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늘vs베복 논쟁 상업성 가르는 기준은? [스포츠서울] DJ DOC의 이하늘이 지난 7일 자신의 콘서트장에서 또다시 ‘미아리복스’ 운운하는 발언을 해 파문이 증폭되고 있다. 이하늘은 이날 “‘미아리복스’를 초대했더라면 붉은 조명에 천막을 씌우고 완전히 그곳 분위기로 만들어줬을 텐데…”라며 비꼬아댔다.(스포츠서울닷컴 9일 오전 10시50분 단독 보도) 법정 문제로까지 비화된 ‘미아리복스’ 사건이 두 달도 안돼 공개석상에서 그대로 되풀이됐다. 처음부터 ‘미아리복스’라는 폭력적인 언어사용만을 두고 사안이 진행되는 바람에 중요한 쟁점이 부각되지 못했다. 미아리복스는 사안의 본질이 아니다. 성폭력성 표현에 대해서는 따로 처분을 내려주면 될 일이고 중요한 건 댄스음악과 힙합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지금 인터넷에서는 DJ DOC가 ‘베복’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과연 베이비복스의 댄스 음악이 DJ DOC의 힙합(힙합적 댄스)보다 저급한가? 결론은 ‘그렇지 않다’다. 댄스하면 상업적 음악이고 힙합하면 저항적 음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온당치 않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어렵게 힙합하는 사람들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DJ DOC는 상업자본으로 음반을 제작해 상업루트를 이용해 홍보하고 상업유통시장에서 음반을 팔고 있다. 신보발표와 때를 같이 해 이슈를 만들어내는 ‘선정성’은 그의 무기다. DJ DOC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상업성과 작품성을 가르는 기준은 뭐냐고. DJ DOC는 음악을 통해 거침없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그들의 직선적인 B급 문화는 패러디의 긍정적 기능처럼 기성 질서에 대한 유쾌한 조롱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질 낮은 저항의 상품화라는 비판에도 직면한다. 욕설과 폭력을 일삼는다고 저항가수가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음악을 하는 이하늘이 투팩의 음악을 차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미아리복스’ ‘섹스가수’라 할 수 있는가? 대중음악에 고전음악을 차용하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DJ DOC도 ‘대한민국 만세’라는 음반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를 차용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차용하면 예술이고 남이 빌리면 얄팍한 상업주의라는 말은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과 같다. 갈등의 골을 헤집고 들어가면 힙합과 댄스 음악계 사이의 해묵은 반목이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 논객 ‘깜악귀’는 이 소동을 아예 ‘일반 가요’와 ‘작가주의 대중음악’ 사이의 충돌이 선정적인 형태로 가시화된 것으로 봤다. 영화에도 상업(주류)영화와 작가영화가 있듯이 대중음악계에도 일반적인 소비음악과는 다른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뮤지션들이 많다. 이런 경향은 록과 힙합에서 두드러진다. 문희준의 록이 가짜 록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록 팬들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작가영화도 상업성을 추구하듯 의식있다고 자부하는 음악인 대다수도 상업성과 연관을 맺는다. 물론 상업성은 잘못된 게 아니다. 기행이나 화장실 유머를 선보이며 10대들의 코 묻은 돈이나 챙기는 일부 가수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 베이비복스가 낫다. 자기 음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얼치기 잣대로 다른 취향의 음악을 깔아뭉개면 안된다. 재즈 칼럼니스트 배영수씨는 “DJ DOC는 댄스음악을 기저로 하지만 흑인음악의 범주 내에 있는 힙합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힙합에 존경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면서 “DJ DOC가 상업적인 의도로 힙합 거장의 곡을 차용한 베이비복스의 야비함에 적어도 태클을 걸 자격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이에 대한 인터넷 논객 조광일씨의 반론도 새겨들을 만하다. “DJ DOC는 힙합의 그림자만을 좇을 뿐이며 자신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 힙합이라는 이름을 도용하고 있을 뿐이다.” 서병기전문기자 미디어다음펌 이번엔 기자가 확실히 베복편에 서고 글을 작정하고 쓴듯한 느낌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