를 압도했지만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충각 전술에 의해 대패. 개전 직후 사령장관 페르사노 제독은 최신예 장갑함「레디탈리아」에서 바로 며칠전 간신히 함대에 편입해 훈련이 부족한「아폰다토레」로 갈아탐. 이 결과 단종진을 이루던 함열이 일시 정지되고 선두함은 그대로 전진......함열은 분리되었고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함대의 테게토프 제독은 횡진으로 목조함까지 포함해 전력 돌격. 오스트리아 함대는 목조함까지 싸웠지만 이탈리아의 다른 함대는 방관.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측의 침몰은 0, 사망자는 178명. 이탈리아측의 침몰은 3척, 사망자 약 800명. 함대의 양과 질, 모든 스펙에서 오스트리아를 웃돈 이탈리아 함대는 구시대 전술에 대참패. 함고로 충각 전술이 유효하게 기능한 것은 이 해전이 최후. 게다가「 장갑함을 가라앉히려면 충각돌격이 제일!!」이라는 잘못된 전훈을 40년간 세계에 각인시킴. -ㅂ-; 4. 1895년, 에티오피아 아도와의 싸움 기관총까지 장비했지만 왠지 원주민군에게 압도적 대패. 이 직전에 벌어진 안바·아라기의 전투에서도 이탈리아군이 참패한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음. 즉, 이탈리아는 원주민을 상대로 왠지 2 연패......orz 최종적으로는 원주민을 상대로60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대패였음. 5. 1896년 3월 에티오피아 정규군과의 전투. 에티오피아군 전사자 1000여명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5000명 근대에 들어 백인이 유색 인종에게 진 전쟁은 러일전쟁이 최초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처음. 6. 1917년 10 ~11월 카포레토 회전 ( 제 1차 세계대전 ) 오스트리아군과 사이에서 벌어진 카포레토 회전에서 이탈리아군은 대패해 3주간 150 km를 패주.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 2만 3천에 대해 이탈리아군은 사망자 1만, 부상자 2만, 포로 29만 3천, 탈주자 30만. 7. 1918년 10 ~11월사이. (역시 제 1차 대전) 오스트리아와의 휴전 교섭중 이탈리아군은 이 틈을 오려 피아브강을 넘어 공세로 나왔지만 오스트리아군에게 격퇴. 8. 1918년 11월 4일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역시 제 1차 대전) 「휴전 발효 후」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해 30만의 포로를 획득. 9. 1922년 에티오피아 침공전 항공기와 전차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침공전에도 불구하고 왠지 전투 초기에는 패배를 당해 전군이 포위되거나 전선이 붕괴되고 있다. 그때마다 이탈리아군을 구한것은 바로 독가스...........orz 이탈리아군은 핀치로 몰릴 때마다 독가스로 형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독가스 살포에 뒤잇는 독가스 살포로 어떻게든 억지로 승리. 참고로 에티오피아군의 장비는 오직 라이플 소총만으로 심지어 구식 머스킷도 현역(...) 기병은 창(...)이 무장이었다고 함. 또한 공무원을 급히 모아 편성한 군단에게조차 이탈리아군은 질뻔 한 것이다! 10.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 전쟁 두번째. 당초는 에티오피아군의 후퇴 전술도 있어 순조롭게 진격했지만 수도 아디스 아바바로부터 진군한 에티오피아군에 포위되어 덴베그이나 고개를 지키는 검은 셔츠 부대는 대부분의 야포와 전차를 버리고 패주, 마칼레의 보급 기지까지 떠밀려 이탈리아군의 우익은 완패, 좌익의 보급 기지까지 위협당해 총사령관인 바드리오 장군은 전멸의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탈리아군은 독가스를 사용해 형세를 역전시키고 이후 전투 종료까지 독가스를 계속 사용했다. 11. 1937년 3월 스페인 과달라하라 (스페인 내전) 마드리드를 목표로 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이 진군했지만 과달라하라의 전투에서 다수의 투항자를 내고 패주 12. 1940년 6월 제 2차 세계대전 개전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단지 히틀러의 전과를 질투한 뭇솔리니가 즉흥적(...)으로, 그야말로 무계획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거의 없었고 이탈리아 선적의 상선도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선전포고 2개월 내 외양에 나가있던 상선 대부분이 영국해군에 나포되어 버린다. 또 어떤 작전계획도 명확히 계획하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먼저 선전포고해놓고도 10일간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13. 1940년 6월 남프랑스 전역 독일군에게 유린되어 항복 직전인 프랑스에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불과 2개 사단도 안되는 프랑스군의 반격을 받고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프랑스의 항복이 좀 더 늦었다면 이 프랑스군 부대는 이탈리아령을 침공할 계획이었음. 14. 