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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하여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많은가봅니다.
게시물ID : history_161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주여행자
추천 : 11/5
조회수 : 1309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14/06/04 08:30:07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163633&s_no=163633&kind=search&search_table_name=bestofbest&page=1&keyfield=subject&keyword=%EC%9D%BC%EC%A0%9C

이 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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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근대화론이 말하는 몇가지가 있는데 

첫째 인구증가
둘때 수명증가
셋째 농지확대
넷째 신분제철페

라고 하는데 전부 개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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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글을 보고 몇 자 적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대화라고 할 때, 그 기초를 생산시설 혹은 산업시설로만 바라보고 있는 잘못을 역사교과서는 종종 저지릅니다. 
"왜정시대(=일제 강점기 시대. 저는 일본을 혐오하여 왜국이라고 부르므로, 일제시대를 왜정시대라고 부르겠습니다.)에 그 이전보다 경제 면에서 빠르게 발전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화는 한반도 북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남부의 발전상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도 6.25를 통해서 90% 이상이 다 파괴되었다. 그러나 북부는 그다지 많이 파괴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단 이후 성장한 것은 일제의 근대화 유산이 남겨진 북한이 아니라, 근대화 유산이 없는 남한이다."

바로 이러한 헛소리를 종종 한다는 게 문제죠.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는 주장입니다. 
1. 일제의 근대화 유산이 남겨있다가 파괴되었어도 경제성장이 잘 되었다는 사실은 일제 시대에 근대화 산업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어쨌든 일단 근대화 되긴 했다는 걸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2. 산업시설은 무엇으로 운용할텐가? 기계는 자동으로 돌아가는가? 아닙니다. 자본과 고급기술인력이 필요합니다. 이미 경성이 한반도 제2의 도시인 평양을 수위도시로서 누르고 있었고, 경평 간 자본 차이가 상당했으며, 북한이 남한에겐 매우 아리가또하게도 자본가, 지주, 고급기술자, 은행원, 학생, 유학생, 지식인 등등을 '반프롤레타리아'라고 탄압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이 고급인력들이 꾸준히 월남하다가 6.25 중에도 상당히 월남합니다. 지식인과 기술자의 유입은 이후의 남한 경제 성장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반면 북한은 인프라가 있어도 제대로 운용을 못 했죠.
3. 근대화라는 것은 산업화만을 논하는 개념인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意識), 그리고 의식주에서부터 행정, 법, 제도, 시장경제 도입, 정치구조 등 제도적 유산, 학문의 성장, 인적자본은 고려하지 않고 산업화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정치와 법은 일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으나, 조선에 있어 여러가지 학문과 철학, 그리고 경제체제의 성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4. 어...어쨌든 그 근대화는 일본만을 위한 것이었잖긔! 라는 말도 논점을 벗어나는 말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어쨌든 조선땅에 근대산업시설이 들어오기는 했다는 얘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얘기니까요. 일본이 수탈을 위해서였든 뭐든 일단 지어놓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통해 일본이 훨씬 더 이득을 봤다는 얘기도 문제가 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도' 일본땅인 이상, 일본을 위해 놓는 게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조선인이 이득을 보지 않았는지 아니면 조선인'도' 이득을 봤는지에 대해 따져야 합니다. 물론, 격차가 있더라도 그 격차 때문에 근대화 산업시설 자체가 부정당하면 안 됩니다. 조선의 근대화 시설로부터 +10의 총이익이 발생했는데 조선인에게 +1, 일본인에게 +9가 각각 돌아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조선인은 +1의 이득을 본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뭐 단순히 근대화=산업화라는 주장은 이밖에도 더 많은 비판이 가능하나 이쯤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가진 식근론에 대한 단순한 비판은, "뭐? 식민지 시대에 인구가 증가했으니 근대화라고?"와 같은 이상한 주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인구가 증가하고, 수명이 증가하고, 농지가 증가하고,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식근론은 개발경제학에서 한국 산업기(6~80년대)의 생산요소, 내재적 기술발전 경제 성장 모형이 들어맞지 않자, 제도의 측면에서 설명하려다 나온 이론으로, 근대적 제도(자본주의, 사유재산 보호, 회사법 및 주식 도입, 학문 발달 및 근대교육, 근대행정, 행정과 사법의 분리, 금융자본 축적,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경제가 성장하였으며, 이것들의 "기원"은 왜정시대에 기원한다는 주장입니다. 

