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 당원이자 진보적 활동가인 박정근에 대한 공안탄압이 점입가경에 이르렀다. 지난 9월 박정근이 트위터를 통해 ‘우리민족끼리’를 RT한 것을 구실로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7471.html )된 이후 최근 1월 11일에 추가적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것이다.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박정근에 대한 혐의는 바로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82987&CMPT_CD=P0001)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압수수색 영장뿐만 아니라 구속영장 모두는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다. 설사 이번 사건이 (마땅히 그래야겠지만) 무혐의로 종결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개인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3921) 이것은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공안탄압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박정근의 당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자신은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종북좌파’의 노선는 거리가 멀다. 사회당은 진보신당과 더불어 소위 ‘종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받는 조직과 단체들과 거리가 멀다. 사회당은 오히려 반조선노동당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는 정당이다. 그리고 트위터에 그가 해왔던 발언과 그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북한발언과 RT행위는 전혀 ‘찬양-고무’에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가령 그가 김부자를 찬양하는 구호나 표현들을 흉내내며 반성적으로 뒤튼 방식들은 누가 봐도 패러디의 형식이었지 북한체제에 대한 찬양고무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은 그가 두리반, 포이동, 명동마리, 등 철거현장과 각종 집회에서 진보적 활동을 해온 것을 염두에 둔 표적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패러디는 북한에 대해 동정적인 진보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령 그는 북한의 선전구호들을 차용해서 남한 보수주의자들이나 반공주의자들의 입장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의 패러디는 말 그대로 반공주의를 조롱할 뿐만 아니라 (남한 보수주의자들이 공유하는) 북한체제 그 자신의 사상적 경직성을 조롱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지난 최근의 공안탄압의 사례들, 사노련과 한대련 간부들에 대한 검찰기소, 왕재산 사건과 결을 달리 한다. 왜냐하면 박정근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실제로 남북한 체제에 대해 갖고 있는 사상적 견해와 무관하게 그 자신이 행한 순수한 농담만을 빌미로 표현의 자유를 탄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공안사건들과 달리 이번 사건은 결국 아무런 조직적 실체가 없는 한 개인을 대상으로 한 공안탄압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근은 공안탄압의 표적이 된 NL 성향 진보주의자들이나 기타 반체제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북한과 남한 체제에 대해 어떤 명확한 이념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북한 말투를 흉내내었던 ‘개드립’(김정일 만세?!)들은 그가 실제로 남북한의 분단모순에 대한 이념적 입장의 결여를 정확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오히려 정말로 북한체제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진지하게 분단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면, 트위터와 같은 SNS에서 공공연하게 북한의 체제선전 말투를 자의식적으로 흉내내거나 비틀어서 조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분단문제에 대한 박정근 자신의 몰이념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공안기관 역시 바보들이 아닌 이상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념적 입장을 떠나서 ’표현의 방식’이 공안기관에 의해 탄압의 빌미가 되었던 것인데 이는 다시 한 번 오늘날 국가보안법이 개인이 ‘정말로’ 어떤 ‘생각’(내심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을 하는지를 떠나서 그 개인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마저도 검열하고 탄압하는 악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국가보안법 하에서 북한체제에 대해 동정적인 입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동정적 입장 자체를 패러디하는 표현방식 자체도 이제는 공안기관의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박정근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는 소위 말하는 민주화 시대 이후 공안탄압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첫번째로 이번 사건은 남한 내의 자유주의자들이 국가보안법의 해악에 대해 더 이상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근에 적용된 국보법의 찬양고무금지 조항은 체제전복 시도나 북한과의 어떤 조직적 연루와도 무관한 한 개인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민주화된 시대에서는 찬양고무죄라든가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들이 엄격한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무고한’(?) 