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보수우익 정치세력의 뿌리는 한민당이다. 한민당의 주류는 일제에 협력한 정치인, 지주, 기업인 등이었다. 그래서 한민당이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고 친일파 숙청문제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한민당이 해방정국에서 처음부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해방을 맞아, 역사의 단죄를 염려해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한민당을 살려낸 것은 미군정이다. 일본의 식민통치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은 미군은 오로지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중용했고, 자연스럽게 이들이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한민당은 이승만과 손을 잡았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까닭에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던 이승만이 친일파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민당이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게 되는 것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한민당을 푸대접한 다음부터이다.
진보적 정치세력은 이 과정에서 철저하게 탄압 받았다.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내세웠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한반도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미국은 반공주의적인 이승만의 최대 후원자였다. 이로써 이승만 체제는 반공규율사회가 되었다. 남북분단과 대치, 한국전쟁은 적색혐오증이 자라나는 좋은 토양이었다. 해방후 사상통제를 통한 지배는 이어졌다. 민족적 기반없이 오로지 미국의 지지만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끌어들이고, 반공이데올로기를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 반공이데올로기는 분단체제를 강화하고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민족통일의 과제를 억눌렀다. 220.70.52.177 2005/07/31 x
8 ·15 직후 친일경력 지주 기득권층 중심 조직의 정당. 약칭 한민당. 1945년 9월 서울 천도교기념관에서 창당대회를 가졌다. 처음에는 여운형(呂運亨)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대항하는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보수정당인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국민대회준비회·충칭[重慶]임시정부·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등이 참여하였다. 주도인물은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조병옥(趙炳玉)·김도연(金度演)·윤보선·백남훈(白南薰) 등이었다. 정강으로는 자주독립국가 완성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기약 등을 채택하였다.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지지하던 종전의 태도를 바꿔 이승만(李承晩) 남한단독정부수립운동에 동조 대한민국수립 주요추진세력이 되었다. 48년 5·10 국회의원총선거에서 198석 중 29석만을 확보하였으며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토대로 헌법제정을 추진하는 과정과 초대조각인선 과정에서 이승만과의 심각한 대립을 초래하였다. 당세가 위축되자 49년 1월 27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申翼熙),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등과 규합하여 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새출발하였다. 한민당은 정강에서 보여지는 민주적·진보적인 모습과는 달리 농지개혁에서의 <유상매입유상분배> 원칙 고수, <반민족행위처벌법> 처리과정의 미온적 태도, 46년 좌우합작운동과 48년 남북협상에 부정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전형적인 기득권수구정당으로 한국정당사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