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 소극장무대의 주역은 다름아닌 자그마한 키에(하지만 목청은 누구 못지 않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김광석이었다(공연을 마친 후 자기 딸의 돌이라며 떡을 나누어주며 지었던 그의 미소···). 그가 3집과 4집 사이 발표한 비정규 앨범(베스트 앨범의 성격도 띄며)인 <다시 부리기 1>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동물원 시절의 곡, 솔로 시절의 곡, 그리고 미발표곡들이 원곡과는 다른 편곡으로 실려있다(일부는 라이브 버전으로). 이 앨범에는 최백호의 <입영전야> 이후 입대하는 친구에게 불러주는 노래이자 훈련소에서 이등병도 되지 못한 훈련병들의 집단눈물사태를 유발하곤 하는 <이등병의 편지>와 아직 뜨기 이전의 안치환과 공연할 때 듀엣으로 부르곤 했던 <나무>, 대학가에서 오랫동안 불리었던 <그루터기>, <광야에서> 등의 새로운 곡과 <흐린 가을에 편지를 써>, <거리에서> 등의 동물원 시절의 곡이 단순한 악기 구성의 간결한 편곡으로 실려 있다. (김민규)
52. 산울림 3집 (1978/서라벌레코드) [김창완(g, v), 김창훈(b, v), 김창익(d)]
우리 나라에 신중현과 엽전들이 록이라는 형식을 도입했다는 이유 때문에 산울림에게 '한국 록의 선각자'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신중현이 록의 원형질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산울림의 3형제들은 끝없는 상상력과 자유로운 정신으로 이미 20년 전에 한국이라는 땅에서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싸이키델릭, 펑크, 메틀 등 갖가지 음악의 형식들을 선보였다.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이들 3형제의 우연한 시도인 <아니 벌써>로 당시 4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대중음악계를 향해 포문을 연 산울림은 2집에서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변화, 혹은 진화의 모습을 예감케 하더니 3집에서는 한 걸음이 아닌 훌쩍 건너뛴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철저한 상업적 패배로 끝났지만 3집에서 보여준 산울림의 모습은 자신들의 색깔을 가지면서 끝없는 실험을 한다는, 어쩌면 모든 음악인들의 지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화두에 대한 훌륭한 전범으로 기억된다. 이것이 3집이 산울림의 작품 중 최고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최선으로 기억되는 이유이며, 그들의 목에 감히 '한국 록의 선각자'라는 화환을 걸어주는 이유다. (황정)
53. 동서남북 1집 (1980/서라벌레코드) [박호준(g), 이태열(b), 김득권(d), 이동훈(key), 김광민(key), 김준응(v)]
1980년에 발매되었다가 1988년에 재발매되고 1988년 시완에서 또 다시 재발매되었으나 인구에 회자되던 그 전설성만큼 관심받지 못하는 앨범이다. 한동안 <나비>라는 한 곡과 그 음반의 희귀성 때문에 마치 전설 속의 밴드라기보다는 프로그레시브의 가능성을 가졌던 밴드였다. 타이틀(은 아니었겠지만)격인 <하나가 되어요>라는 곡은 보통 가요에 버금갈 뿐이지만 전체적으로 풋풋하면서 세련됐더라면 그럴 수도 있는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어쨌든 <나비>라는 프로그레시브적 접근을 취한 곡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재발매로 인해 이들의 정체는 밝혀졌겠지만 그 촌스러운 재킷이 구매욕을 상실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특이한 사항을 들자면 양병집이 프로듀서를 했다는 것과 일요예술무대를 진행하는 김광민이 있었다는 것. (한유선)
"우리들의 어린 시절 이미 지나갔고, 어른이란 이름으로 힘든 직장 갖고, 생활하면서 이미 뽀얀 얼굴은 갔고, 그런 걸 같고 고생이라고 말하고, 고지식한 생각으로 남을 무시하고, 동심을 가진 어른들을 이상하다하고, 동심을 가진 어른들을 이상하다하고, 전자게임, 프라모델, 만활 싫어하고, 그게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하고, 그런 사람을 보며 나는 답답하고, 얼키고, 설키고, 꼬이고, 막히고./어렵게 생각하면 힘든 세상이지만 행복은 그리 먼 게 아니야.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이미 넌 행복한 거야"( with H2O)는 랩에서 라임을 따지는 이현도의 관심사를 보여준 명곡이다. 그리고 데뷔 음반과 같은 해에 발표된 이 음반은 그들의 진일보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또한 이런 발전적인 모습은 1995년 Force DEUX 때까지 계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진정으로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스스로가 음악감독이 되어서 최상의 음반들을 계속적으로 내놓은 경우는 서태지와 이현도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다른 점은 서태지의 음반은 나올 때마다 열광적인 미디어의 추적으로 그의 작업결과물이 낱낱이 해부되었지만, 이현도와 듀스는 그냥 댄스 뮤지션이었다는 것뿐. 그러나 장난 아닌 밀도를 가진 이현도의 음악에서 우리는 천재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 음반은 그러한 시발점이었다. (박준흠)
