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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오래 살아남은 위(衛)나라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1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128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6/05 22:30:24

도공(悼公)은 재위 5년 만에 죽고 아들 경공(敬公) 희불(姬弗)이 즉위하였다. 경공은 재위 19년 만에 죽고 아들 소공(昭公) 희규(姬糾)가 즉위하였다. 이때 삼진(三晉)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고, 위군은 하나의 작은 후작(候爵)의 신세로 전락하여 진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조(趙)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소공 6년에 공자 미(亹)가 소공을 시해하고는 그 대신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회공(懷公)이다. 회공 11년에 공자 퇴(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공(愼公)이다. 신공의 부친은 공자 적(適)이고, 공자 적의 부친은 경공(敬公)이다. 신공은 재위 42년만에 죽고 아들 성공(聲公) 희훈(姬訓)이 즉위하였다. 성공은 재위 11년만에 죽고 아들 성후(成候) 희속(姬遬)이 즉위하였다.

 


성후 11년에 공손앙(公孫鞅)이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16년에 위나라 군주가 후작(候爵)으로 격하되었다.

 


29년에 성후가 죽고 아들 평후(平候)가 즉위하였다. 평후는 8년 만에 죽고 아들 사군(嗣君)이 즉위하였다

 


사군 5년에 군주의 지위가 격하되어 군(君)이라 칭하였으며, 국토라고는 오로지 복양(濮陽) 밖에 없었다.

 


사군은 재위 42년 만에 죽고 아들 회군(懷君)이 죽위하였다. 회군 31년에 위(魏)나라로 조배(朝拜)하러 갔는데, 위나라에서는 그를 죄인으로 구금해두었다가 죽여버렸다. 위(魏)나라는 사군의 아우를 즉위시켰으니, 그가 원군(元君)이다. 원군은 위(魏)나라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를 즉위시켰던 것이다. 원군 14년에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침공하여 그 동부 지역을 점유하고는 그곳에다 동군(東郡)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위군(衛君)을 다시 야왕현(野王縣)으로 옮기게 하고는 복양을 동군에 편입시켰다. 25년에 원군이 죽고 아들 희각(姬角)이 즉위하였다.

 


위군(衛君) 희각 9년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여 시황제(始皇帝)가 즉위하였다. 21년에 진나라 이세(二世)가 위군 희각을 평민으로 폐출시켰다. 이로써 위나라의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위(衛)나라의 건국자인 위강숙(衛康叔)은 주무왕과 주공 단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입니다. 주성왕 무렵에 관숙과 채숙이 주왕의 아들인 무경녹보(武庚祿父)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주공 단이 이를 제압한 이후에 자신의 동생이었던 강숙을 위(衛)의 군주에 봉하여 은나라 유민들을 관할하도록 하였습니다.

 


위강숙을 시작해서 정백(貞伯)까지는 백(伯)의 지위였지만 정백의 아들인 경후(頃候)가 주이왕(周夷王)에게 많은 재물을 상납하여 경후 이후로는 후작(候爵)의 지위로 올라갔습니다. 이후 경후의 손자인 화(和)가 견융이 주나라를 침공하여 주유왕(周幽王)을 죽이는 등 주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군을 이끌고 주나라를 구원하고 견융을 평정하여 주평왕(周平王)은 그에게 공작(公爵)을 수여하였습니다. 화는 사후에 위무공(衛武公)으로 불렸습니다.


 

★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따르면 위(衛)나라가 강숙 때부터 백작(伯爵)이 아니라 후작(候爵)을 수여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숙(혹은 강백康伯)부터 정백(貞伯)에 이르기까지 백(伯)이라고 하는 것은 백작이 아닌 방백(方伯 : 제후들의 우두머리)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위(衛)나라는 위무공 이후에 위나라 공실은 상당히 혼란에 빠집니다. 위무공의 손자인 위환공 무렵에는 환공의 동생인 주우가 환공을 죽이고 자신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이 환공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위의공(衛懿公) 같은 경우 학을 기르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적족이 위를 침공했을 때, 이를 막으려 보낸 군사들 가운데 일부가 반기를 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대신들마저 「군주께서는 학을 즐겨 기르시니 학으로 하여금 적족의 사람들과 대항해서 싸우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만 오가다가 결국 적족은 위나라 수도까지 진격해서 위의공을 죽입니다.

 


의공 이후에 그나마 문공(文公)때 위나라가 잠깐 안정되었지만 이 문공도 훗날 춘추시대 2대 패공이 되는 진문공을 예를 다하여 그를 대해주지 않았고, 결국 이 일 때문에 위나라는 문공의 아들인 성공 무렵에 진문공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이외에도 위나라는 유독 공실간에 피의 암투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춘추시대나 전국시대가 공실 내부적으로 죽고 죽이는 일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위나라는 유독 이런 경향이 매우 심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데도 나라가 유지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였습니다.

 


※ 출처 : 사기 위강숙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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