객관적으로, 왜정시대 자체가 "근대"입니다. 우리가 현재 정보화시대를 살며 정보화되고 스마트기기시대를 살며 스마트화되는 것처럼, 근대를 사는 사람들이 근대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정시대에 근대화가 된 건 어쨌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당시의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곳에서는 근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 근대화가 일본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이후의 경제성장에까지 받은 이득이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수혜를 받았냐는 것이고, 이것에서 한 술 더 떠서 주장되는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그렇기에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는 개소리 주장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인 것입니다.(이건 수혜론이지 근대화론이 아님)
그리고 그 식근론에서 중요한 것,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경제 성장 및 지표에 관한 부분이고, 식근론에서는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인구가 2배로 늘어났다라든지 조선인의 수명의 증가가 전적으로 일제 덕분이다라든지 경지면적이 3배 증가했다라든지 신분제를 철폐했다라든지 하며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닌 사실을 반론하면서도 사실과 다르게 반론하더군요.


1. 인구증가: 왜정시대 조선의 인구는 아주 객관적으로 매우 빠르게 증가합니다.
삼일절 노래에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삼천만이란 숫자는 사실은 조선이 독립했을 당시의 인구고, 실제 삼일절 당시의 조선 인구는 대략 1.800만이었습니다. 이 천팔백만의 인구는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의 약 1.600~1.700만에서(초기의 통계 오차는 컸을 겁니다.) 최소 50만~최대 200만은 불어난 수이고, 1944년의 조선 인구, 2.512만과 비교하여 보면 34년만에 700만 가까운 인구가 불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인 1944년의 재일조선인 수는 약 236만이고, 재만조선인 수는 약 170여만이었습니다. 이 인구를 다 합하면 약 3천만, 조선의 인구는 삼천만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6년동안의 일본의 조선통치기간 동안 조선의 조선인 인구는 약 45% 증가하였으며, 광복 직후 조선인 총 인구는 약 75%가 증가합니다. 1910~1915년의, 근대행정 초기의 통계 오차를 무시한다 하더라도 1915년의 1.765만에서 1944년의 2.918만(재선, 재만, 재일 조선인 몽땅 합쳐서)까지, 30년 동안 인구가 65%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정시대 조선의 인구는 2배 증가했으니 이것은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진짜 근대화론자는 없습니다. 다만, 왜정시대 동안 조선인의 인구수가 약 1.7배 증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 조선에서의 조선인 인구만 따지고 재일 재만 조선인 인구는 안 따지는지 모르겠군요.)