55. 시나위 1집 (1986/서라벌레코드) [신대철(g), 임재범(v), 박영배(b), 강종수(d), 김형준(key)]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헤비메틀의 출발은 참으로 두터운 돛을 달고 시작되었다. 바로 이 앨범 때문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미안할 정도로 이들의 첫 앨범은 정도를 달린다.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사운드가 전체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그것의 운용방식이 (전통적인 헤비메틀의 관습적인) '리프'와 '솔로'로 구성되며 고음역이 강조되는 보컬의 멜로디 라인은 그것을 구현한 것을 넘어 세련된 창작의 경지에 이르렀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는 앞서 말한 대로 헤비메틀이 지녀야 할 이디엄을 모두 갖춰 제대로 이 장르를 소개할 수 있는 차원을 뛰어넘는 존재감을 지닌 넘버다. <아틀란티스의 굼>과 같은 곡은 자칫 장황해지기 쉬운 이 장르의 스타일을 잘 정리해 낸 수작이다. 보컬을 맡지 않은 기타리스트가 프론트맨이 되는 록밴드의 규율을 잘 지켜낸 것도 분명 주목해야 할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앨범이 '임재범 버전'과 '김종서 버전'의 두 가지 저번이 존재하는 것은 콜렉터의 아이템으로 더욱 효과만점인 부분이기도 하다. (조원희)
56. 안치환 Confession (1993/킹레코드)
민중가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노래운동가들이 합법음반을 발표하고 또한 그 음반들이 어느 정도 상업적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도 힘든 일이다. 집회를 위한 선동가의 성격이 짙었던 80년대 민중가요들이 이제는 활동공간이 한계를 벗어나 햇볕 아래로 나오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멜로디와의 타협이 필요하다. 안치환은 이러한 경우의 성공적인 사례인 동시에 민중가요를 '구호'가 아닌 '노래'로서의 관점에서 한 단계 끌어올린 가수다. 특히 그의 3번째 작업인 은 류시화, 정호승, 나희덕 그리고 김남주의 시와 언제나 현실의 문제를 직유가 아닌 은유로서 다루어왔던 안치환의 가사 쓰기로 인해 멜로디의 서정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 가사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대학가만을 맴돌던 민중가요가 이제는 그 지지기반을 넓혀가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그의 노래들은 그의 개인적인 노래에 대한 진화와 함께 이 한 장의 음반을 시작으로 한 그의 뒤이은 후속작들의 곳곳에서 그 풀뿌리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은 90년대 제도권 진보성향의 노래가 울리는 제도권 시장에서의 첫 번째 자립선언의 결과물이다. (황정)
처음부터 삐삐밴드는 대중친화적 요소를 많이 첨가한 팬시상품적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2번째 앨범을 내면서 그보다는 그들의 '음악적 의도'에 더욱 노력을 쏟았으며 결국 이 앨범에선 밴드의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그들의 변모된 모습을 세상에 알렸다. 그들의 '카메라 모욕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차트에서의 성적이 매우 높았을 만했던 <바보버스>는 한국 대중음악의 '패턴'을 살펴볼 때 모욕사건 자체보다 더욱 <사건>에 가까운 음악적 파격을 보였으며, 이전의 상업적 성공에 조금도 경도되지 않은 듯한 그들의 태도는 <조금만 더>와 <계단> 등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전 앨범들에서의 특징이었던 '자의식 과잉'의 가사들이나 '지나친 장난기'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가운데, <12시>의 서늘하며 날카로운 서정성은 이들의 앨범을 더욱 완벽하게 이끌고 있다. 특정한 장르에 이끌리지 않는 '삐삐' 프로젝트들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으며 동시에 앨범 제목처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편도승차권이기도 한 앨범이다. (조원희)
58. 이정선 30대 (1985/한국음반)
이정선은 초기에는 해바라기 등의 활동을 통해 모던 포크풍의 음악적 성향을 보이다가 점점 블루스적 경향의 음악을 하기 시작했고, 솔로 활동과 신촌블루스의 활동을 통해 자기만의 블루스 기타 플레이를 선보였던 음악인이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음반 중에서 초기작들은 포크 음악의 색이 짙고 후반기에 작품들은 점차 블루스적 체취가 나는데, <30대>는 이러한 블루스적 완성미가 최고도에 달한 음반이다. 그의 뛰어난 어쿠스틱 기타 솜씨가 느껴지는 <우연히>, 한영애가 불러 더 유명해진 <건널 수 없는 강>, 그의 특유의 블루지한 느낌이 나는 <울지 않는 소녀>, <바닷가에 선들>등의 수록곡들은 교본이 될 정도로 일가견을 이룬 그의 기타가 빛을 발하는 곡이다. 그는 블루스의 기본 12마디 코드 진행에서 약간의 변형(리듬에 변형을 준다든지 등등)으로 그만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바로 그의 음악의 매력이 담겨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정선은 해바라기, 신촌블루스에서의 활동을 통해 블루스 기타를 가장 독창적으로 가요에 접목 함으로써 다양한 가요의 장르가 공존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 (황정)
59. 김광석 4집 (1994/킹레코드)
언젠가 대학교의 콘서트에서 그가 당시 방송순위 1~2위를 다투던 <사랑했지만>을 불러달라는 팬들의 아우성을 거절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무척 난감해 하며 "그 곡은 잘못 불렀다고 생각해요. 제가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은 그런 게 아닙니다"라며 그 원성(?)을 끝내 외면했다. 그는 이미 <나의 노래>를 발표한 3집에서부터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의식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모두가 투쟁하던 80년대에 연가를 부르던 (그리하여 노·찾·사 출신의 변절이라는 평가를 듣던) 그는 이제 더 이상 연가를 부르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90년대에 오히려 <일어나>, <자유롭게>가 담긴 이 앨범을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그 곡들보다 <사랑했지만>으로 규정되는 그의 예전 모습들을 더 원하고 있었다. 세상은 너무 빨리 바뀌어 있었다. 많은 진지한 스타들이 그러하듯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박제시키려는 팬들의 요구에 괴로워했고, 그들이 밟은 전철을 따라 요절로 자신의 생을 마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자살한 한 아이돌 스타에게 초점을 맞춘 언론과 대중은 죽은 그를 두 번 외면했다. 커트 코베인을 매년 추모하지만 그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음악인들, 유재하 트리뷰트는 만들어도 김광석 트리뷰트는 만들지 않는 음악인들도 그 공범에 속할지 모른다. (신승렬)
