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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오초칠국의 난 - 오왕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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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85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6/08 13:03:17

한문제와 한경제 시기에 수많은 동성제후들이 있었지만 이들 중에서 가장 최고는 바로 오왕 유비(劉濞)였습니다. 오왕 유비는 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의 아들이었습니다. 유중은 대(代)나라 왕으로 봉해진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흉노가 대나라를 공격하자 이를 지켜내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낙양으로 가서 유방에게 자수했습니다. 나라를 지키지도 못하고 버린 죄는 엄벌에 처해도 할 말이 없었지만 차마 유방은 자신의 형을 벌할 수는 없어서 왕위를 폐하고 합양후로 삼았습니다.

 

 

 

이후 고조 11년에 회남왕 영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 유중의 아들인 패후 유비는 당시 20살이었습니다. 그는 기장(騎將)으로 종군하여 기의 서쪽 회추에서 영포의 군대를 깨뜨리는 등 큰 공을 세웠습니다. 유방은 자신의 자식들을 제후에 봉하려고 했지만, 그의 자식들이 너무 어리고 오와 회계 지역의 사람들이 날쌔고 사나운 탓에 이들을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조카이자 영포의 반란 때 공을 세운 유비를 패땅에서 오왕으로 삼고 3개 군 53개 성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유방이 그에게 왕인(王印)을 내려주고 배수하고 난 뒤 그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얼굴에는 모반의 상이 있다.」

 

 

 

유방은 모반의 상이 있는 유비를 오왕에 책봉한 것을 내심 후회하였지만 이미 내린 왕인을 거둘 수는 없었기에 유비의 등을 토닥거리며 경계(라 쓰고 협박)의 말을 하였습니다.

 

 

 

「한나라에서 앞으로 50년 후에 동남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바로 너일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동성으로 한 집안이니라. 조심하여 모반하지 않도록 하라!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며 말하며 굳게 맹세를 하였습니다.

 

 

 

이후 유방이 죽고 혜제와 여후의 시대에 이르러서 황실 싸움을 제외하면 큰 전쟁이나 토목공사 등이 없어 천하는 안정되었고, 각 군국의 제후들은 자기 나라의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오왕 유비의 오나라에는 예장군에 구리 광산이 있어서, 유비는 천하의 도망자들을 불러 모아 몰래 돈을 주조하였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서 재정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 얼마나 재정이 풍족하였으면 그의 오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굳이 세금을 걷지 않아도 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오나라에서는 사병으로 병역에 복무하면 그때마다 대역금에 해당하는 급여를 주었고, 매년 철 따라 나라 안의 어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백성들에게도 상품을 하사하였습니다. 게다가 다른 군국에서 관리가 와서 도망자를 체포하고자 하여도 도망자를 비호하며 그들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1].

 

 

 

이렇듯 오왕 유비는 그 공으로도 그리고 그 세력으로도 동성제후들 중에서 가장 최고인 자였고, 여후 시절에 황실 내의 피바람마저 피해가면서 한문제와 한경제 시절에는 황실에서 가장 큰 웃어른이기까지 했습니다. 정말로 부와 권세를 모두 얻은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오왕 유비는 조정에 모반할 생각도 없었으며 한황실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의 군국만 조용히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왕 유비를 분노케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문제 시절, 오나라 태자 유현이 조정에 들어와 훗날 경제가 되는 황태자 유계와 쌍륙(바둣 비슷한 것)을 두며 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쌍륙을 노는 데 길을 두고 서로 다투다가 유현의 오만불손한 태도에 화가난 황태자 유계는 쌍륙판을 집어던져 그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유현의 유해를 돌려보내 장사지내게 하였습니다. 아들의 유해를 돌려받은 유비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는 모두 같은 유씨의 집안이다. 장안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사 지내야지 왜 꼭 와서 장사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는 아들의 유해를 다시 장안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였습니다. 이후 오왕 유비는 병을 핑계 삼아 입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조정에서도 그가 입조를 하지 않아 조사를 해보니 모두 꾀병이라는 것을 알고, 차마 오왕 유비를 잡아 벌하지는 않고 오나라의 사자들을 문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유비는 입조를 하지 않았으며 가을 정기 입조에서도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문제는 오나라 사자들을 크게 문책하였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사자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 오왕은 병이 난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에서 여러 사신들을 붙잡아두고 문책하므로 병이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 무릇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이 처음에는 거짓으로 병이라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것을 알게 되어 심하게 문책 받게 되자 더욱 숨어들면서, 황상께서 토벌하실까 두려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꾀를 내게 된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황상께서는 그를 내버려두시어 그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문제는 오나라 사자들을 사면하고 그들을 돌려보내고 오왕 유비에게는 궤장을 하사하며 연로하였으니 입조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중앙정부와 오나라 간의 갈등은 마무리 지어지는 것 같았지만, 곧 다시 불을 지핀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조였습니다.