2. 수명이 아닌 평균수명의 증가: 왜정시대 조선의 위생 약학 의생학 상태는 매우 빠르게 증가하였고, 평균수명은 증가합니다.
왜정시대의 수명의 증가가 식민지 기간 동안의 위생 및 의학생리의 발달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식근론자나 식근반대론자 모두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식근론자는 그것이 일본의 공이라고는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그 글 작성자는 수혜론과 근대화론을 헛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재중원이 아니라 제중원에서 국책사업으로 양의학을 도입하긴 했지만, 왜정시대 동안에 발전된 양의학이 일본이 없었다 해도 발전되었을 거라는 주장은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기에 불필요한 발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조선이 들여오려고 했으면 아마 못했을 거다"란 주장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주장입니다. 조선시대, 그리고 왜정시대 초기까지 양의학의 보급은 대중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으며, 양의학은 왜정시대가 상당히 진행된 시기 이후 일반화됩니다. 또한, 조선인의 평균수명의 증가는 영유아 사망률의 감소, 그리고 집단전염병 발병 감소로 인한 덕을 아주 많이 보았고, 특히 약제사, 간호사, 산파의 수 증가의 덕택을 많이 봤습니다. 의학이 발전하고, 병에 대해 치료를 잘 해서 오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응급처치를 잘 하게 되고, 부인내과 등의 일부 과목의 발전, 위생상태 전반의 개선, 그리고 약의 보급으로 인하여 안 죽어도 될 일로 덜 죽게 된 것입니다. (가령, 조선시대에는 영유아 사망률이 무척이나 높았으며, 특히 아기가 다리부터 나오면 산모고 아기고 다 죽습니다. 수인성 전염병이 돌아도 떼죽음을 당하고, 약만 제대로 먹어도 될 일도 약 못 먹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이 약제사나 간호사, 산파 등의 의료인 수에 있어 조선인 의료인 수의 증가가 급격하게 는 건 1920년대이고, 일본인 의료인력이 대거 투입된 건 1910년대 이후입니다. (참고로 이 모든 통계는 광복이전통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kosis.kr/statisticsList/statisticsList_01List.jsp?parmTabId=M_01_03_01 )
어쨌든 그 이후로도 평균수명은 급격하게 올라갔습니다. 1926~30년의 평균수명은 33,7세, 그리고 1931~35년의 평균수명은 37,4세, 1941~45년의 평균수명은 45,1세인 것을 감안하면, 평균수명은 급격하게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모두 일본 덕택이라고 한다면 개소리지만, 왜정시대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며, 일본이 아니었어도....라고 주장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3. 농지 확대: 농출 증대에 대해서는 아무도 경지면적을 가지고 논하지 않습니다.
식근론에서는 왜정시대 동안 농토가 3배 늘어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 이후 농지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성자가 주장하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집계가 늘어난 농지는 그 이전에 비하여 약 80%로, 전체의 농지는 약 1,82배가 늘어났습니다. 어디에서 3배 드립이 나온 것인지 모르겠군요. 다만 사실인 것은, 쌀 생산량이 1910년대 초반의 140만톤에서 1930년대의 250만톤, 그리고 1940년대의 400만톤으로 증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기간 일본의 쌀 생산은 1.000만톤에서 1.200만톤으로 증가하는데 그치고, 대만의 경우 40만톤에서 161만톤으로 증가합니다. 이러한 것은 농토가 늘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수리시설을 개량하고, 관개를 하며, 품종을 개량하고, 무엇보다 화학비료와 농약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기 때문입니다.
1933년 8월 18일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일본 정부가 조선 쌀의 일본 수출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 내 농촌이 가난해지기 때문이고, 이를 타개하는 데에는 쌀값을 올리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생산비가 더 많이 드는 일본 쌀이 조선 쌀로 인하여 압박을 받지 않을 정도의 고율의 세를 책정하려고 한다. 그런데 시발 엉? 조선은 엉? 유통구조도 엉망이고 엉? 관계비용도 비싸다고!!!! 생산비가 산출 대비 하면 엉? 일본보다 오히려 비싼 걸지도 모른다고!!!! 엉? 야 이놈들아 쌀 농사 지어서 먹고 사는 조선 다 죽게 생겼다 ㅅㅂㄹㄷ아! 조선 경제 다 망한다고 ㅅㅂ!"이라고 사설을 썼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8180020920100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3-08-18&officeId=00020&pageNo=1&printNo=4555&publishType=00020)
이는 일본 내 쌀 증산은 크게 되지 않았는데 조선에서 산미증식이 크게 되고 이를 통해 일본 내 쌀값이 하락하고 일본 농민이 몰락하는 데다가 조선 내에서 쌀 생산이 크게 되고 쌀이 남자 일본으로의 수출이 증대되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조선인들의 소득이 일본보다 월등히 적었고, 쌀은 비쌌기 때문에, 아무리 쌀이 많이 생산되어도 좁쌀이나 콩에 비해 비싼 쌀을 많이 사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 내의 쌀 수요가 크게 늘지 않고, 오히려 감소했기 때문에 쌀이 더더욱 남아 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쌀 수출 통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쌀이 많아졌고, 이 쌀들이 자본주의 경쟁의 산물이요, 수출입 물자로 등극했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를 통털어, 아니 그 이전부터 주욱,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쌀을 수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수탈은 국내에서의 경우(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에도 마찬가지)가 많고, 적어도 국가적으로 봤을 때, 생산자이자 소유자(=지주)가 교역을 하는 성향이 짙어졌기 때문에, 첨언을 하자면 이 농출을 가지고 무조건 "수탈이었다"라고 주장하는 반식근론자의 주장도 옳지 못합니다.

4. 신분제 철폐: 신분제는 식근론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신분제는 1894년에 적어도 공식적으로 철폐가 되었고, 사실상 왜정시대 내내 신분제가 이어져 내려오다가, 해방 이후, 특히 미군정과 6.25를 거치며 싸그리 없어졌습니다. 그 어떤 '진짜 식근론자'도 신분제가 일본에 의해 철폐되었다고 주장하거나, 그 어떤 반식근론자도 '신분제가 일본에 의해 철폐된 거 아니거든?'하고 반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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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모든 것들은 '근대'기간에 일어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왜정시대 기간에 일어난 일들일 뿐입니다. 왜정시대가 아니면 어땠을 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왜정시대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들도 아닙니다. 그러면 식근론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유의미한 경제 성장이 있었고 지금의 우리의 경제성장의 토대도 식민지 시대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정말로 식민지 기간 동안에 경제가 유의미할 정도로 괄목하게 성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근대화에 대해선 이미 위에서 논했으므로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덕택이라거나 딱히 유의미할 정도로 근대화 되었거나 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경제성장에 대하여 몇 자 적습니다.