60. VARIOUS ARTISTS A Tribute To 신중현 (1997/서울음반) [강산에, 시나위, 윤도현밴드, 이중산, 봄·여름·가을·겨울, 퀘스천스, 이은미,복숭아,사랑과 평화, 김광민, 정원영·한상원, 한영애, 김목경, 논 피그]
신중현은 60·70년대의 척박한 대중음악계에서 최초로 아티스트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사이키델릭 록, 소울, 브래스 록, 하드 록 등을 자신의 다양한 음악세계에 흡수하여 '신중현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산울림 이전 '한국 록'과 동격의 의미였고, 말 그대로 그는 한국 록의 역사이자 산증인이 되었다. 또한 '신중현 사단'을 이끌었던 장본인으로서 자신의 보컬 역량에 문제가 있어서였겠지만 당대의 개성 있는 보컬리스트(박인수, 김정미, 장현 등)를 발굴하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라이브와 그가 발굴한 가수들의 음반에서 보여준 연주만큼 뛰어난 자신의 음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본 음반은 그의 노래들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점에서 그에게 영향받은 뮤지션들이 그의 대표곡들을 리메이크하여 2장의 CD에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미련>, 이은미가 부른 <봄비>, 정원영·한상원이 연주한 <석양> 그리고 참가자를 밝히지 않은 <미인>이 압권인 이 음반은 그 자신이 부른 노래보다는 다른 가수들이 부른 그의 노래가 훨씬 빛남을 볼 수가 있다.(이는 밥 딜런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음반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같다) (박준흠)
61. 삐삐밴드 문화혁명 (1995/송/디지털 미디어) [박현준(g, key, d), 강기영(b, key, g), 이윤정(v)] 안녕하세요, 삐삐밴드입니다. 그렇지요. 저희 중 현준이를 빼곤 지조 없이 지금 테크노 한다고 설치고 다지죠. 윤정이는 음악도 모르는 게 소리만 빽빽댄다고 욕도 먹었죠. "딸기가 좋아/우리집 강아지는 멍멍멍" 따위 가사로 신성한 록을 모독한다고 어쩌구저쩌구 하질 않나, TV에서 개그 한다고 욕하질 않나 또 나중에는 저희가 TV에서 반항했다고 또 뭐라고 하질 않나··· 참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한국에서 음악 하려먼 한 가지만 들입다 파야 하구, TV는 절대 나오지 말구, 보컬은 반드시 보컬 학원 수료한 언더그라운드 출신을 쓰고, 가사는 저항성 넘치게 진지하게 쓰고··· 이렇게 해야 욕 안 먹고 음악 할 수 있어요. 근데 저희가 먼저 몸담았던 시나위 출신 어느 후배 음악인은 이 반대로 해도 욕 별로 안 먹고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참, 알다가도 모를 게 대중이고 매니아에요. 아, 또 이런 말하면 음악 듣는 이들을 얕본다고 욕먹겠죠? 그만할게요. 잠깐, 그렇지만 이 한마디는 꼭 해야 될 것 같아서요. 그렇게 엄숙한 표정하지 말고 그냥 들어요. "딸기가 조오아아~!" (신승렬)
62. 조동익 동경 (1994/킹레코드)
조동익의 노래를 들으면 마치 공선옥의 소설 <시절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 버린 70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들이 느낄 수 있는 개발과 향수가 공존하던 거리에서의 유년의 기억과 때로는 술에 취한 모습으로 그때를 '동경'하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는 성년의 모습은 조동익의 노래 곳곳에 상쾌한 내음의 송진처럼 배어 있다. 이병우와 함께 한 어떤날의 2장의 음반 이후 오랜 침묵 끝에 자신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려주는 조동익의 첫 음반은 80~90년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베이스 세션맨과 걸출한 작/편곡자로서의 그의 모습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추억담들을 타인과 공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이라는 매개를 택한 한 음유시인의 조용한, 그러나 뚜렷한 독백이다. 그의 노래 속 주옥같은 시어들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절한 휴식을 두면서 연주되는 그와 동료들의 연주와 함께 90년대 최고의 자기완성적인 음반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뛰어놀다 들어와 찬물에 밥을 팍팍 말아 먹고는 다시 뛰어나가 놀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동경'하게 하는 조동익의 음악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는 무르익은 음유시인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황정)
63. 봄·여름·가을·겨울 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1989/서라벌레코드)
자신들만의 색을 확고히 지키면서 언제나 새로운 사운드적 실험을 하는 그룹은 과연 몇 팀이나 될까. 리더 김종진의 독특하면서 매력적인 보컬, 화려한 세션진을 통한 뛰어난 연주력으로 대표되는, 80년대 최고의 그룹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최고의 역작인 본 2집은 연주력과 사운드적인 구현에 있어서 아직도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기 힘든 앨범이다. 그룹 사랑과 평화와 함께 가장 독특하고 맛깔스러운 연주를 해내는 팀으로 기억되는 김종진/전태관은 놀라움을 안겨준 1집에 이어 2집에서 그 창조적인 연주력의 절정을 선보인다. 송홍섭, 한충완 등으로 이어지는 세션도 세션이지만 <어떤이의 꿈>, <못다한 내 마음을>에서 느껴지는 리더 김종진의 유니크한 기타연주는 카리스마적인 그의 보컬만큼이나 중요도를 가진다. 치밀하게 계획되어지고, 앨범에 사용되는 하나하나의 테크닉이 정교하게 연구되어지고, 사운드적으로 철저하게 실험되어져 탄생된 듯한 느낌을 주는 본 앨범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튜디오 세션의 최고작이다. (김영대)
