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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북송(北宋) 같은 경우가 없었다
금병이 물러가자 휘종 일행은 조용히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곤 항전파를 축출하고 태상황의 썩어빠진 궁정 생활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불과 반 년 남짓 후 금병이 또 쳐들어왔다. 휘종과 흠종, 부패하고 무능한 두 황제는 묻지마 항복한다.
1126년 12월, 흠종은 친히 금나라 군사 진영으로 찾아가 항복을 요청하는 동시에 칭신청죄(신하로 칭하고 죄를 청함)한다. 또한 하남 하북 두 커다란 지역을 바친다. 금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금괴 1000만정 은괴 2000만정 비단1000만 필을 더 요구했다.
천문학적 액수의 전쟁배상금 요구는 송의 속사정을 훤히 꿴 상태에서 나온 하나의 술책이었다. 그들이 의도한 바는 바로 송의 부녀자였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금 얼마 은 얼마...열흘 안에 수레로 보내라. 만일 부족하면, 공주 또는 왕비(황제의 며느리) 1인=금 천, 옹주 1인=금 오백,... 종실부인=얼마, 족실부인=얼마,...단, 금나라 사령부가 골라서 받는다, 이 말은 너무 박색은 퇴짜란 소리.
요구액 금 100만정, 황제의 딸과 며느리의 값어치가 금 1000정 :1000x1000=100만. 황제의 딸과 며느리가 1000명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흠종은 견디지 못하고 황실 여인네들, 자기 딸들 포함하여 모두 금나라에 팔기로 동의한다.
비빈 83人, 황제의 며느리 24人 ,공주와 옹주 22人, 후비 3000여人, 종실남녀 4000여人, 황제의 인척 5000여人, 각종기술자 3000여人, 관기 3000여人, 민간 미녀 3000여人, 각급 대신과 종실의 가족 수천 명이었다. 마치 새둥지를 탈탈 털은 격이었다.
2월 20일에 모모 왕의 부인이 어디에서 자살, 2월 24일 모 공주(16세)가 병으로 사망, 2월 25일 모 공주(16살) 어디에서 돌아가심, 2월 28일 모 공주(16살) 같은 곳에서 돌아가심.
3월 4일 황하를 건널 때, 금나라 모모 대왕이, 임신한 모 공주와 모 공주가 말을 같이 탄 모양을 보고선, 모를 죽이고 시체는 황하에 버리고 모는 데리고 갔다. 이 모 대왕은 훗날 남송 황제가 되는 조구의 처 형비도 강간하였다. 형비는 하남 어디어디에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일곱 무리 중 한 무리에 부녀자 3400여人이 3월 27일 출발하여 4월 27일 북경에 도착, 살아남은 부녀는 1900여人이었다. 한 달 만에 거의 반이 죽었다. 죽지 않은 건 행운이라 하겠으나, 그들에게 남겨진 운명은 비극을 면할 길 없었다.
그해 9월 중순에 금나라 조정은 두 황제를 멀리 내몽골로 옮겼다. 북녘의 찬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던 날, 참혹한 눈물을 날리며 종실 일행과 이별한 두 황제와 황실 일행은 거의 천리 길을 가서 시월 중순에 내몽골에 도착한다. 그곳은 매우 황량하고 소슬하여 모든 것이 연산보다 못했다.
1128년 3월, 두 황제 및 그 수행원들은 통새주로 옮겨졌고, 각각 1500경(여의도 면적의 약 12배)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밭을 갈고 개간하고 파종하는 등, 자급자족하라는 뜻이었다. 궁중에서 존귀한 몸으로 떵떵거리던 생활에 익숙한 휘종은, 콩과 보리 분간조차 못 할 정도, 어떻게 이러한 거친 농사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히 지난 추억이 생각났고, 시「안아미眼兒媚 beautiful eyes)」를 지었다.
제왕가는 만리나 멀어졌구나
단청이 아롱진 전각들에서는
아침에는 삼현륙각 요란했고
저녁에는 생황과 비파소리 흥겨웠네
꽃 같던 도읍은 주인 없어 쓸쓸하고
춘몽에 오랑캐 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네
고향산천은 어디메뇨?
오랑캐 피리소리 듣노라니
매화가 속절없이 지는구나
이에 흠종은 눈물을 비 오듯 쏟으며 다음과 같이 답시를 짓는다.
인효가 넘친 명문대가였소이다
어느 아침 간사한 무리가 일어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번져졌는데
비파소리 듣고 계시다니요?
눈앞의 이 광경 소슬하기 그지없고
오랑캐땅의 모래바람만 감도는군요
집과 고국에서 만리나 떨어진
외톨이 두 부자는
새벽서리 맞은 꽃과 같사옵니다
오랑캐 땅 모래바람과 비파 소리 뒤얽힌 중에, 옛 번성했던 시절을 추억하니, 이러한 슬픈 신음소리를 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8월 하순에 두 황제 일행 1300여 人은 멀리 흑룡강으로 또 옮겨졌고, 금나라 사람들은 포로봉헌의식을 거행한다. 휘종과 태후 및 흠종과 황후, 종실, 여러 왕들, 부마, 공주들은 죄다 머리는 두건으로 동여매고, 피가 뚝뚝 흐르는 양가죽을, 웃통을 벗은 맨살에 걸쳐야 했다.
다음날 금태종은 휘종을 혼덕공(덕이 혼미한 이)으로, 흠종을 중혼후(아주 혼미한 이)로 봉하였다.
원래 금나라 군사가 변경을 공략할 때, 궁을 이 잡듯이 뒤져 조씨 송나라 황실 사람들을 생포했다. 휘종의 형과 동생 또한 행운은 없었다. 휘종의 32명 아들과 22명 딸들은 나중의 남송 황제 조구 및 한 살짜리 딸아이 하나 외에는, 죄다 일망타진 당했다. 옛 사람이 이에 탄식하며 말했다 : “먼 옛날 이래로, 망국의 치욕으로, 조씨 송나라 같은 경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