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서는 안 될 선 일본은 넘지 마라" [중앙일보 2006-04-21 07:05:43]
[중앙일보 박승희] 일본의 한국 측 배타적 경제수역(EEZ) 내 수로 측량 계획으로 야기된 한.일 간 갈등이 갈림길에 섰다. 일본 정부는 19일 해상보안청 소속 측량선을 돗토리현 사카이항 인근에 대기시켜 놓고 있다. 독도까지는 200km밖에 안된다. 한국 측 EEZ 수역을 지키고 있는 해양경찰청이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일본 정부가 우리 EEZ 안에서 측량을 강행하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경고했다. 긴장이 감도는 상황이다.
하지만 양국 정부는 아직 협상의 문을 완전히 닫아걸지는 않고 있다.
반 장관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외교적 해결의 길이 있음을 내비쳤다. 일본이 한국 측 EEZ 안에 들어오는 계획을 철회하면 여러 가지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도 말했다. 독도 주변의 우리말 해저 지명을 국제수로기구(IHO)에 등재하는 시기를 당초의 6월에서 늦출 수 있다는 방안 등이 정부 협상안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역시 당분간 외교적 해결을 모색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본 측은 외교 라인을 통해 해저 지명 등재 시기를 늦추면 조사 활동을 그만둘 수 있다는 뜻을 정부에 제안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수로 조사의 상호 통보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야치 쇼타로 외무성 사무차관은 "한.일 간에 이들 해역에서 과학 조사를 할 경우 사전 통보제도의 틀을 만들자"고 했다. 상호 통보제도를 빌미로 독도 주변에서 해양 조사를 하겠다는 의미다. 정부는 이 주장 속에 독도를 국제분쟁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며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협상이 쉽지 않은 이유다.
한.일 양측은 외교 채널을 통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19일 밤 아베 신조 관방장관에게 냉정한 대처를 지시하고, 측량선 출항 계획이 유보된 것도 협상 결과를 좀 더 지켜보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20일이 협상의 고비가 될 수 있다"고도 말했다. 미국도 한.일 간의 외교 중재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17일 유명환 외교부 제1차관을 만난 데 이어 19일에는 오시마 쇼타로 주한 일본대사를 만나 EEZ 측량을 둘러싼 한.일 간 갈등이 동북아 안정을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외교적인 해결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공세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EEZ 기점을 울릉도에서 독도로 변경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일본과의 EEZ 협상에서 기점을 울릉도로 잡은 것은 명분보다 실리 외교의 측면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릉도를 기점으로 하더라도 독도 해역이 우리 측에 포함되는 데다 서남해 EEZ 협상에서 최대한 실리를 챙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 그런 만큼 기점을 울릉도에서 독도로 변경한다면 독도 문제의 쟁점화를 회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방안은 "조용한 외교를 계속할지 결정할 때가 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현실화되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박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