왜정시대의 전체 경제에 대해서, 조선총독부가 남긴 통계 사료를 가지고 경제를 연구할 수도 있고, 개개인 혹은 당시 경제활동을 하던 기업이 남긴 민간 사료를 가지고 경제를 연구할 수도 있습니다. 조선의 경제상황에 대해 총독부, 그리고 만철, 동척, 선은, 식은의 방대한 사료가 있는데 이러한 사료들은 반드시 연구를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민간 사료는 대체적으로 미시적인 자료이며, 이러한 접근만으로는 전체 경제에 대해서 파악하기 어렵고 거시적인 경제상황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중앙(=식민지정부, 식민지기관)의 통계라는 것이 집계된 때가 길게는 1800년대 후반에서부터 짧게는 1950년 직전까지(왜정시대 끝난 이후 과도기까지)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그 기간동안 쌓여온 통계라는 것이 길게는 50년이지만 짧게는 10여년 정도라는 사실을 살펴보면, 미시적 거시적 분석의 관련성을 해명하는데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상호보완적 자료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 집계의 문제(aggregation problem) 및 관찰 측정의 오차(error. 관찰치나 측정치 '오류')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즉, 일본 자체가 20세기 초 '개발 도상국'이었고, 방법론이라든가 통계치에 대해서 우리가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구구 민행(溝口敏行; 미조구치 히데유키)이라는 자는 왜정시대의 통계를 가지고 국민계정을 추계하여, 1911년부터 1938년까지, 2차대전 시기를 제외한 식민지 시대의 경제 전체의 국민계정을 계산하였습니다. 여기에는 GDE, GDP, 국제수지 등이 포함되지만, 소득 측면의 추계는 이뤄지지 않았고, 지출 및 생산으로부터 조선의 경제 규모를 파악했습니다. 이것은 개개의 소득 추산의 데이터가 별로 없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작용한 것이지, 딱히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의 경제 통계라는 것은 농업이 주된 산업이기 때문에 농업 통계가 주요하게 작용하지만, 농업이라는 것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가뭄이라든지, 홍수라든지... 그렇기 때문에 연평균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이 마무리되는 1918년까지의 통계는 의미없다 치고, 대략 3개년 평균으로 1919~1936년간 조선의 경우 GDE가 연평균 3% 가량 성장합니다. 이 수치는 크지 않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시기에 대공황이 닥치고 영국이 1,3% 프랑스가 1,1%, 미국이 2,6%의 성장을 보이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큰 수치입니다. 다만, 같은 시기의 일본 본토는 3,2%, 또다른 식민지인 대만은 4,1%가 증가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적어도 '일본제국경제'의 지역경제로서는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닙니다.