 

 

 

조조는 조정에 입사한 이후 자주 오나라의 죄를 물어 그 영토를 깎아야 한다고 문제에게 주장하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아들이 오나라 태자를 죽인 사건도 있고, 그리고 황실의 최고 어른을 푸대접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여 오나라에 대한 벌은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황태자 유계가 즉위하고(한경제) 황태자의 총애를 받았던 조조는 삼공 중 하나인 어사대부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어사대부에 오르자마자 경제에게 이렇게 주장하였습니다.

 

 

 

「옛날에 한고조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형제들은 적고 여러 자제들은 아직 어렸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씨를 많이 봉하여, 서자인 도혜왕을 제나라 70여 개 성의 왕이 되게 하셨고, 서동생인 원왕을 초나라 40여 개 성의 왕이 되게 하셨으며, 형의 아들인 비를 오나라 50여 개 성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세 서얼을 왕에 봉하여 천하의 반을 나누어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오왕은 전에 있었던 태자의 일로 틈이 생겨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는 입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 법에 의하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인데, 문제께서 차마 처벌하지 못하시고 궤장을 하사하셨던 것입니다. 은덕이 이토록 두터우니 그는 의당 스스로 허물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욱 교만하게 사람을 능멸하려드는 즉, 산에서는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자들을 이끌어 모아 난을 일으킬 음모를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영토를 삭감해도 모반할 것이며 삭감하지 않아도 모반할 것입니다. 영토를 삭감하면 그 반란의 시기는 빨라지겠지만 화는 작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조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나둘 동성제후들의 힘을 꺾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3년 겨울, 초왕 유교가 입조하였습니다. 조조는 이에 맞추어 초왕 무가 지난해 박태후(한경제의 할머니)의 거상중에 복사에서 몰래 간음하였다고 말하며 그에게 죽음을 내리길 청원하였습니다. 경제는 죽음의 죄를 사해주고 대신 동해군을 깎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세에 발맞추어 오나라의 예장군, 회계군을 깎았습니다. 또 2년 전에 조왕 유수가 지은 죄가 있다고 하여 조나라의 하간군을 깎았으며, 교서왕 유앙이 작위를 팔아먹는 비리를 저질렀다 하여 그의 여섯 개 현을 깎았습니다.

 

 

 

이렇게 조조를 중심으로 조정에서는 동성제후들의 영토를 하나씩 줄여나가고 있었고 이제 그 칼끝은 오왕 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왕 비는 자신에게도 그 칼날이 올 것을 예측하고 중앙정부에 반감이 있는 제후들을 하나둘씩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포함한 교서왕, 초왕, 조왕, 제왕, 치천왕, 교동왕, 제남왕, 제북왕 등 9국의 연합을 성립시키고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킵니다. 당시 오왕 유비의 나이 62세였습니다.

 

 

 

 

[1] 오나라는 합려, 춘신, 오왕 비 등 세 사람이 놀기 좋아하는 천하의 젊은이들을 불러모은 곳이다. 동쪽으로는 바다에서 소금, 장산에서는 구리, 삼강, 오호에서 풍부한 산물이 나와 이득을 본다. - 사기 화식열전

 

초, 월 지역은 땅이 넓고 인구는 적으며, 쌀로 밥을 지어먹고 생선으로 국을 끓여 먹는다. 어떤 곳에서는 밭을 태우는 화전 경작을 하고, 논에 물을 대고 김을 매는 농작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곳에서는 열매와 과일, 조개 등을 사고 팔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하며, 농사 짓기에 좋은 지형이라 식량이 풍부하여 기근이 들 염려가 없다. - 사기 화식열전

 

 

 

※ 출처 : 사기 오왕비열전, 사기 화식열전,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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