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조중동 해석방식에 대한 도전
게시물ID : humorbest_1635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음의눈
추천 : 66/7
조회수 : 1076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7/04/12 11:48:40
원본글 작성시간 : 2007/04/12 09:52:58
***이 글은 서프라이즈 토론방이 '본적'이고, 다음 블로그 '그대로의 죽음'이 '현거주지'인데,이것을 제가 다시 오유 게시판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것 저것을 생각나게 하는 내용인 것 같아, 오유 여러분들께서 한 번 읽어보십사하고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조중동 해석방식에 대한 도전 
 
 
 
 
  
 
중세 유럽은 성직자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 성직자 그룹은 ‘세상(성서)에 대한 해석의 권위’를 바탕으로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였다. 

카톨릭이 득세한 이후, 신권정치 또는 성직자 계급에 의한 권력 독점은 사실 그 배경이 매우 단순하다.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 그로부터 권력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중세 사람들의 세계관인 성서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위. 

중요한 것은 당시 바이블이 라틴어로 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틴어는 성직자 그룹 등 일부 특권적 교육을 받은 계급 외에는 독해 그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물며 성서의 해석에랴.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을,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의 입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를 ‘섹시’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이 될 수도 있다. 

라틴어로 된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성직자 그룹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 즉 성직자들과 ‘무지몽매’한 신도그룹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교육과 정보가 특정 세력에 독점된다는 것, 이로 인해 계급간 소통이 두절된다는 사실, 바로 이것이 권력의 핵심적 원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나누는 경계다. “분할하여 통치하라!” 

자기들만이 성서를 해석해야만 하고, 그것도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특권을 누려야만 한다는 것, 이 권력의 원천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피를 부르는 종교개혁. 

상황이 이러니, 이 권력을 타파하는 법 또한 의외로 간단하다. 언어를 소통시키는 것, 교육의 특권을 해체하고 정보의 독점을 깨는 것, 라틴어를 해체하는 것, 성서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 

1591년 마르틴 루터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이를 완수해냈다. 라틴어 성서를 민중들이 쓰는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해 낸 것이다. 그리고 주창한다. “성서로 돌아가라!” 루터는, 종교의 권위를,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에게서 성서 자체로 이양했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은 독일어 성서 보급에, 성서로의 권력 이양에 기름을 붓는다. 

포이에르바하는 중세에 마지막 칼을 꽂는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 떠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 따라 신을 만들었다” 성직자 그룹은 해석의 근거마저 빼앗겨 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누군가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 스스로 판단이 가능해진 것이다. 수동적인 ‘말씀의 수용자’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말씀의 뜻을 새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민계급의 탄생, 정교 분리와 정교 모두에서 제대로 된 권위 회복. 

(政)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敎) 모든 권위는 성서로부터 나온다. 이후 사태는 일사천리다. 라틴어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독일어, 영어, 불어 등 민족언어, 민족문학이 꽃을 피운다. 데카르트가 출현하며 백과사전이 등장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시민계급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다. 

(영국에서 가장 먼저 대의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영국사람들이 특별히 ‘민주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은 바다로 분리되어 있어 대륙 카톨릭의 영향이 덜했으며, 그에 따라 시민계급의 등장이 빨랐다. 산업혁명의 총아-증기기관과 철도를 가장 먼저 만들어냈다. 시민계급(자본)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장 일찍이 정착되었다) 

시민계급 시대에는 누가 해석을 담당하나? 자본이다. 기독교인의 ‘소명’으로 자본주의를 해석하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대의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신문들...이것들은 모두 자본을 대변한다.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옹호하고 권장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는 과감히 한글 성서를 들고 나와 어려운 한자로 가득한 유교경전을 대체한다. 초기 기독교에서 상층과 하층의 언어는 같았다. 소통이 이루어졌다. 

언어가 해방되었다. 권력이 자연스레 양반계급에서 기독교로 이동한다. 기독교는 점차 수구화되고 지배층의 권력 수단이 되어간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바이블을 버린지 오래다. 교회는 기업화되고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성서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권력과 권위를 가진다. 