GDE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최종 완성품의 지출을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Anno 1404를 해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인쇄소를 건립해야 합니다. 인쇄소를 건립하기 위해서는 목재, 유리, 연장, 석재가 필요합니다. 목재를 위해 목공소를 지어야 하고 목공소를 짓는데도 자원이 들어갑니다. 유리를 위해서는 유리제련소를 지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다시 목재, 석재, 연장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유리제련소에서는 석영과 탄산칼륨을 가지고 유리를 만들 수 있는데 석영을 위해서는 석영광산을 지어야 하고, 탄산칼륨을 위해서는 포레스트 글라스워크를 숲에 지어야 하며, 여기서 목재를 가지고 탄산칼륨을 만듭니다. 석재는 채석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역시 연장과 목재를 필요로 합니다. 연장을 위해서는 연장제작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역시 연장과 석재와 목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연장을 만드는데 철과 석탄이 필요하고 철을 위해서 철광산을 만들고 철제련소를 지어서 철을 제련해야 하며 거기에 숯이 필요하기 때문에 숯가마도 또 건설해야하는데 여기에도 다들 연장과 목재와 석재가 필요하죠..... 이렇게 지어진 인쇄소에서는 종이와 염료를 가지고 책을 만드는데 종이는 종이제작소가 필요하고, 염료를 만드는데는 염료 농장을 지어야 합니다. 역시 자원이 소모되는 일이죠. 이 모든것을 통해서 책 한권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소요된 막대한 목재, 석재, 유리, 종이, 철, 숯 등등을 생산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종 생산 측면에서의 추계의 경제 총생산액은 목재, 석재, 유리, 종이, 철, 숯을 전부 다 계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책 한 권이입니다.. 이처럼 여러 단계를 거친 생산 과정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에 대해서 부가가치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국내총지출이 일정부분 구구 민행에 의하여 계산되었지만, 이것은 경제 전체의 생산규모일 뿐입니다. (GDE=GDP) 중국이나 브라질의 경제의 총 규모가 높다고 해서 그 나라가 높은 경제수준을 구가하는 것이 아닌 것은, 일인당 생산이 낮기 때문입니다. 기술발전이 전혀 없이 인구만 늘어나도 총생산이 증가합니다. 그러나, 일인당 생산은 하락하고, 생활수준은 체감할 것입니다. 동기간 조선의 1인당 GDE는 대만과 일본보다도 증가속도가 느립니다. 결론은, 조선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뒤쳐지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어쨌든, 1인당 GDP라는 것이 인구수로 나눈 지극히 단순한 산술평균인데, 당시 조선의 경제주체는 일본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조선인을 분리한 수치가 아니고, 이것은 소득분배라는 측면을 무시하는 결과치입니다. 실제로 총 GDE 규모가 확대되어가고 가고 있는데도, 그것에서 농업의 부분이 상당 컸음에도, 조선의 쌀 소비량은 1930년대 초까지 약간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왜정시대의 경제에서 이것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에서의 쌀 반출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1인당 소득이 명목상 늘었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쌀 소비량이 준 것이 전적으로 쌀 반출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 중반 이전의 미곡 생산이 지속적으로 과소계상되어왔다고 밝히고 새로운 추계법을 시도하여 왜정시대 중반 갑자기 쌀생산량이 증가한 것으로 통계가 잡히기 때문이고, 1인당 소득도 늘긴 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푸드퍼즐(근대화 산업성장기의 이전경제에서 일인당 소득이 증가함에소 일시적으로 일인당 식량 소비가 감소하는 현상)이라는 것이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선진국 있는 바, 이것이 진짜 민족간 불평등인지, 소득격차에 따른 열위였다가 일시적 감소 후 증가였는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의 상당은 자본축적에 의한 것이고 (생산요소 성장기여도 중 기술발전에 의한 경제성장은 0,4%, 자본투입은 1,5%, 노동투입은 0,9%입니다) 이 자본 축적은 당연히 일제의 자본이며, 이를 볼 때 조선 경제는 양적 팽창을 했음에도 1930년대까지 성장이 정체하다가 그 이후에야 잠깐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추계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공황에 시달리던 영국, 프랑스, 미국의 막장 경제테크에 비해 좀 나은 성장을 이룩했다 뿐이지, 1960~1990년대의 한국 경제 성장에 비해서도 그다지 높은 수치는 아닙니다. (지금 시점에서 경제 3% 성장하는게 훨씬 더 양적으로 많은 성장인데도 말이죠.) 게다가, 자본축적은 1930년대의 공업화를 토대로 한 자본축적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데 구구 민행의 통계에서 조선의 국내생산의 약 30% 정도가 용역(재화와 용역 중에 용역, 서비스)이라는 개소리...(우리나라 1970년대까지 주우우우욱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가 섞여있었기 때문에 근대 왜정시대의 경제 성장이 실제로 높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더더욱 알기 어렵습니다.

왜정시대의 경제사정을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쓰는 물품과 기기와 교통수단이 근대화를 통해 괄목할만하게 변했으며, 일본 뿐만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사회에 통합되므로써 경제 및 교역의 거리가 커졌고, 왜정시대 기간 동안 양적인 팽창을 이루었습니다. 단순 지표들로만 따져보면 경제는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장이 실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서 조선인들의 경제사정이 실질상대적으로(일본인의 경제사정에 비해) 나아졌는지를 살펴보면 별 거 아닙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이 지금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되었는지에 대해 논해야 하는데, 지금의 경제 발전에는 미국의 원조, 계획경제를 통한 산업개발, 높은 교육열과 문화 모든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왜정시대의 근대화의 영향을 받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주요 원인이라 볼 이유도 없고요. 그렇기에 식근론은 그다지 올바른 주장이 아닌 것입니다. 식근론을 반박할 때는 이러한 잘못된 경제 성장에 대한 접근을 비판해야지, 한반도가 왜정시대에 근대화가 된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한반도가 왜정시대에 근대화 자체가 된 게 맞긴 맞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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