64. 마그마 1집 (1981/힛트레코드) [조하문(g, v), 김광현(g), 문영식(d)]
마그마는 조하문(베이스, 보컬), 김광현(기타), 문영식(드럼)으로 구성된 하드 록 그룹이었고 박두진의 시를 개시한 <해야>로 1980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여하여 은상을 받았다. 당시 대학가요제에 나온 록 그룹들 중에서 마그마와 같이 헤비한 음악을 했던 그룹은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아름다운 곳>, <잊혀진 사랑> 같은 헤비한 기타 연주가 담긴 곡들은 80년대 초반에는 작은거인 2집 이외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만약 국내에서 헤비한 록 사운드를 듣고 싶었다면 안타깝지만 1986년 시나위 1집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심야라디오의 리퀘스트곡이기도 했던 <잊혀진 사랑>의 원제는 <4차원의 세계>였는데 심의에 걸림으로써 <잊혀진 사람>으로 개작되었고, 앨범 프린트 미스로 <잊혀진 사랑>이 되었다고 한다. 뛰어난 록 보컬리스트로도 평가받았던 조하문은 이후 솔로로 전향하여 록 발라드 지향의 가수가 되었다. (박준흠)
65. 김수철 1집 (1983/신세계음향)
당대의 히트곡 <못다 핀 꽃 한송이>로 시작하여 <정녕 그대를>, <별리>를 지나 <내일>까지 일련의 애상적 발라드는 음반 제작자들의 신주단지, 애절한 이별 노래의 저주받을 '국내 취향'의 전범이 될 법하다. 물론 작은거인에서 하드 록의 한 경지에 올라섰던 김수철의 작품들은 유통기한 3개월짜리 대량생산 복제품들과는 견줄 수 없는 품위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애이불상(슬프되 가슴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즉 감상적이지 않다)의 미덕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슬픔의 승화, 상처를 스스로 핥아 치료하는 짐승의 그것과 비슷한 외로운 존재의 확인이다. 어쿠스틱 기타와 현악 세션이 곧 일렉트릭 사운드로 전환되는 <못다 핀 꽃 한 송이>의 드라마틱한 곡 구성은 가요의 틀속에서도 돋보이고, 작은거인 2집에서 옮겨 온 <별리>의 정조는 멀리는 <가시리>에서 가깝게는 소월의 <진달래꽃>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이별가 전통 속에 고유한 정한을 계승했다 할 만하다. 이윽고 앨범 후반부의 <내일>은 선명한 기타 반주를 곁들여 담담한 체념의 어조로 홀로 가야 할 '멀고도 먼 방랑길', 한 뮤지션의 앞으로의 여정을 예비하고 있다. (조성희)
66. 정태춘 시인의 마을 (1978/서라벌레코드)
고은의 작품을 좋아하며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인생의 허무함에 싸여 있던 한 시골소년이 1978년 군을 제대하며 그간 만든 노래들을 발표한 것이 본작이다. 또한 앞으로 끊어지지 않을 공윤과의 인연을 맺어준 것도 본작이다. <시인의 마을>의 가사가 시작과 관련이 없고 가사에 방황, 불건전한 요소가 짙어 대중가요로 부적격하다는 판정을 받고 전면 개사되었고, <사랑하고 싶소>도 내용이 지나치게 방황을 강조하고 있다는 이유로 개사되어 발표되었다. 이렇게 이 앨범은 정태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방황과 허무로 일관하며 계속적인 정체 모를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떠나고자 하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고 방황하는 빈 가슴을 품은 채 떠 돌아다니는 시인의 모습을 공윤의 지적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태춘이 만들어낸 자신이 느끼는 것에 대한 솔직한 그 가사가 적절히 베어 있는 가락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한유선)
67. 양희은 1991 (1995/킹레코드)
상투적인 표현을 눈감아준다면,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혹은 언니), 버거운 역사의 등짐을 저 모퉁이쯤 살며시 내려놓고 이제 조용조용 말을 걸어 오는 양희은을 이 말처럼 적절하게 형용한 것이 없다. 그이만큼 작곡자 복[혹은 화?]이 넘쳤던 싱어도 많지 않을 터인데, <아침이슬>의 김민기, <한계령>, <찔레꽃 피면>의 하덕규 이후 여기서 파트너로 맞은 이는 막내동생뻘쯤 될 듯한 이병우이다. 언제나 청량하게 곧게 뻗어나가기만 할 것 같던 양희은의 목소리에 어느새 세월의 연륜인 듯 음영이 드리워졌고 그에 맞춰 덤덤한 회한과 호들갑스럽지 않은 달관을 담은 곡들 안에 시종 잔잔하게 뒷받침하는 기타가 호흡을 맞춘다. 그래도 좀 굴곡이 있다 싶은 <가을아침>에서 그려나가는 어느 가족의 아침정경은 정말이지 정겹기 그지없다. 쓸쓸하도록 아름다운 풍경이다. (조성희)
68. 달파란 휘파람 별 (1998/펌프/도레미레코드) [달파란(prog)]
한국 대중음악계처럼 트렌드에 민감한 곳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 곳에서의 트렌드의 공통점은 그것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본격 적이고 능란하게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고, 또한 변형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트렌드의 특성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테크노' 앨범이 바로 이것이다. 테크노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샘플과 루프,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적인 음원과 아르페지오, 그 외에도 몇 백가지가 될지 모르는)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달파란/강기영의 것으로 '자기화'했으며, 가장 '한국적인 개성'을 지닌 이박사의 인용이나 낭만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컨셉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글로벌한 특성을 지닌, 정말 어느 곳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앨범이 이것이다. 이 앨범이 '상업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은 바로 한국의 '트렌드'에 대한 증거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음악철학을 지녔지만 그것을 구체화하여 앨범으로 내놓기는 힘든 일이다. 달파란/강기영의 '테크노 철학'을 그대로 창작해낸 실천주의적 앨범이다. (조원희)
