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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막부 초기의 대중국,대조선 관계
게시물ID : history_1603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10
조회수 : 142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5/31 19:03:07
Noryang.jpg
(노량해전, 1598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6년간 일어난 임진왜란은 비단 조선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모든세력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할수 있으며, 일본 또한 이의 영향을 다방면에서 받았다. 
 여기서 임진란이 일본에 미친 외교적인 영향만 한정지어 바라보자면 이의 영향은 부정적이었다고 할수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사건 자체를 일본이 일으켰다는 점을 상기할때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일본 또한 임진왜란 이후 내부적으로 세력판도가 변화하였고 이러한 변화속에 주도권을 잡은 토쿠가와 가의 에도막부는 외교의 현상변화를 모색하였다.





대중국관계

임진왜란 평화교섭 당시 히데요시가 명의 입조제안을 거부한 이후로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매우 험악해졌다. 세키가하라 전투승리 이후로 토요토미 가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게 되고 사실상 일본의 통치자가 된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와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명과의 국교재개를 최근에 일본에 복속된 류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교재개의 의사를 표하는 한편 이를 위하여 1609년에 국서를 보내게 된다.


Yasuo.png
막부 사신 : 천자폐하, 저희 이제부터 그냥 싸우지말고 서로 친하게 지내영 뿌잉뿌잉~

크기변환_Wanli of Ming.jpg
만력제 : 너넨 왜구, 임란만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해! 픽밴이나 먹고 꺼지라해!

Yasuo.png
막부 사신 : (아놔, 무역하고 싶다고! 우리에게 돈!!)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위처럼 거절당하게 된다. 하지만 여진족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강려크해지고 내부사정이 갈수록 악화되자, 일본과의 관계안정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판단한 명이 막부가 사신을 보낸 이후 10년이 지난 1619년에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


LeeSin.png
명 사신 : 대명천자폐하께서 귀공을 일본국왕으로 봉하고 입조를 허가한다는 뜻을 보이셨소.

크기변환_Tokugawa Hidetada.jpg
토쿠가와 히데타다 : 아니 님아ㅋㅋ 우리가 님네 속국질할 나라로 보이셈?ㅋㅋ 눈 리신이셈?ㅋㅋ 픽밴이나 먹고 꺼지셈ㅋㅋ

LeeSin.png
명 사신 :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소. 나는... 속죄할 것이오.)


위처럼 이번엔 10년전과는 정반대로 명이 토쿠가와 막부에 국교재개를 제안했으나 막부가 거절했는데, 막부의 태도가 바뀐 이유로 다음과 같은 상황변화가 작용했다고 유추해 볼수 있다.

대외적 : 조선과 류큐라는 간접적인 대중교역루트가 마련됨.
대내적 : 조선과 류큐의 사절단이 쇼군의 권위와 정통성을 입증할 외부객체로서 마련되어 굳이 중국으로부터 토쿠가와 쇼군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또한 중국의 속국이라는 지위에 거부감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막부는 1635년에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명과 수교하기 않을것임을 재천명하였으며, 사실상 동아시아에서의 독자노선형성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에도시대 일본은 중국과 공적인 외교가 존재하지 않는상황이 막부가 망한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명을 대신하여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은 폭증하는 화폐수요충당을 목적으로 동전주조 재원수급을 꾀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의 순조로운 추진을 위하여 당시 귀금속과 구리가 풍부했던 일본과의 민간무역을 장려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청이 해금을 해제한 기간동안 더 강화되었다.

크기변환_Chinese Coin.jpg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공적인 외교는 없지만 사적인 교류는 활발히 일어나는 기묘한 관계가 정착된 것이다.





대조선관계

막부와 조선의 외교관계 복구시도는 중국과의 그것에 비해 빨리 가시화되었고 중국과의 그것과 달리 결실을 맺었는데 이는 양국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광해군.jpg
광해군 : 요즘 북쪽의 여진족들이 나대는데 남쪽을 좀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Tokugawa.jpg
토쿠가와 이에야스 : 쇼군의 권위와 정통성을 세우는덴 외국사신만한게 없지...


그렇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다. 바로 명분론이었다. 1598년 일본군대가 조선에서 철군한 이후로 휴전상태가 이어졌긴하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전쟁상태였고 따라서 먼저 평화를 제의한 쪽이 GG쳤다는 인상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따라 막부와 조선은 서로 먼저 국서를 보내라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막부와 조선의 이러한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세력이 존재하였는데, 바로 츠시마 번이였다.


Tsushima.jpg


츠시마 번의 근거지인 츠시마 섬은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 위치한 작은 섬이며, 경작지도 섬 전체면적대비 3%밖에 되지 않는 사실상 불모지이며 츠시마 번은 큐슈에 영지가 있긴 하지만 그것또한 작은 규모였다. 하지만 츠시마 번은 왜구운용, 그리고 임진란 때 작은 번의 규모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수준의 물량을 선보였는데,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역수입에 있었다.
 이처럼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무역경제에 의존하는 쓰시마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크기변환_daimyo.jpg
츠시마 번주 : 아놔, 답답하네!

Samurai corporal.png
가신 : 주공, 제게 좋은 방책이 있습니다!

크기변환_daimyo.jpg
츠시마 번주 : 뭔데? 말해봐!

Samurai corporal.png
가신 : 국서를 주! 작! 하면 됩니다!

크기변환_daimyo.jpg
츠시마 번주 : 주!!

Samurai corporal.png
가신 : 작!!

크기변환_daimyo.jpg
츠시마 번주 : 올ㅋ 너좀 짱인듯ㅋ

Samurai corporal.png
가신 : 사실 조선의 마씨에게 자문을 좀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서개작사건인데 츠시마 번은 일본 막부와 조선 조정에 보내는 국서를 각각 서로의 기대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고쳐 송달하였다.
이 국서개작사건은 1626년 츠시마 번의 다이묘가인 소(宗)씨 집안의 내분사건인 야나가와 잇켄에 의하여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나, 막부는 이 사건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처벌했는데 이는 당시 막부가 일본과 조선 간의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고 이러한 희망에 따른 조치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어찌됬든 이런 배경하에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됨으로써 막부와 조선은 공식적으로 종전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때 조선의 관점에서의 조일관계는 막부로부터 조일관계업무를 위임받은 츠시마 번이 조선국왕에게 복속관계를 취함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에도막부의 관점에서는 쇼군이 교체될때마다 일방적으로 사절을 파견하는 것에 조일교류의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과 조선간의 관계는 에도막부 중기까지 이어지나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본과 조선 양국이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불황이 닥친데 따른 사신접대와 파견의 상대적 부담이 증가하고, 일본 내부의 쇼군의 정치쇼에 대한 비판여론의 확산, 그리고 조선과 청의 관계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서로가 생각하는 서로간의 중요도가 떨어지면서 이러한 관계는 해체국면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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