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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신채호 [申采浩, 1880.12.8~1936.2]
게시물ID : history_16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생겼어용♥
추천 : 10
조회수 : 722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1/06/06 21:21:47

BGM 정보 : http://heartbrea.kr/?category=98970&document_srl=351483&mid=recommend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 호는 단재(丹齋)·단생(丹生)·일편단생(一片丹生). 조선 말기부터 독립운동기까지의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조선시대의 정치가였던 신숙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근현대사 파트에서 수능 근현대사 및 공무원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민족사학자이며 그가 쓴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를 통하여 암울한 개항기 및 독립운동기 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만주 땅이 한민족의 땅임을,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음을 강조하였다.


1. 계몽운동과 독립운동 ¶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민족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시작한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에서 주필로 활동했으며, 〈이탈리아 건국 삼걸전〉, 〈을지문덕전〉 등을 지어 민중에게 자주 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진회의 성토에도 앞장섰다. 국권 피탈 즈음해서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의 일환으로 국외로 이주해 만주, 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견문을 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나철의 대종교와 연계가 있었는데, 이후 나철이 사망하고 2대교주 김교헌이 독립운동보다 종교 체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대종교를 운영하자 사이가 소원해지게 된다. 이후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사고전서를 보기도 하고, 조선상고사를 쓰기도 하는 등 학술적인 면에서 나름대로 좋은 시기를 보내는 도중,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이후 민중의 힘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대통령이 이승만으로 결정되자 이에 크게 반대했다. 이는 이승만이 미국에 제출한 위임통치 청원서 때문이었는데, 당시 이에 대한 신채호의 평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까지 파는구나!"였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후 외교론이 임시 정부의 주요 방안으로 자리잡자 그는 임시 정부의 조직에서 사실상 빠지고 〈독립신문〉에 정면으로 맞서 〈신대한〉을 발간했다. 결국 1923년 국민 대표 회의가 열리자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도 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표 주자 역할을 하다가 국민 대표 회의 결렬 이후 임시 정부를 탈퇴한다. 같은 해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을 짓는다. 여기에서는 '우리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며, 내가 2명을 죽이면 조선인 1명을 살리는 일이며, 내가 10명을 죽이면 조선인 9명을 살리는 길이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했으며, 이외에도 자치론, 외교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 등을 차례로 비판하며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 혁명을 답으로 제시했다. 1927년, 신간회 발족에 참가했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때 혐의는 위조지폐 제조로, 아나키즘과 연결이 강했다. 1936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 직전에 부호였던 일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병보석으로 풀려날 것을 제안받았으나, 그가 이미 친일파로 변절했기에 거절했다.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이지 않게 화장해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겼으나 주변인들 대다수가 단재의 시신을 국내로 가져가자고 주장했고 이에 국내에 안장했다. 이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2. 역사 저술 ¶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저술한다. 이는 기존의 단군 - 기자 - 위만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고대 사관을 단군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사관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전 역사 서술이 거의 일본 역사서의 번역에 그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에 비해서, 임나일본부설 비판부터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까지 어지간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 나온다. 때문에 최초의 제대로 된 근대적 역사연구는 신채호의 독사신론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1924 ~ 1925년 동아일보에 여러 논문을 썼는데, 이를 홍명희 등의 엮어낸 것이 〈조선사연구초〉이다. 1931년 옥중에서 쓴 글을 안재홍이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는데 이는 후에 〈조선상고사〉로 불리게 된다. 〈조선사연구초〉에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 실려있고, 〈조선상고사〉 서문에 그 유명한 아와 비아의 투쟁이 쓰여져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 사상이자 정신인 낭가 사상을 강조했다.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김부식을 무자비하게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는 당시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하였던 묘청이야말로 고려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주장하면서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게 되면서 자주적인 역사관이 사대주의에 억눌리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하지만 묘청도 비판했다. 너무 성급하게 추진해 묘청의 난은 실패했고 고려의 역사관은 사대주의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외에 중국 신문에 역사 관련 사설을 연재한 경력이 있으나 돈을 벌기 위해 쓴 글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이 글들을 쓴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글을 편집자가 약간의 자구 수정을 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때려치운 일화도 있는데, 글 쓴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는 이와도 연결될 것이다. 당시 도망치듯 중국에 건너가서 집필활동을 할 때였기 때문에 돈도 별로 없었는데, 그는 매일 중국의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서 선 자리에서 관련된 책을 모두 읽어버린 후, 통째로 암기하여 집에 가서 자신의 원고와 비교 분석하여 다시 글을 쓰는 일을 반복했다 한다. 뭐 이런 괴수가... 더구나 황당할 정도로 완벽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설 연재를 집어치운 앞의 일화도 그렇지만, 자신이 이전에 쓴 글도 마음에 이후에 다시 봐서 마음에 안든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불살라 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 때문인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등에 있는 한담에선 "내가 지금 3원만 있으면 무슨책도 사고 무슨책도 살텐데... 아니다. 정말 1원만 있다면 이 책을 사서 공부할 수 있는데..." 와 같은 안습한 글귀가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러가서 몰래 집구석에 매우 적은 돈(조금만 더 크면 의심하니까)을 쑤셔박아놓았고, 단재는 집을 청소하다가 이 적은 돈을 발견하고 '헐 언제 잃어버렸었지 횡재했구만' 라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이정도밖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조금 이른 시기 만주 땅을 돌면서 답사를 할 때 광개토호태왕비 탁본 한 장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 했을 정도였다고.