그야말로 'New Kids On The Block' 동네에 나타난 새로운 아이들. 그들의 정체는 중산층에서 (겉보기에) 별 탈 없이 잘 자란 요즘 애들이지만, 한편으론 '또 하나의 문화'라는 대안문화를 추구하는 진보집단의 2세대로서 사회체제에 대한 분석비판력을 갖춘 세대였다. TV 속의 다소 어설픈 라이브로 혹사당해 최초의 신선한 울림을 잃어 버리긴 했지만 <달팽이>에서 표현된 작고 뭉클하고 꼬물거리는 것에 대한 애정은 새로웠고, 경쾌한 선율 위에 획일적인 사회에 대한 항변을 담은 <왼손잡이>가 모든 삐딱한 성향을 가진 이들의 은근한 동조를 모았던 반면, 이들의 지향은 <다시 처음부터 다시>의 걸러지지 않은 독설과 직설적인 공격성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곡 끝머리에 살짝 비춰진 젊은이다운 웃음기는 <더>의 소름끼치는 파괴적 비전의 확대심화로 일관한 그들의 2집밑에서는 더 이상 접할 수 없으며, 이적과 김동율의 조인트 앨범 카니발을 보면, "아무것도 망치지 않는다"는 가사가 의도된 아이러니가 아니라 이적의 진심이 아니었나 의심하게 된다. (조성희)
70. 갱톨릭 A.R.I.C (1998/강아지 문화 예술) [김도영(v, key), 임태형(v, key)]
굳건하게 '가요 톱텐'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뽕짝'의 몰락과 댄스 음악의 주류장악이라는 전광석화처럼 벌어진 이 사건은 아직도 흑인음악 (랩, R&B)을 제 나름 대로 (또는 멋대로) 차용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거리의 아이들이 '크루(crew)'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스스로 창출하는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질 것 이라는 기대는 아주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클럽 밴드들 틈새에서 마이크와 턴테이블을 무기로 랩을 지껄이는 랩퍼들과 포터블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댄서들의 시도는 (미약하나마) 아직 진행형이다. 강아지 문화/예술의 옴니버스 앨범 에 <변기속 세상>으로 참여했던 갱톨릭은 자신과 주변에 대해 투덜거리며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Another Revolution Is Climbing'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의 데뷔 앨범을 발표했다. '뽕' 멜로디 틈새에서 고생하는 랩을 본연의 위치에 놓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아직 가능성의 영역일 수는 있어도 치기어리지는않았다. 그리고 현재 갱톨릭에 이어 함께 공연하던 가리온, Da Crew등 랩 그룹의 앨범이 준비중이다. (김민규)
71. 카르스마 1집 (1988/서라벌레코드) [이근형(g), 김종서(v), 김영진(b), 김민기(d)]
1983년 무당은 자신들의 2집에 담긴 <그 길을 따라>에서 헤비메틀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그리고 1986년 시나위는 최초의 헤비메틀 히트 싱글이기도 한 <크게 라디오를 켜고>가 담긴 헤비메틀 음반을 만들었다. 이후 국내에서는 비록 언더그라운드에서나마 헤비메틀 붐이 일어났다. 카리스마의 본작은 시나위 데뷔부터 불기 시작한 국내 헤비메틀의 붐을 타고 시기적으로 마땅히 나왔어야 할 만한 완성도 있는 메틀 음반이다. 여기서는 당시 절정에 달했던 이근형의 연주를 들을 수 있고, 이는 시나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김종서, 김민기, 김영진이 드디어 카리스마 참가시에는 역량있는 뮤지션들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90년대 변신을 한 김종서도 이근형과 공동 작사/작곡작업을 한 이 음반에서 자신의 음악작업경력 중 최고의 역량을 드러내고, , <저 산너머>에서의 이근형의 기타 연주는 필면에서 당대 최고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80년대 헤비메틀 역사에서의 슈퍼 세션 밴드이고, 미스테리와는 달리 명성만큼의 완성도를 음반에 담아냈다. (박준흠)
72. 한대수 무한대 (1984/신세계음향)
황천길을 허위적허위적 올라가는 사람이 남겨놓은 듯한 고무신이 걸린 철조망 사진은 한대수라는 냉소와 허무의식에 사로잡힌 듯한 한 가수의 초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7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역사에서 특유의 냉소와 표현의 모호성으로 또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던 한대수의 자화상은 이렇듯 타인에게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으며 또한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14년이란 긴 쉼표를 마치고 80년대의 마지막에 내놓은 또 하나의 자화상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언어는 더욱 더 은유로 일관하고 그의 냉소의 대상은 점점 더 모호해졌다. 이는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이 그에게 가했던 형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기질탓으로 보인다. 즉, 그는 타고난 니힐리스트인 동시에 상징주의자인 것이다. <무한대>에서 한대수는 언어추상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실 우리 가요에서 이만큼 자의적인 가사 쓰기가 시도되기는 힘들고 또한 그러한 시도들도 많지 않았다. 흔히 거론되는 화려한 세션과 록적인 시도 및 추상화된 가사 미학은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나온 무한대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황정)