개개인의 시민들의 사적인 자유를 자의적으로 탄압하지는 않으리라는,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이 일정부분 사문화되었다는 일각의 기대를 보기 좋게 좌절시킨 것이다. 아니다. 친북세력과 어떤 조직적인 연루가 없어도, 사회주의 조직 건설에 전혀 참여하지 않아도 한 개인이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을 빌미로 자의적으로 탄압당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남한식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이다. 북한에 대해 비판적이더라도, 사회주의와 같은 급진사상에 동감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온건한 자유주의자들 역시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
두번째로, 이번 사건은 조승수와 진중권과 같은 진보주의자들의 ‘종북좌파’ 담론의 부적절성을 보여준다. 물론 그들과 같은 순결한(?) ‘반북좌파’들은 국가보안법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그들 스스로는 친북혐의로부터 자유롭다는 위선적인 자기만족적 우월감에 의해 지탱된다. 진중권이 과거 보수매체 중앙일보에 기고하면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역설한 논리를 보라. [중앙일보 시론 : 알몸으로 서게 하라] 그는 국가보안법이 주사파들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역으로 국보법 폐지가 시대착오적인 종북좌파들이 스스로의 목표를 상실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므로 보수파들이 스스로 폐지에 앞장서야 한다고 호소했다. 상당히 역겨운 논리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전적으로 종북좌파들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까지 유지했던 이유도 그리고 그것을 폐지해야 할 이유도 전적으로 종북주사파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에 대한 이러한 순진한 인식은 다시금 종북이나 주사나 이런 것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회당 당원 박정근에 대한 공안탄압으로 그 순진성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드러냈다. 국가보안법의 문제는 대북노선을 떠난 모든 진보적 정치세력의 공통문제이다.
마지막으로, 박정근의 농담은 단순히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내에서도 고착된 친북/반북 구분을 넘어서는 개인들, 활동들, 목소리의 존재와 의의를 인정할 것을 요청한다. 박정근에 대한 탄압을 반대하는 측에서조차 (실제로는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박정근의 ‘북한드립’을 박정근 자신의 부주의함이나 괴팍한 성향으로 돌리는 것은 쉽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북한말투를 흉내낸 그의 농담들은 오늘날 분단모순을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철저하게 몰이념적인 입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의 농담에도 의의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친북이냐, 반북이냐라는 오늘날 남한사회의 주된 프레임 및 정치적 구분법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농담은 남한 내 친북(?)세력과 반공세력 모두를 조롱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을 구분짓는 친북/반북 프레임 자체를 조롱한다. 따라서 나는 박정근에 대한 공안탄압이 단순히 그 자신의 개인의 자유를 탄압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 그의 농담이 기존 사상검증의 논리를 무의미하게 하고, 가볍게 하고, 혼란스럽게 했다는 의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고 본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이후에 진보진영은 더욱 더 북한에 대한 입장과 사상을 검증받아야 할 위치에 있게 되었다. 박정근 사건은 진보진영의 이러한 위치가 단순히 NL이나 주사파 내지는 혁사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번 공안탄압의 메시지는 이러한 것이다. 사회당도 진보신당도, 자칭 반복좌파나 반김좌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표현을 더욱 더 검열하고 친북혐의로부터 스스로의 가능한 연관들을 미리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사상검증의 프레임이 단순히 공안기관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중적인 정서와 사고방식을 감염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인터넷에서 난무하는 각종 북한 드립들 중 최고로 흥행했던 개드립은 뭐니뭐니 해도 “김정일 개갞끼 해봐”일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농담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수행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개드립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친북혐의에 관해 진보세력이 정색하고 변명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근은 여기에 대해서 정색하지 않고 ”김정일 만세다 개갞기들아” 응수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세웠다. 박정근의 북한드립이 분단모순을 희화화하는 측면을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농담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수행적 효과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소위 친북세력과 북한에 대한 앞서의 장난어린 사삼검증(김정일 개갞기 해봐)은 농담에 그치지 않고 애국자연한 자기표상을 동반한다. 