1940년 10월 그리스 전역 이탈리아는 21개 사단을 동원해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그리스군 13개 사단의 반격에 알바니아까지 후퇴해 붕괴 직전까지 몰린다. 그리스는 친 독일적인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연합국측에 가담. 15. 1940년 12월 이집트 전역 영국령 이집트를 침공한 이탈리아군 7개 사단은 영국군 2개 사단의 반격을 받고 패주. 13만명이 포로가 되고 이탈리아령인 키레나이카까지 잃는다. 이탈리아가 무계획적으로 저지른 발칸과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은 발칸을 제압했고 아프리카 군단을 편성해 파견한다. 하지만 이 발칸 제압을 위해 발바롯사 작전 발동은 1개월이나 늦어졌고 북아프리카 전선에도 7,000대의 트럭이 파견되었는데(당시 동부전선 전체에서 1만 4000대 밖에 없었음) 이것이 동부전선의 초기진격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16. 1940년 10월 타란토. 영국해군 지중해함대의 항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발진한 소드피쉬 21기가 타란토항의 이탈리아 주력함대를 공격. 전함 콩테 디 카부르는 대파착저, 전함 리토리오, 카이오.듀일리오 중파. 영국해군의 손해는 소드피쉬 2기. 17. 1941년 3월 마타판 해전. 마타판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수상함대가 격돌. 이탈리아 해군은 중순 3척을 상실했지만 영국해군의 손해는 전무. 18. 194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 25만의 이탈리아군 병력은 영국군 3만 5천과 전투,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19. 1942년 12월 동부전선 돈 강변에서 이탈리아 제 8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바로 모든 병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바로 전달인 11월달에 거의 비슷한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훨씬 장비가 열악했던 루마니아군은 며칠간을 선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20. 1991년 걸프전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 전폭기 이십여기가 출격, 왠지 첫 실전 공중급유에 이탈리아 공군의 토네이도는 절반이 실패하고 기지로 바로 귀환. 나머지 십여기는 이라크군 군사시설을 공격했지만 그중 몇기가 격추되어 파일럿은 포로가 되었다. < 이탈리아군의 일화 > 참호속에서의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의 롬멜 원수가 이탈리아군의 참호를 방문했다. 하지만.....그 때!!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탈리아군의 병사와 장교는 모두「오 성모 마리아님!」이라고 외치며 지면에 엎드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롬멜 원수는 이탈리아군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를 멈추고 반격명령을 내리시오. 귀관이 할 말은 그것 뿐입니다. 」 이탈리아군 포로의 취급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 장교에게 무장한 이탈리아군의 중대가 항복하기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리품을 수집하기 바쁜 영국 장교는 그들을 무시한채「시끄럽다!, 저쪽으로 꺼져!」라고 이탈리아 병사의 총을 빼앗아 던지면서 고함쳤다. 이탈리아군의 무장중대(...)는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아주는 영국군을 찾기 위해 다시 총을 주워 또 터벅터벅 걸어갔다. 고문을 받은 이탈리아군 이탈리아인의「약함」은 처세술의 하나이기도 하다. 제 2차 세계대전중, 유고 유격대의 포로가 된 독일군은 끝까지 완고하게 부대의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고문에도 굴하는 일 없이 꼿꼿해 세르비아인의 분노를 샀지만 이탈리아군은 곧바로 울며 용서를 빌었으므로 고문이 멈추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인은 지역마다 강약이 다른가? 제1차 대전시까지는 각 지방에서 징병한 장병들을 균등하게 각 부대에 할당하고 있었지만1차 대전 후에는 지역별 편성으로 군제가 바뀌었다. 그러나.........이탈리아군의 약함에 지역차이는 없었다. 우리가 졸리면 저쪽도 졸린 이탈리아군은 밤이 되면「 우리가 졸리면 상대방도 졸리다. 그러니까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다」라며 경계도 세우지 않고 취침했다. 그 결과....수많은 기습을 허용했다. 국가나 민족이라는 의식이 희박한 이탈리아군의 병사가 한밤중에 눈을 떴는데 소대장이 어디론가 나가려는 중이었다. 병사는 소대장에세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그러자 소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국가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나는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짐을 싸면서 그 대장은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 내가 목숨을 걸 때는 반한 여자를 지킬때 뿐이다!」 ........라고 웃는 얼굴로 상쾌하게 말하며 전선에서 이탈해갔다. 그러자 병사도..... 「 소대장님! 기다려 주십시오!」 ......뒤돌아본 소대장에게 부하는 이렇게 말했다. 「 저도 함께 갑니다!」라고. 이렇게 아침이 되어 다른 소대원이 눈을 뜨면 뜰수록 소대의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결국 영국군과 싸우기 전에 그 소대는 사라졌다. 정부는 바뀌어도 하는 짓은 변하지 않는 이탈리아군 1943년 9월 12일 오후 2시, 오토 스코르체니 중령이 지휘하의 무장 SS 및 공군의 혼성 강하엽병부대가 글라이더 12기에 분승 어느 산장근처 야산 분지의 평지에 강행 착륙했다. (착륙성공 8기) 이 산장을 경비하던 부대는 무장 SS란것을 알자마자 주저없이 항복, 스코르체니 부대는 산장 내로부터 뭇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피젤러 슈트로히 연락기로 뭇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남은 부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했다. 영국해군 무장 어선과의 1:1 대결 잠수함「갈릴레이(Galilei)」, 이탈리아의 위대한 과학자 이름을 붙인 군함이다. 하지만 이 군함은 영국해군의 무장 상선도 아닌 트롤어선 개조 무장 어선과의 1:1 승부에서 패배..........( ASW trawler - HMS Moonstone ) 게다가 무려 포획되어 버렸다. 어선주제에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 변변한 조준기도 없는데 차례차례 명중탄을 퍼붓고 승리한 로열.네이비도 굉장하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사관들이 다쳤다고 시원시럽게 백기를 걸고 항복해버렸다. orz 이탈리아의 전쟁학 1. 이길 수 없는 상대 = 절대 전쟁까지 가지않는다. 2. 강적 및 동격의 상대 = 약해지는 것을 신중하게 기다리고 나서 개전 하는 → 하지만 참패 3. 약한 상대 = 기꺼이 개전 → 하지만 왠지 참패 4. 절대 지는것을 생각할 수 없는 상대 = 기꺼이 개전 → 고전은 면할 수 없는 전쟁 준비보다 외화 돈벌이를 위해 자국 공군에도 배치가 끝나지 않은 기체를 수출하고 있었다. -> 이탈리아 공군 전투기 피아트 G50은 40년 6월에야 첫 전투비행단이 창설되었다. 하지만 피아트사는 자국 공군에도 배치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41년 1월, 최신 개량형인 G50bis를 핀란드공군에 판매했다.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았다? 2차대전기 미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출, 이탈리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기의 이야기다. 그러나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이탈리아군에 전의는 없었고 미군도 그걸 눈치채곤 공격을 어영부영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군의 관측기가 지나갔을 때는 제대로 싸우고 있는것을 가장한 이탈리아군이었다. 왜냐? 독일군이 오면 전쟁이 더 길어지므로 미군에 발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 미군도 의지없는 눈가림 반격, 그 전투을 독일군 관측기는 이렇게 보고 있었다. 「 대단해! 이탈리아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 」 하지만 그 후에 이탈리아군의 바램과는 달리 독일군이 구원으로 나타나 그 전투는 진짜 격전이 되어버렸다는(...) 신의 가호 이탈리아군은 화약의 경우 적절한 보관 장소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교회에 즐겨 보관했다. 교회라면 적군도 폭격까지는 하지 않을것이고 또한 신의 가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첨탑에 보기 좋게 낙뢰. 마을은 대폭발로 순식간에 1/5이 날아갔다고 한다. 나폴리의 도둑은 세계제일 2차대전기 이탈리아의 나폴리에서는 군함이 도둑맞은 사례가 있었고 중동전쟁의 한창때는 전차까지 도둑맞았다고 한다. 군용기에 관한 일화 이탈리아 공군은 2차대전기때까지도 전기간에 있어 계기 비행의 훈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느 전투기의 초기형은 밀폐식 방풍이었지만 파일럿들로부터「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라는 불평(...)을 듣자 양산형은 개방식으로 되돌렸다. 그 때문에 모처럼의 고속 전투기가 엉망. 무기없이 싸울때 이탈리아군은 강하다(?) 소말리아에 UN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을 때, 약간의 시비로 미 해병대와 이탈리아군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사건의 단초는 이탈리아군이 검문에서 통과시킨 소말리아인 용의자를 미 해병대가 연행하려고 하자 이탈리아군과 미 해병대간의 언쟁이 일어났고 이 틈을 본 소말리아인 용의자는 도망, 그것을 본 미 해병대원이 그 소말리아인을 사살. 이것을 계기로 패싸움. 