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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 나는 황희(黃喜) 정승이다 (1부)
게시물ID : history_163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57
조회수 : 3073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6/14 21:21:19
역사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라 불리는 황희에 대해 알꺼임.
황희 정승이 청백리로 소문이 났지만 그건 소문 일 뿐임. 왜 청백리인지는 며느리도 잘 모름.​
황희(黃喜. 1363~1452)
개성(開城) 출생. 장수(長水) 황씨(黃氏). 어릴때 초명은 수로(壽老). 김수로 아님. 장수로였음.
자는 구부(懼夫)라는데 뭘 구부려?
아버지는 고려 때 고급관리였음. 그러니까 배경 좋은 집안이라는거임.
출생지가 개성 '가조리' 라고 하는데 이곳은 박포의 난(2차 왕자의 난) 당시 상호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임.
그나저나 궁금한게 왜 황희는 조선 개국공신에 올려지지 못했나 하는거임.​
일설에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몇 년간 은거 했다고 함. 그 사실이 맞다면 이유 그 때문일듯.​
□ 처음 벼슬은 고려말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와 성균관 학관(成均館學官)부터 시작함.
물론 황희 정승께서는 과거 문과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사람임.​
□ 황희에게는 아들 셋과 딸이 있었슴.
아들은 황치신(黃致身), 황보신(黃保身), 황수신(黃守身)이었는데 치신과 보신은 별로 좋은 관리는 아니었던 것 같음.
여러가지 비리로 얼룩잔 모습이 자주 보임. 그리고 사위도 있었는데 이 사람도 만만치 않음.
또 황중생(黃仲生)이란 황희의 첩실 자식이 있었음. 나중에 도둑질 하다가 가문에서 버림 받은 가장 불쌍한 캐릭터임.
황희와 아들, 사위의 행적을 같이 놓고 보면  뭔가 좀 많이 구림.
 
 
□ 조선 태조 때 부터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 세자의 선생님. 정7품.
예문 춘추관(藝文春秋館), 사헌 감찰(司憲監察). 정6품. 대검찰청 검사 정도임. 막강 파워.
우습유(右拾遺). 정 6품. (임금의 정치비서관 정도됨). 그러니까 경력은 거의 중앙의 요직만 거치는 중이라고 보면 됨.
□ 1397년 11월 습유(拾遺)직에서 면직됨.
임금이 궁궐 짓는데 필수 관리인 선공감(繕工監) 관리인 정난(鄭蘭)의 복직서류에 황희가 결재를 하지 않음.
태조 임금이 짜증 내시면 집에 가라!고 하셨음.
  ​
□ 집으로 쫓겨가서 놀고 먹던 황희가 다시 변방으로 쫓겨남. 황희 정승 최초의 큰위기임.
1398년 7월. 몇몇 친한 관리들과 사석에서 태조 이성계의 할아버지 묘가 화려 하다고 떠들다가 걸린 모양임.
함경도 경원의 학교 선생님으로 쫓겨남.(경원 교수관, 慶源敎授官) 종6품. 지옥 같은 변방으로 좌천 되어 버림.
        
□ 1399년 사간원 우보궐로 다시 복직됨. 개국 초기라 조금이라도 글을 알고 개국 초기 터전을 마련 할 만한 위치의 관료들은 이유 불문 대거 등용 되던 시절임.
우보궐은 정 5품임. 다시 in 서울. 그런데 그 해 9월, 소속 부서 직원들과 단체로 파면됨.
사헌부 직원 한 명이 탄핵 당했는데 태조 임금이 용서를 하고 다시 거론 하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말 안듣고 다시 탄핵한 죄임.
이때 세종 대마왕 시절 의정부 투톱이 되는 ​허조(許稠)와 사이 좋게 파면됨.
 