물론 이러한 가벼운 유희를 통해 애국지사 흉내를 내는 것은 전부터 있어왔던 일이고, 인터넷의 반MB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자위행위에 가깝다. 문제는 이러한 자위행위들이 그러한 자위행위적 농담에 동일한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는 박정근과 같은 개개인을 근거 없는 마녀사냥에 노출시킨다는 것이다. 박정근은 평소 나꼼수와 같은 집단광기에도 거리를 두어왔고, 야권연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게다가 그는 야권세력의 대중동원 방식이 북한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고 조롱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가 이제는 자신이 친북 코스프레를 하며 조롱했던 인터넷 입보수들의 히스테리증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현재 그는 어느쪽으로부터든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우리들은 국가보안법의 새로운 탄압방식과 맞물린 집단광기의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오늘날 진보적 개인들은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얄팍한 (반공주의적인) 농담이나 재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더 나아가 그러한 농담이나 재담에 똑같은 수준의 농담이나 재담으로 응수하는 것만으로도 탄압에 노출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오늘날 ‘탄압’을 당한다는 유력 야당 정치인들은 어떤가?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려서 법정싸움을 이어나간 한명숙은 이명박의 탄압에 맞선 ‘투사’가 되었다. 정봉주 의원 역시 나꼼수 신드롬 속에서 새로운 투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나꼼수식 재담의 한 요소로 환원될 것이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예상하는 호사가들은 내심 정봉주 저서의 판매량에 더욱 관심을 가질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영웅적인 것도 없다. 오히려 지금 공안탄압과 대중들의 비난 혹은 무관심에 전적으로 홀로 맞서고 있는 것은 박정근 자신이다. 내가 알기로 박정근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김정일 개새끼 해봐’ 식의 애국자연한 개드립들에 대해 ‘김정일 만만세’라고 조롱할 줄 알았던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어느쪽이든 개드립이지만 한쪽은 마치 애국자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다른 한쪽은 현재 야만적인 공안탄압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들은 박정근 자신의 개드립을 칠 권리 뿐만 아니라 친북이냐 반북이냐는 저 오래된 (그리고 오늘날 대중들의 집단광기의 일부가 되어버린) 정치적 식별 기제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실천들을 지지한다. 박정근에 대한 공안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얼마전 ‘뉴타운 간첩파티’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열렸다. (물론 북한의 김정일과 다른 동명이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도심 한 복판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김정일 만세’를 외치는 자리였다. 이러한 집단적인 패러디는 오늘날 사상의 자유의 확대에 대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어떤 사상적 입장(예컨대 김정일에 대한 개인숭배)을 표현하는 방식들을 뒤틀어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상을 조롱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결국 그러한 사상을 진지하게 표현하는 것마저도 무의미한 ’클리셰’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일련의 공적인 표현들을 검열하는 것만으로는 실제로 어떤 사상을 ‘검열’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보여준다. 그러한 방식으로 오늘날 남한사회를 짓누르는 ‘친북이냐/반북이냐’라는 식별기제를 뒤흔들고 모호하게 하는 실천들이 더욱 더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박정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박정근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국보법 폐지의 당위를 재차 역설하는 것을 넘어서, 박정근이 했던 북한드립(북한체제를 찬양하는 구호들을 장난스럽게 패러디하는 것)이나 북한 트윗계정(우리민족끼리)을 RT하는 행위를 집단적으로 반복하는 운동을 제안한다. 물론 그러한 행위들은 개드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순결성을 내세우면서 사상의 자유나 국보법 폐지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그런 순결성에 부적합한 이들에게 더욱 더 사상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사상의 자유가 더 우월하다느니 국보법 폐지가 서구식 관용의 대세라느니 외치기만 하는 그것이야말로 진중권식의 자기기만으로 귀결될 것이다. 박정근이 보여준 개드립은 역으로 국가보안법과 같은 사상검열의 무의미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터넷에 횡행하는 자기만족적이고 외설적인 개드립들의 무의미성 역시 보여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진보진영 일부마저 굴복한 친북/반북 프레임의 무의미성을 더 잘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