73. 안치환 4집 (1995/킹레코드)
갑자기 바뀌어 버린 시대는 누구에게나 혼란스러웠다. 안치환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광야에서>의 비장미는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 시대, 그는 대중적인 서정성과 이제까지 그의 음악의 기반인 건강한 비판의식을 접목하기 위해 애써보았지만 형식이 바뀌지 않은 채 내용만을 바꾼 어색함은 2집까지 계속된다. 수없는 대중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새로운 형식, '록'이 자신이 바라는 대중성과 비판의식의 교점이라는 것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3집의 모색기를 거쳐 마침내 피어난 4집의 '록'은 이 음반을 그의 최고작이자 9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소중한 성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이 음반을 <내가 만일>로만 기억하고 있는 안치환의 팬, 음반이 아닌 그의 생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안치환의 팬은 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관객과 같이 부르는 <당당하게>의 거친 목소리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그 수많은 민중음악인들이 흔적도 없이 스러져간 90년대에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다. (신승렬)
74. 김현식 5집 (1990/서라벌레코드)
당시 김현식의 고통스러운 내면이 담긴 '어두운' 곡들로 점철된 이 앨범은 그의 음악여정의 완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1980년 <봄·여름·가을·겨울>이 담긴 데뷔 음반을 발표한 이래 이전 4집까지는 각기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던 음반들이었다. 1집에서의 훵키한 <봄·여름·가을·겨울>과 포크적인 <당신의 모습>, 2집에서의 일렉트릭 블루스 록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와 슬로우 록 <어둠 그 별빛>, 3집에서의 퓨전 재즈 취향의 <쓸쓸한 오후>와 세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비오는 어느 저녁>, 4집에서의 애상적인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기다리겠소>는 점전적으로 발전하는 그의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단면들 이었다. 하지만 이 음반에서는 '새로운 스타일'이니 '음악적인 발전'이니 하는 잣대가 어울리지 않고, 그러한 얘기를 거론할 성질의 음반도 아니다. <향기 없는 꽃>, <넋두리> 단 두 곡만 들어도 느낄 수 있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무섭도록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이는 단지 노래를 만들기(꾸미기) 위해 만든 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거리 그 벤치>, <거울이 되어> 등 최상의 트랙들이 실려있고, 박청귀의 세션작들 중에서도 1988년 한영애의 <바라본다>와 함께 가장 빛나는 작품이다. (박준흠)
75. 11월 1집 (1990/서울음반) [김효국(key), 장재환(g), 조준형(g), 김영태(b), 박기형(d)]
11월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하늘바다가 언급되어야 한다. 1989년 <마네킹의 하루>, <거울 속의 얼굴> 등이 실린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하늘바다 <장재환, 김영태>는 (굳이 프로그레시브란 형용사를 동원할 필요 없이) 70년대 클래식 록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이다. 하늘바다의 이른 좌초는 (단명한 밴드 대부분이 그렇듯이) 보다 명확한 자신의 색을 드러냈으면 하는 여운을 남겼다. 이듬해 이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던 하몬드 오르간의 김효국과 믿음·소망· 사랑의 조준형(g),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출신의 박기형(d) 등이 장재환, 김영태와 함께 결성한 11월은 하늘바다보다 파퓰러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메인 보컬없이 자신이 만든 곡의 보컬을 스스로 맡은 이 앨범에는 하늘바다 1집에 실렸던 <거울 속의 거울>, <머물고 싶은 순간>이 다시 실렸고, 방송을 탄 <착각> 외에 리드미컬한 곡 전개를 보이는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과 연주곡 <11월의 테미>가 수록되었다. (김민규)
76. 정태춘 아! 대한민국 (1990/삶의 문화/한국음반)
1991년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정태춘은 불법 음반을 냈다. 90년대 정태춘이라는 가수를 대중들에게 가장 드러나게 했던 공연윤리 심의위원회와 한 가수의 공식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본작<아! 대한민국>이 바로 그 시발점이다. 이 앨범에는 이전까지 그를 그렇게 붙잡고 늘어 지던 심의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직설적인 가사들과 우리 전통악기들을 사용하여 (북, 꽹가리, 태평소) 뽑아낸 그의 의지를 뒷받침하는 강한 소리들이 이전까지의 시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완전히 그 자세를 확립하고 있다. <일어나라 열사여>, <황톳길> 외에도 <그대 행복한가>와 <우리들 세상>을 통한 질문과 대답을 들을 수 있으며 이전까지 우리 고유의 음악을 옭아매던 한의 정서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분노와 저항을 실은 새로운 국악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공윤에 대항하는 표현의 자유를 드러낸 본작으로 정태춘은 이전의 저항적인 혹은 서정적인 포크 가수에서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된다. (한유선)