 
□ 1401년 (태종1년) 승추부(承樞府) 경력(經歷)으로 다시 복직됨. 종4품. (지금의 국방부 파견 문관 정도라고 할까)
이때부터는 입조심도 하고 승승장구. 아마도 태종 임금이랑 코드가 잘 맞았나봄.​
1404년 10월 사간원 우사간대부. 정 3품.
1405년 승정원 좌부대언. 정 3품.
주로 남들 탄핵하는 자리에 등용됨. 물론 그만큼 공부도 잘했으니까 그런것이겠지만 처세술도 뛰어나셨나 봄.
함경도로 문책성 인사 발령 1회 말고는 줄곧 in 서울임.
□ 1405년 12월 드디어 임금의 비서실장인 승정원 지신사(承政院知申事)로 발령 받음. 정 3품. 
같은 정 3품이지만 지신사 자리는 사간원의 수석자리임.
1409년 가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종 2품.
이제 의정부쪽으로 진출하고 육조 각 부서를 두루두루 거치다 보면 정승이 되는 엘리트 코스.
1409년 12월 형조판서. 정2품. (법무부장관)
1410년 2월(태종10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정2품.
1410년 7월 사헌부 대사헌. 종 2품. (감사원장)
1411년 7월 병조판서. 정 2품. (국방부장관)
1413년 4월 예조판서, 정 2품. (문화관광부 장관 정도). 알짜베기 요직만 거침.
계급 뒤에 품계(정, 종 몇 품)는 개국 초기라 조선 중, 후기와는 다를수 있음. ​
1414년 2월 병으로 사직함.
1414년 6월 다시 예조판서로 복귀. 
□ 황희의 아들 ​황치신이 공안부 부승에 음직으로 발령 받음. 정 8품.
음직(蔭職), 아버지 황희의 배경으로 인하여 시험 안치고 벼슬 받는 특채.
□ 황희, 1415년 5월(태종15년) 이조판서. 정 2품. (행정자치부 장관 정도). 판서 자리 중 가장 수석 자리하 할 수 있음.
□ 황희의 아들 황치신.
통례문 봉예랑, 종 6품직을 받았다가 얼마뒤 정 6품 사헌부 감찰의 파워풀한 직책으러 옮김.
아들도 승승장구 중.
□ 황희. 1415년 6월 이조판서에서 파직됨.
노비송사 문제를 처리 하다가 임금이 시킨데로 안하고 딴짓 하다가 파면됨.
이때 태종 임금에게, ​“오랫동안 가물며 비가 오지 않으니, 내가 덕이 없이 위[上]에 있어서인가? 신하들이 서로 속여서 이 〈재앙을〉 부른 것인가?”
“이 노비에 대한 일은 일찍이 의논에 참여하였는데, 어찌하여 정밀히 살피지 못하고 육조와 함께 통함이 이와 같았는가? 어찌 사슴[鹿]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한 자와 다르다 하겠느냐?”등등의 잔소리를 다 들어먹었다고 함.
□ 황희, 1415년 7월 . 1개월 후 복직.
복직된 자리가 좀 웃김.
태종 임금이 황희 버르작머리 좀 고친다고 숭례문 안의 행랑이 수해 때문에 무너딘 것을 고치도록 행랑도감제조(궁궐 보수 감독관)의 자리를 줌. 행랑도 고치고 황희의 버릇도 고치고...
(※ 제조 : 명예,임시직 2품에 준한 대우, 이때 행랑제조의 임무는 궁궐 수해복구 건설 대책위원장임)
이 보수 공사에 화통군(火㷁軍) 4백 명, 사재감(司宰監) 수군 1백 명, 의금부의 번상(番上)한 도부외(都府外) 50명과 보충군(補充軍) 50명과 선공감(繕工監)의 목수(木手), 석수(石手),노야장(爐冶匠) 등과 출번(出番)한 근장(近仗)으로 충당하였다고 함.
인원규모로 보면 큰 공사는 아님.
​□ 1개월 뒤인 1427년 8월.
아무래도 황희 정도의 지식을 가진​ 신하들이 개국 초기라 엄청나게 수요가 딸린 모양임.
관청의 노비 관련 업무 부서에 제조로 선발되는 황희.​
□ 다시 승진 레이스 시작 하나 봄.
1415년 11월 의정부참찬. 정2품.(의정부에서 찬성사 바로 밑 no.2의 자리임.)
1415년 12월 호조판서, 정2품.(기획 예산 재정 경제 담당장관)
1416년 11월 공조판서, 정2품.(건설교통부 정도)
슬슬 황희에게 짜증이 나기 시작한 태종 임금은 황희의 얼굴을 매일 보기 싫었다고 함.​
1417년 2월 평안도 도순문사(平安道都巡問使) 겸 평양 윤(平壤尹). 종2품.(평양 윤 : 평양 시장)으로 발령 내버림.
1417년 12월 형조판서, 정2품.
다시 in 한양이지만 태종 임금이 한달만에 사무실이 먼 곳인 한성부로 자리를 옮겨버림.
1418년 1월 판한성부사, 정2품.(한양의 명예특병시장. 실제 한양특별시장은 한성부 윤 임.)
□ 승승장구 하던 황희. 1418년 5월 관직에서 완전히 쫓겨남. 전라도 남원으로 귀양가게 되는 크리티컬 파워데미지 작렬함.
새옹지마. 호사다마. 뭐 그런건가?
세자 양녕의 품행제로 사건들로 인하여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세종)을 세자로 하려는 태종 임금에게 계속 반대함.
결국 양녕은 폐세자가 되고 그를 옹호하던 많은 관료들이 짤림.
황희를 내치면서 태종 임금이 하신 말씀들,
​"경(卿. 황희)은 손으로써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하기를, ‘구종수(具宗秀)의 한 짓은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세자의 잘못이라면 나이가 어린 탓입니다. 나이가 어린 탓입니다.’고 하여, 이와 같이 말한 것이 두 번이었다. 세자를 감싸 주어 말하기를 꺼리고 사연(辭緣)이 공정(公正)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말이 없었으니, 그것은 필시 지신사(知申事)였을 때 민씨(閔氏)와 원수가 되었으므로, 세자에게 아부하려는 계책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태종 임금께서 물 한잔 마시고 다시 잔소리 시전...​
​"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공조 판서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간 것은 너의 간사함을 미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임기가 차자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육조(六曹)는 조계(朝啓)의 임무가 있으므로, 내가 너의 얼굴을 보기를 싫어하여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임명한 것을 너는 어찌 알지 못한는가? 너의 죄를 마땅히 법대로 처치하여야 하나, 내가 오히려 차마 시행하지 못하여 논죄하지 않는 것이다. 너는 전리(田里)로 물러가 살되, 임의대로 거주하여 종신토록 어미를 봉양(奉養)하도록 하라.”
결국 태종 임금한테 완전히 눈 밖에 나가버림.
황희 정승의 최대 위기 중의 위기임.
반응 좋으면 2부 또 올려 드림.
2부에서는 세종 대마왕과 펼치는 치열한 생존의 두뇌 게임이 선보임. 황희 대감의 아들들이 사고 치는 장면도 재미남.
지난번에 나는 지신사 안숭선이다 편이 눈부시도록 푸르게 시린 가을 하늘처럼 차가운 반응이었음.
또 안숭선이라는 인물이 그리 대중적이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던듯. 이거도 좀 읽어 주셨으면 함, 굽신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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