3. 사상과 정신 ¶

1920년대 초기부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후기에는 폐쇄적인 민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사해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초기에는 영웅주의적 역사관에서 '왜놈들을 쳐부셔줄 영웅'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후 민중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1920년대 후반 즈음해서는 아나키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 때문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음에도 군사정권 시절까지 가족이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건 신채호가 평소에 이승만을 대차게 까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채호는 그 올곧은 정신으로도 이름이 높다.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고 세수를 했다는 일화는 역사 공부 좀 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일화. 이외에도 고기가 일본산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다 토해버렸다든지 하는 일화가 많다.


4. 그외의 부분들 ¶

역사학자로서 유명한 신채호이지만, 국문학에 있어서도 한자리 걸쳐있다. 초기의 영웅전 번역 이외에도 다양한 소설을 서술했기 때문이다. '꿈하늘', '용과 용의 대격전', '일목대왕의 철퇴'가 대표작이다. 다만 궁예에 대해서 다룬 '일목대왕의 철퇴(그나마 미완성)'을 포함해서, 문학성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단적으로 '용과 용의 대격전'은 짤막한 단편이지만, 당시 심취하였던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가정사에 있어서는 힘들게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창기에 결혼해서 아들을 보았으나, 아내가 물도 타지 않은 분유를 먹여서 아이가 죽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이후 국외로 나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을 주면서 이혼. 이후에 중국에서 지내는 과정에서 재혼을 하였으나 이 시기도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했던 것은 앞서 언급된 바 있다. 말년에는 앞서 계속 언급되었지만, 아나키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 아나키즘과 연결된 것은 의열단선언을 쓰는 등 의열단과 연계를 가지던 시기에 아나키스트였던 의열단원들중 일부와 접촉하면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연결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애초에 신채호는 민족의 독립이라는 목표하에서 유교 - 영웅사관 - 대종교를 포함한 민족주의 - 무정부주의를 거침없이 넘나들었던 전례가 있다. 독립이라는 목표만 제외하면 도구는 별 신경 안썼다고 보면 단순하다. 이 과정에서 쓴 글 중 하나가 외국의 주의가 조선에 전해지면 조선의 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낭객의 신년만필'인데, 이 글이 청소년 추천 서적으로 지정되어서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애초에 이 글도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인 '크로포트킨의 세례를 받자'는 등 아나키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이기 때문이다.