1985년 들국화 데뷔 음반은 80년대 말 국내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를 연 기념비적인 음반이었고, 들국화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나오기를 꿈꿨던 그룹이었다. 우리말로 된 록 음반으로서 국지적인 느낌에서 탈피한 이 음반은 따로 또 같이 이후에 80년대 초반부터 일부 젊은 뮤지션들이 자신들 음악적 정체성 확보의 일환으로 행했던 '독자적으로 음악하기'의 저변이 확보되었음을 알리는 상징물이었다. 이 들국화의 보컬 리스트로서 카리스마적 보컬을 선보인 전인권은 사실은 들국화 당시보다 자신의 솔로 음반에서 진짜 자신의 역량을 보여준다. 들국화 당시는 한 명의 멤버로서 조하에 충실했지만 1987년 <전인권·허성욱 추억 들국화> 앨범과 본 음반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감성은 사실 들국화 당시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점이었다. "가을비 소리 없이 내리네/ 거리마다 은행잎이 노랗게/약속은 자꾸만 맴돌고/비에 젖어 자연스레 진해진/걱정없는 저 자주빛이 부러워"(<가을비>)와 같은 노래에서 보여준 곡 만들기 역량은 당대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의 반열에 충분히 오를 만했다. 자신의 밴드인 파랑새와 같이한 이 음반에는 <가을비>, <아직도->라는 명곡이 있고, 게스트 기타리스트 최구희의 명연도 빛났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헛사랑(맴도는 얼굴)>도 실렸다. (박준흠)
78. 시나위 4집 (1990/오아시스레코드) [신대철(g), 김종서(v), 서태지(b), 오경환(d)]
이제 와서 80년대 말의 국내 메틀 씬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했다는 생각과 함께 음악계는 10년 싸이클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헤비메틀의 춘추 전국시대였던 당시 시나위는 김종서, 강기영(달파란), 서태지, 임재범, 김민기 등 이름만 해도 쟁쟁한(기준은 없음) 이들을 배출해낸 밴드로, 아마 국내 록 트리를 그린다면 가장 많은 잔가지를 뻗는 밴드가 될 것임은 믿어 의심할 바 없었다. 이태원, 파고다 연극관, 록 월드 등에서 공연을 하며 클럽도 거의 없이 인디 레이블도 없던 시절 국내 헤비메틀 음반의 포문을 열고 1986년 이후 꾸준한 활동을 해온 신대철은 은근과 끈기의 기타맨이라 할 수 있겠다. 신대철, 김종서, 오경환, 당시 나이를 속였던 서태지의 라인업으로 녹음된 1990년의 본작은 당시 메틀 음악들보다 깔끔, 세련, 매끄러움을 가졌고 <겨울비>덕에 방송도 탈 수 있었다. , <황무지> 등이 수록. 사실 음악보다도 시나위의 불사정신을 존경해 마지 않는 바이다. 이 앨범 뒤로 시나위는 잠시 해체 했었지만···. (한유선)
79. 김광석 2집 (1991/문화레코드)
<기다려줘>의 히트로 홀로 서기에 성공한 2년 후 발표한 이 앨범에도 역시 동물원이란 꼬리표가 뒷표지, 재킷 등에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후 자신의 빛나는 음악활동을 스스로 끝장내고 황망히 떠나 버린 이제 와 보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김광석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그리고 노래방 애창곡 목록 속에서)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장악하도록 도왔던 전형적인 '김광석 표 발라드' <사랑했지만>은 한국 대중 가요에 그리도 흔한 슬픈 사랑노래의 한 절정을 긋는다. 그 곡 하나로는 어쩌면 기막히게 노래 잘하는 발라드 가수 탄생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지 모르지만, 바로 뒤를 잇는 문대현의 <꽃>에서 엄숙하게 불러가는 그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비장한 서정미는 대한연합노래패 메아리로 시작한 이력을 실감케 하고, 잔잔하고 덜 극적인 진행을 보이는 <사랑이라는 이유로>는 <사랑했지만>의 애절함과는 또 다른 애수 섞인 차분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이장수의 가사에 스스로 곡을 붙인 <슬픈 노래>는 일상 속에서 노래의 의미를 찾는 그의 여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조성희)
'어어부'에서 이제는 '저자'로 이름을 바꾼 백현진이 이끄는 어어부 밴드(2집을 내면서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로 바뀌었다)의 노래를 듣고 혹자는 대번에 혀를 찬다. 이것도 노래라고 하는 거냐며. 1996년 발표된 이 앨범은 연주와 보컬 모든 부분에서 그 해 최고의 충격 앨범이었다. 그 충격을 감지한 사람은 비록 몇 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나쁜영화>에 삽입되었던 <아름다운 세상에-어느 가족 줄거리>는 분명 영화보다 훌륭했다. 4곡만 수록된 미니 앨범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약간 산만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지만 다행히도 앨범애서의 새로운 시도들이 단지 즉흥적인 발상이라든가 치기 어린 일회적인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느낌은 없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이미지 만들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원일의 영향이겠지만 국악적인 요소들도 겉돌지 않게 소화되고, 실험적인 사운드들이 어느 정도 정제되어 음악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양손을 들어주고 싶다. 과연 어어부 PS가 이 음반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겼을지는 문제삼고 싶지 않다. 얼마 전 또 다른 충격을 담은 2집을 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SBS와 PBS에서는 18곡 모두 염세와 허무를 이유로 방송금지판정을 내렸다. (한유선)
