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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에 대해 - 2. 감계회담
게시물ID : history_16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눈비비고
추천 : 6
조회수 : 171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6/08 01:43:06
+) 다른 데서 쓴 것을 옮겨 온 거라서 중복되거나 여기서 안 했던 얘기가 포함돼 있을 수도 있습니다. 1. 감계회담 1870년, 청은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영고탑/훈춘 일대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흉년 때문에 넘어 온 함경도 주민들이었죠. 다음 해 3월 이 중454명이 송환됩니다. 하지만 이걸 막기가 어디 쉽나요. 조선은 결국 이들에게 함경도 관찰사 명의로 토지대장을 만들어 세금을 거둡니다. 청은 몰랐죠. 두만강 유역은 여전히 봉금지대고, 거리가 오죽 멀어야지요. 이런 상황은 81년에 바뀝니다. 청이 알게 됐거든요 -_-; 청은 이들을 청에 귀화시키려고 했고, 조선은 송환시킬테니 취소해 달라고 합니다. 야단난 건 거기에 살던 백성들이었습니다. 힘들게 땅을 일궜는데 다 뺏기고 돌아가게 생겼으니까요. 이들은 직접 토문강을 살펴보고 이게 두만강이 아니라는 걸 밝히죠. 이 때 어윤중이 서북경략사로 임명됐는데, 확인해보니 정말 다른 강이었던 겁니다. 백성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선 입장에서도 좋죠. 조선은 청에 이렇게 알리고, 청은 조선인들을 축출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회담이 열리죠. 감계회담입니다. (1) 1차 감계회담 조선은 비를 중심으로 자세히 조사하자고 주장합니다. 반면 청은 비가 옮겨졌을 수 있으니 원래 목적대로 두만강의 원류를 찾아가자고 하죠. 일단 여기서 막힙니다. 조선으로서는 토문강이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두만강 이북과 거기에 있는 조선인 거주구역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에 문제는 "어디까지 가는지 몰라도" 였죠. (...) 양국 대표들은 계속 싸웁니다. 결국 정해진 건 두만=토문이라 전제하고 강과 비를 모두 조사하되, 강부터 조사하겠다는 거였죠. 거기에 청이 먼저 조사하자고 한 건 서두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슈타인호프님의 포스팅에 있는 지도를 보면서 얘기하도록 하죠. 보시면 참 복잡하죠? -_-; 오도백하(토문강)은 저렇게 북으로 흘러갑니다. 진짜 얼마나 대충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만 겨울에 조사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긴 합니다. 아무튼 조선측의 반대로 3팀으로 나누어집니다. 홍단수, 서두수, 홍토수죠. 이 중 서두수는 험한 길과 눈 때문에 답사를 중단하고, 어윤중이 맡고 있던 홍토수 팀은 홍토수를 따라 정계비가 있는 곳까지 도달, 비문을 탁본합니다. 자, 이제 다시 싸워야죠. 청 측은 여전히 국경선은 두만강이고, 그 원류를 찾으면 된다고 합니다. 정계비 내용이 잘못 되었다는 거죠. 반면 조선 측은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것은 맞지만, 지금 조사한 강들이 모두 정계비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들을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죠. 문제는...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흘러서 흑룡강까지 간다는 게 확실히 밝혀졌다는 거죠. 스케일이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조선이 준비한 것은 없었죠. 덕원 부사 이중하의 상소입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전번에 청(淸)에서 온 자문(咨文)에 저들의 국적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토와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 비와 두만강의 수원이 일치하지 않고, 단속이 해이해져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많으며, 어디까지가 국경인지 제대로 토의하여 확정해야 된다고 하고 있죠. 조선에서도 토문강 주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말로야 계속 토문강 토문강 거렸지만요. 2년 후, 이들은 다시 만납니다. (2) 2차 감계회담 여기서 중점이 된 것은 정계비가 국경을 나누는 것이냐 그냥 기념으로 놔둔 것이냐는 거였죠. 청은 별 의미 없는 거라고 하지만 조선은 이게 확실히 국경을 가르는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싸우죠. -_-; 여기서 청은 홍단수를 내세웁니다. 반면 조선은 홍토수를 내세우죠. 비랑 제일 가깝죠. 그 근거로 조선과 청의 지도들을 내세웁니다. 청은 홍단수로 압박하다가 결국 석을수로 합의 봐고 하죠. 하지만 이 강 역시 백두산이 아닌 아래에 있는 소백산에서 나오는 지류였습니다. 이중하의 단호한 거부에 결국 감계회담은 끝납니다. 이렇게 국경에 대한 결정은 미제로 남은 채 시간은 흘러가죠. 2. 기회 1897년, 함경북도 관찰사 조존우는 백두산 정계비와 간도에 대해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조사 후 보고합니다. 여기서 이주자가 이미 수만호에 달했고 모두 청인의 압제를 받고 있다고 하죠. 