양군 장교들이 이 패싸움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탈리아군이 미국 해병대를 압도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탈리아 통일전쟁시 이탈리아의 반을 정복한 것은 정규군이 아니고, 가리발디의 의용군 머리회전이 빠른 이탈리아군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영국의 패잔병 사냥을 하고 있었지만 영국군은 원주민 취락에 교묘하게 숨어들어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독일군도 원주민 취락을 샅샅히 수색했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현지의 세력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영국군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면 설탕 5포대와 밀가루 5포대를 주겠다.」 다음날, 영국군은 전원 잡혔다. 상대의 발을 멈추기 위해 대연회 통일전쟁시 가리발디가 로마 해방을 위해 진군했을때의 일화. 로마 해방이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한 이탈리아의 세력가들과 마피아는 가리발디의 침공을 늦추기 위해서 계책을 궁리했다. 가리발디와 그의 의용군을 초대하는 대연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코스요리의 시작은 훈제 햄으로부터 시작되어 메시나풍 생선 요리, 사슴고기, 새끼양 통구이, 닭요리 등등 디저트에 도너츠나 구운 사과에 이르기까지 총 12 접시가 나오는 매우 호화로운 것이었고 게다가 이것이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이것에 눈이멀어 발이 묶여버린 가리발디는 정부군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고 고전, 결국 협상할수밖에 없었다. 와인 대전기 이탈리아군에서 보급한 와인의 표지엔「전투중 단숨에 들이키면 만취되어 전투도 두렵지 않다!」라고 써 있었다. 또 물자 비축은 탄약보다 와인이 많았다. 포로가 된 이탈리아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3개국군의 포로가 수용된 수용소가 있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집단을 이뤄 땅굴을 파 수용소에서 탈주하려고 시도했고 일본군 포로들은 집단으로 자결해버렸다. 하지만 이탈리아군 포로는 수용소의 문이 필요없을 정도로 점잖았고 개중엔 근처의 아가씨까지 헌팅해 애인을 만든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막에서 구원 요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싸울 때, 이탈리아군 부대로부터 구원 요청이 들어와 독일군 부대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구원하러 향했다. 그러나......바로 그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귀중한 물을 사용해 파스타를 데치고 있었다. 음식이라면 역시 이탈리아인 전장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없을까........그 일념하에 동결건조 기법이 이탈리아인에 의해 발명되었다. 연합국측도 매우 놀랐다고 전해진......orz 포로에게도 풀코스 말타 공방전시 방공전에서 격추된 영국군 파일럿이 해상에서 이탈리아 해군에 포로로 잡혀 이탈리아 본토로 이송되었다. 밤이 되고.......감옥에 들어온 그에게 저녁 식사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파스타에 고기 요리, 식후에는 과일에 와인까지 한잔 따라오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호화로운 식사. 장교라곤 해도 말타에서 보급이 끊겨 매일 형편없는 식사만을 해왔던 RAF 파일럿은 생각했다. 「.........훗.........이것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것인가.....」 내일은 총살된다.......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음식을 비우고 맞이한 이튿날 아침, 그가 수감된 감옥 문앞에 고위 장교가 당번병을 동반하고 나타났다. 이 장교가 총살을 집행하는 녀석인가(?) - 라고 생각한 영국군 파일럿 앞에 그 장교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행인 당번병이 통역했다. 「 어제는 사소한 행정착오로 장교인 귀관에게 일반 병사용 식사를 공급해버렸다. 나의 명예를 걸고 말하건데 우리는 제네바 협정을 준수할 것이며........(이하중략)..........하여튼 포로를 학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나의 얼굴을 봐 어제의 실례를 용서해주지 않겠는가?」 <패션감각이 뛰어난 이탈리아> 포로로 잡힌 영국군들이 대규모로 탈주하자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연합해서 추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 근처 민가에서 훔친 옷과 시트등으로 위장한 영국군을 독일군은 못알아봤지만 이탈리아군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그들로서는 날카로운 이탈리아의 패션 감각을 피해낼수 없었다. 옷좀 유치하게 입는다던가 유행지난 옷을 입고다닌다던가 뭔가 어설프게 입고 다니는 남자들을 검문하면 백이면 백 탈주한 포로들이었다는 전설..^^ Ps.이탈리아군 포로는 포로 수용소에서 가장 꺼리는 포로였습니다. 관리는 편하나(문을 열어놔도 도망 않간다)식사부분에서 상당한 요구를 구한 포로들이었습니다 (포로에게도 풀코스 참고)식사에 포도주와 파스타가 않나온다고 (민간인 배급식량보다 든든한게 군인식량)제네바 협약을 무시했다고 전세계에 폭로하겠다는 어느 이탈리아포로인 장교의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