5. 오늘날의 신채호 ¶

그의 역사관은 현재 한국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어, 국사책에도 그의 연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말은 각종 역사 관련 시험에서 가장 유명한 말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자금 부족과 사료획득의 한계, 또는 그가 사료로 쓴 도서나 금석문 같은 것이 현대에 와서 존재하지 않거나 잘못 판독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대표적인 것이 삼조선설) 그의 주장 중에는 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많다. 하지만 사론(史論), 그리고 구한말부터 항일투쟁시대까지의 민족사학의 정신은 높이 평가받아, 사학사(史學史)쪽에서는 상당한 비중으로 다뤄지며 존경받는다. 그가 워낙 독보적인, 그리고 대표적인 민족사학자이자 항쟁가였기 때문에 후대의 인물들은 자신들을 신채호와 동일시하기위해 그의 주장을 차용하는 것이 많다. 주로 현재는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을... 일례로 쥬신이라는 이름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 비롯된 떡밥(그는 '주신'을 이야기했고, 쥬신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그 후 어느 만화가가 만든 것이다). 환빠들은 하필이면 특히 현재 검증되어 버려진 학설들을 들고 와서 "신채호 선생도 맞다고 한 학설임. 니들이 감히 신채호 선생님 까나요 이 매국노들아?" 식으로 일반인과 환까들을 몰아붙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로 단재를 욕먹이는 일이다. 누가 자신의 글 중 틀린 것을 들고가서 자신을 팔면서 이게 맞다고 벅벅 우기는 장면을 연상해보자. 아마 단재가 되살아난다면 그 성격에 도끼들고 쫓아가서 찍어버릴 듯... 더더군다나 환빠들 중 단재 선생의 주장 일부분만 따서 자기들 주장이 맞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전체 글을 보면 그에 대해 보완하는 설명도 많이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세조 분서설. 세조가 고대 역사사를 태워 지금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떡밥인데 신채호 주장 전체를 보면 세조가 태운 것은 주로 역술서 같은 책들로 역사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신채호 선생 주장은 당시 문화 등을 알 수 있는 역술서 등을 태워 그것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한 것인데 환빠들은 이를 왜곡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환빠들의 특성 때문에 역으로 환까들의 최대 무기가 되기도 하는데, 신채호는 천부경 등을 대차게 까기도 했기 때문. 분명 신채호는 존경받을 만한 독립운동가이고 사학자이기에 환빠들이 신채호를 방패삼아 밀고 오면 조심스러워지는 역사학자도 있지만(사실 잘못 건드리면 환빠들이 더 날뛰는 탓도 있다), 신채호는 상당히 비판을 많이 받은 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놓고 까는 사람도 제법 있다. 단재 사학의 독단성, 교조주의적인 면모는 학계에서도 비판적으로 다루어지며, 특히 두세 번씩 본인의 추측만을 거친 이두 해석법은 정말 평이 좋지 않다('소머리' - '수밀이' - '수메르' 드립을 쳤던 환빠들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대개는 그의 환경을 감안해 열정만큼은 인정받는 편이고, 환빠들과 신채호를 동일 선상에 세우려는 사람은 없다. 밥 굶어가면서도 책 한 권에 목말라했던 역사학자와 밥 먹고 하는 짓이 정신승리밖에 없는 잉여인간을 같이 비교한다면 말이나 되랴. 우습게도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일제의 호적등록을 거부한 탓에 일제의 호적법을 계승한 대한민국 국적법상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2009년 4월 14일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을 기념해서 겨우 국적을 회복하게 되었다. ----

[1] 오해를 풀기 위해서 언급하지만, 종교적 체제 강화에 주도했다고는 하지만 대종교는 그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무장 독립투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단적으로 청산리 전투의 북로군정서가 대종교의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다. 다만 역사학계에도 한 자리 걸치고 있는 김교헌의 책들이 역사서인지 종교서적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쓰여진 것처럼, 을사오적 암살단 조직해서 직접 총들고 뛰어다닌 나철 시기 보다는 종교적 성향이 강해졌다는 이야기다. [2] 3.1운동의 진정한 의미중 하나가 민중의 재발견이다. 영웅과 초인의 등장을 바라던 지식인들이 이전에는 선도해야할 대상으로 취급하던 민중에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단계에서 민중을 독립운동의 동반자로 보느냐 여전히 교화의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후 행적에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3] 다만 현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승만의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뭐, 이승만만 따지면 그 이후 이승만은 임시 정부 대통령의 역할을 전혀 안 한 수준이니 결과적으로 옳게는 되었지만... [4] 이때 독립신문을 박은식이 주도했으니, 초기 근대사학의 대표자 2명이 언론을 통한 정치논쟁을 벌인 셈이다. [5] 신채호는 기본적으로 무장 투쟁은 긍정적으로 봤지만, 당시의 상황하에서는 독립군 활동으로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6] 〈조선상고사〉는 1948년 출간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조선사〉라는 이름으로 연재했으나 연재가 백제의 멸망에서 끊겼기에 이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7] 아와 비아의 투쟁은 아나키즘이 사회를 인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책세상에서 펴낸 조세현 씨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를 참고할 것. [8] 예를 들어 조선상고사 후반부는 거의 그 책의 해설본이라고 할 만큼 조선상고사에서 자주 나오는 책으로 '해상잡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교차 검증도 전혀 되지 않고 현재 전하지도 않는다. 역사학자 대부분의 추측은 신채호가 당시 범람하던 가짜 민족주의 사서에 낚였다는 것. [9] 당시 상황이 교차검증이니 뭐니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이 인정받기 때문이다. 신채호의 대척점으로 훨씬 안정적 상황에서 연구햇던 실증사학의 이병도 역시 '지명의 한자가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라는 식으로 지역 비정한 예가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 정치인이나 독립운동가로써의 신채호 선생은
좋아하지만, 역사가로써의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제의 제국주의를 파시즘으로 맞서자는듯한 느낌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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