청은 이주민들을 강제로 청의 풍습에 따르게 했고, 조선인들은 가족 중 한 명을 귀화시킨 척 한 다음에 그 사람 명의로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조선의 방침은 어디까지나 "홍토수"였거든요. 그런데 몇 년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1903년 8월 11일 김규홍이 보고한 내용입니다. 북간도(北間島)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淸) 나라의 경계 지대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북쪽 변경의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로서 그 지역에 이주하여 경작하여 지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 이제는 수만 호에 십 여만 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청인(淸人)들의 침어(侵漁)를 혹심하게 받고 있습니다. (중략) 나라의 경계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전에 분수령(分水嶺) 정계비(定界碑) 아래 토문강(土門江) 이남의 구역은 물론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으니 결수(結數)에 따라 세(稅)를 정해야 할 것인데, 수백 년 동안 비어 두었던 땅에 갑자기 온당하게 작정하는 것은 매우 크게 벌이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보호할 관리를 특별히 두고 또한 해당 간도 백성들의 청원대로 시찰관(視察官) 이범윤(李範允)을 그대로 관리로 특별히 차임하여 해당 간도(間島)에 주재시켜 전적으로 사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여 조정에서 간도 백성들을 보살펴 주는 뜻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청인들의 학대가 심해지자 이범윤을 보내서 조사했고, 지들이 땅 비워놓은 거 우리 백성들이 들어간대다 우리 땅인 거 결정까지 됐는데 저러니 우리 백성 보호하자. 이런 거죠. 에? -_-; 감계회담은 제대로 결정되지도 않았고 조선 측의 주장은 홍토수였는데요? 자. 여기서부터 대한제국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감계회담이 결렬된 후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청은 청일전쟁과 의화단 사건 등으로 크게 위축돼 있었습니다. 곳곳을 조차지로 뺏기고 러시아는 만주에 대한 권리를 얻어 가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간도에 신경쓸 수 있었을까요? 조선은 이 기회를 노려서 간도를 먹으려 한 겁니다. 이범윤은 간도에서 세금을 걷어서 병력을 양성하고 치안을 유지하려 합니다. 이걸 청이 항의하려 합니다만... 이 때 러일전쟁이 터지죠. 이 때 일본은 청나라 편을 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데 청과 척을 지면 안 되니까요. 청에서는 한국군 병력을 철수시키고 다시 합의를 보자고 하고, 일본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던 한국 역시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이제 국권을 조금씩 침탈해 가죠. 이 때 일본은 러시아에게서 남만주의 이권을 보장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일본은 간도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치하죠. 간도에 거주하는 10만여의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고, 청국 관리에게 적당한 훈령을 발하여 착오 없게 하라는 거였죠. 간도의 한국인들을 보호해 준다는 정말 고마운 -_- 말과는 별개로 간도가 한국 땅이었으면 청나라에 저걸 통보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 때 청나라에 세금을 내지말고 청의 법도 따르지 말라고 확실히 방침을 정하죠. 이후에야 치를 떠는 간도 협약으로 간도가 넘어갑니다만... 이게 남의 땅이라서 중국이 사들인 걸까요? 중국은 이미 대만을 되찾기 위해 일본에 돈을 지불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철도운영권이 간도보다 더 중요했죠. 이후 일본이 이 철도를 정말 잘 이용해 먹죠. 이렇게 어떻게든 간도를 먹어보려 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끝을 맺습니다. 3. 간도는 우리 땅일까? 간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보통 이렇습니다. 고구려, 발해의 고토이다. - 아 이건 넘어갈게요. 천 년 전 우리 땅이라고 되찾아야 되면 일본은 불과 60년 전 자기 땅이었으니 한반도를 회복해야 될까요. 일본이 팔았다. - 그러니까 일본 핑계는 그만 -_- 청이 버려뒀다. - 당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많이 나오는 말이죠. 물론 그 때의 국경의 개념이 애매하긴 했고, 봉금지대로 청이 신경을 안 쓰기도 했습니다. 근데... 봉금지대를 정한 건 신성하기 때문인데 그런 땅을 그냥 버려둔 게 말이 될까요. 더군다나 간도에 대한 얘기 곳곳에서 청과 충돌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청은 계속 이 땅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조선인들을 귀화시키거나 쫓아내려 했습니다. - 가장 큰 문제는, 이 "버려뒀다"는 핑계는 독도에 그대로 써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비교해 볼까요. 청이 간도를 버려뒀다 백성들이 거기를 개간했다 vs 조선이 독도를 버려뒀다 일본 어민들이 거기서 고기잡이를 했다 당시 간도는 청과 조선의 분쟁지역이었다 vs 지금 독도는 한국과 일본의 분쟁지역이다 조선은 1900년대에 간도를 영토에 편입시키고 세금을 받고 행정관을 파견했다 vs 독도를 떠나서 60년 전에 한국을 자기 나라에 편입해서 세금을 받고 행정관을 파견한 나라가 있었죠. 