수구화된 이들 지배권력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을 남북으로 나누고 남쪽도 동서로 나눈다. 이념으로 분열하여 서로 갈등한다. 친미와 반미로 갈라진다. 정치와 민생을 구분한다. 언어는 왜곡되고 소통은 막힌다. 보수 언론은 이런 프레임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경제를 위해 독재는 불가피하다”, “대북 지원은 퍼주기다”, “우리 군대는 스스로의 지휘능력이 없다” 등등 

한국에도 시민계급이 성장하였다. 1987년 이후 이들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은 반독재라는 안티테제다. 시민들은 수구(신문)들이 제시하는 해석을 거부하고 스스로 해석해 냈다. 두 번의 대선에서 연이은 승리. 

‘탄핵의 추억’으로 멸문지화 지경에 이르자, 수구들은 불가피하게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는 ‘척’한다. 이를테면 천막 쇼다. 여기에 열린우리당의 뻘짓이 더해져 딴나라당은 재보선에서 연전연승한다. 반독재로만 세상을 해석했던 시민계급이 그 한계를 드러낸다. 다시 조중동의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수구언론의 해석에 의하면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다. 노무현정신은 조중동에게는 그들의 해석 방식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조중동은 대통령의 말투에 시비를 건다. 노무현의 언어는 근엄하지도 난해하지도 않다. 그의 말은 달리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우아’하지 않다. 

마치 루터가 쉬운 독일어 성서를 번역했듯이, 대통령은 이해하기 쉬운 말을 쓴다. 사례로 들어가면서 설명한다. 때로는 투박한 단어도 튀어나온다. 대통령과 자갈치 시장 아줌씨들은 똑 같은 언어를 쓴다. 소통이 이루어진다. 

조중동 프레임은 갈등, 왜곡과 분열이다. 이게 그들 권력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매일 엄청나게 정보가 쏟아지자, 이에 대한 해석을 또다시 조중동에 의존한다. 80년대식 독재 대 민주화 시대가 아니다. 그때는 해석이 필요 없었다. 지금의 ‘복잡한’ 현상은 누군가의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기존의 익숙한 해석의 틀에 의존하거나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생각 없이 조중동을 펴든다. 

수구신문들은 해석의 권위를 독점하고자 한다. 자신들만이 가진 교육, 정보,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자 한다. 오피니언 리더층과 일반 독자들의 언어는 서로 달라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에게 전달하려는 말은 조중동의 언어로 가공되어 걸러져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과 소통하느냐 아니면 조중동을 거치느냐 하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를 낳는다. 당연히 싸움은 여기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국민들이 소통하게 되면 조중동은 권력을 상실한다. 

조중동은 언어가 소통되지 않은 만큼 권력을 누리게 된다. 정보 및 언어의 비대칭. 대통령 대신 자기들이 국민들에 해석해주고자 한다. 자기들만의 언어로 해석하겠다고 한다. 세상을 해석하는 언어는 자신들만이 제시하여야 한다. “어딜 감히 상고출신이!” 

대통령은 ‘격’을 파괴해서라도 국민과 직접 소통하고자 한다. 정보, 교육을 공유하고자 한다. 해석의 권위를 해체한다. 

최근 관심 받고 있는 ‘진보’들도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과 그 언어가 수구들과 같다. 극단적 이념 대결, 세상은 보수와 진보로만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 극단적 증오, 반대의 연속. 세상은 오직 흑 아니면 백이다. 

‘진보출신’ 대통령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민노류의 진짜 모습과 권력의 밑천이 드러난다. 민노의 언어는 ‘거리의 투쟁’이며 이게 그들의 권력 밑천이다. 선명성은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이다. 이들에게는 노무현도 영락없는 독재자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진보들의 해석 방식은 20년 전 그대로다. 

딴나라와 민노류가 같이 손잡고 대통령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가 확실해졌다. 




ⓒ 초모룽마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