거기다 계속 청이 반대했던 간도에 비해 이 나라는 참 쉽게 먹혔네요. 때로는 이런 주장이 일본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무섭습니다. 어떤 부류의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대일본제국의 정신은 아직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정계비에 동위토문이 적혀 있다. - 이중하는 2차 감계회담에서 홍토수가 경계라고 했습니다. 청이 계속 협박해도 거부했죠. 만약 이중하가 동위토문에 해당되는 그 넓은 땅을 포기했다면 수십리밖에 안 되는 걸 가지고 그렇게 싸워댔을까요? 동위토문은 틀린 거였습니다. 5. 결론 이전 글에서 조선이 만주를 향한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인 것은 나라가 가장 약하고 힘들 때였다고 했었습니다. 그게 저런 거였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닙니다. 간도에 살던 조선인들은 십만여호에 달했다고 하니까요. 오히려 조선이 그냥 뜯기고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기분이 신기하기도 했구요. 뭐 -_-; 나라 망하게 생긴 상황에서 욕심만 낸 거지만요. 이중하 등 조선의 관리들은 청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감계회담 때도 단 한 치도 뺏기지 않으려고 강하게 맞섰습니다. 자랑스러워 해야 될 부분인 거죠. 하지만 1900년대에 대한제국이 보여 준 모습은 어디까지나 침략이었습니다. 우리 백성이 산다, 우리 고토다, 외교에서 말 바꿔서 우겨대기 등등...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와 별 다를 바 없었던 겁니다. 이 때문에 대한제국이 힘이 셌다면 일본이랑 같이 잘 놀았을 거라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애초에 문제가 됐던 지역은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있는 일부 지역이었고, 백성들이 넘어가서 간도라 불린 지역은 두만강 상류의 일부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제대로 정해진 지역이 아니기에 간도의 범위는 들쭉날쭉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구만 1억이 넘는 거대한 범위를 잡기도 하죠. 그런데 간도의 뜻은 아주 초라해서, 사이(間) 섬(島)이라는 의미입니다. 강을 넘어 간 백성들이 잡히자 "우리는 만주로 간 게 아니라 강 사이에 있는 섬에 갔다 온 거다"고 변명한 데에서 나온 거죠. 실록에서 보면 고종 이전에는 간도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간도의 범위 역시 조선인 거주 구역을 잡은 것일 뿐이죠. 이 단어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 즉 조선인 거주 구역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서 나온 말인 겁니다. 글쎄요. 어차피 남의 땅 뺏기에 혈안이 돼 있던 시대, 백성들을 위해서 저렇게 행동해도 될 수도 있죠. 청인들이 거의 안 살기는 했으니까요. 관리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남들 다 하는 거 그리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 때에 대한제국이 한 것은 영토 욕심보다는 조선인들의 거주지 보호라는 측면이 더 강하니까요. 회담에서 계속 토문강을 민 것도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구요. 이 점은 옹호를 넘어서 좋게 봐도 될 측면입니다. 나라가 망할 상황에서도 이렇게 욕심 낸 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니까요. 단순 영토 욕심이라면 말 그대로 그냥 병... 이지만요 -_-; 하지만 지금 그걸 되찾으려고 한다는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 분명히 침략이며, 뺏긴 땅이라고 억울해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선동입니다. 그리고 이건 곧 일본이 독도를 뺏으려 하는 명분입니다. 독도 주고 간도일까요. 일본에서 그런 말 하는 인간들이랑 똑같아지고 싶진 않은데요. 휴. 이상입니다. _-)/ +) 여담으로 간도 협약으로 정해진 국경선은 석을수였습니다. 한편 1962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정해진 국경선은 홍토수죠. 지금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은 이중하가 주장했던 바로 그 선입니다. +) 그러고보니 백두산에 대해서 조중변계조약으로 북한이 백두산을 팔아먹었다는 말들이 참 많은데, 조선시대 때 과연 백두산이 우리 영토였을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청에게 있어서도 신성한 산이었거든요. 나라의 영산이라 여긴 건 확실하지만요. 일단 대동여지도에서는 천지 남쪽으로 국경선이 있다는군요. 당시 조선의 주장대로 정계비가 국경을 의미했다면 천지 남쪽인 게 맞겠죠. 우습게도 백두산에 대한 영토의식을 공고히 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친일파 최남선입니다. 불함문화론을 내세우며 고구려 고토 회복을 외쳤죠. 민족을 외치면서 백두산, 고구려 고토 회복을 숭배하다시피 하는 현대의 민족주의 흐름의 시작은 최남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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