81. 한상원 Funky Station (1997/디지탈미디어)
한상원은 에 실린 <미련>의 후반부 솔로 연주에서 나타나듯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훵키(funky)한 느낌의 연주자 중에서도 최고수이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진정한 '훵크 기타의 마스터'이다. 비록 전작인 1993년 에서는 연주력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작곡력을 보여 주었지만, 이 음반은 모든 점에서 완숙한 모습으로 성장한 그를 보여주었다. 이 음반에서는 그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제프 벡의 그림자를 얼핏 볼 수도 있는데, 보코더 연주의 진수를 보여주는 은 제프 벡의 에서나 들을 수 있는 연주였다. 하지만 제프 벡의 연주보다도 더욱 훵키하고, <음깔>, , , <너의 욕(Alternative Version)>, 접속곡들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70년대 클래식 록 스타일에 90년대의 모던한 감각이 수용 되었다. <음깔>은 한상원이 멀티플레이어임을 유감없이 밝힌 연주곡으로 이 음반의 진정한 베스트 트랙이고, 강기영이 베이스에 참여한 <너의 욕심(Alternative Version)>, 이소라가 참여한 , 유&미 블루가 참여한 도 훌륭하다. (박준흠)
82. 조동익 Movie (1998/하나뮤직/킹레코드)
이 음반은 1994년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에 쓰인 곡들과 1997년 송능한 감독의 에 쓰인 곡들(미발표곡들을 포함한)묶은 음반이다. 1986년 어떤날 데뷔이래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거론할 수 있는 상당수의 명반에 세션으로 참여한 명연주자이자 90년대에 와서는 가장 재능있는 음악감독의 지위에 오른 편곡자였다. 특히 그가 조동익 밴드를 이끌고 참여한 안치환 4집, 김광석 <다시 부르기2>, 장필순<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는 그가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었던 걸작들이었다. 같은 노래라도 조동익이 편곡을 하면 정말 느낌이 달라지고 맛깔스러워진다[올해 발표된 정태춘·박은옥의 <정동진/건너간다>에 실린 최성규 편곡의 <정동진(1)>과 조동익 편곡의 <정동진(2)>은 편곡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곡들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천재적인 재능에 비해 이상하리 만치 음반을 발표하지 않는 뮤시션이다.(이것은 그의 집안 내력인가?). 사실 그 정도라면 적어도 5~6장의 음반을 발표했어도 됐지만 이 음반은 1994년 솔로 데뷔작 동경에 이은 2집에 불과하다. <현기증>, <이틀>등 그만의 어법으로 만들어진 테크노 연주곡, <첫 발자국>등 관조적인 소품, <그림자 춤> 등 미발표곡이 수록된 이 음반은 어찌보면 정규음반 성격은 아니지만 조동익을 알 수 있게 하는 명작임에는 분명하다. (박준흠)
83. 신촌블루스 2집 (1989/서라벌레코드)
한국적 블루스를 지향하는 베테랑 뮤지션들이 이미 한차례 공동작업을 거쳐 얼마간 여유롭게 그러나 의욕충만하게 덤벼들었다는 것, 팀의 주축인 엄인호와 이정선의 다소 다른 취향이 블루스 록쪽에서 타협점을 찾았으며 브래스 섹션이 사운드를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등등의 장황한 설명을 한순간 무색하게 만드는 뭔가가 이 앨범에는 있다. 그것은 엄인호와 노래를 주고 받는 블루스 메들리 <바람인가 빗속에서>로 등장하여 덜 상한 목소리를 실컷 내지르며 <골목길>에서 불멸의 한순간을 남긴 고 김현식의 후광일 수도 있고, 한영애가 비워둔 여성 보컬의 자리를 별 아쉬움 없이 메운 매력적인 보컬리스트 정서용일 수도 있으며, 김현식과의 인연으로 참여한 봄·여름·가을·겨울의 보사노바곡 <또 하나의 내가 있다면>의 쓸쓸하지만 단정한 면모일지도 모르고, 한영애 2집에도 실렸던 <루씰>의 작곡자 엄인호 버전의 색다른 맛일 수도 있다. 아니, 이 모든 걸 합치고 미쳐 언급하지 못한 것까지 더한 대도 잡지 못할 그것은 90년대 이전 한국 대중음악의 (상대적) 풍요로움과 가능성이 결국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소진되어 버린 데 사무치는 회한일지도 모르겠다. (조성희)
84.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 개, 럭키스타 (1998/펌프/디지탈미디어) [저자(v), 장영규(v, b, g, key, prog)]
<개, 럭키스타>와 비교하면 어어부밴드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년의 손익분기점은 정말 예고편에 불과했다. '어어부 프로젝트 사운드(이하 어어부)'로 개명하고 내놓은 이 음반은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강했던 지난 어어부의 무대가 제공하던 것 이상의 충격을 제공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음악적인 매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영규가 주도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그 동안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던 이들을 충분히 제압할 만하며 원일의 타악기가 빠졌지만(원일은 <인스탄트 꿈>에만 세션으로 참여) 마림바, 가야금, 만돌린 등의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어 소리는 더욱 풍부해졌다. 18곡의 수록곡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어어부의 <개, 럭키스타>는 유토피아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환상을, 그를 위한 합리화를 허용하지 않는다(그래서 이를 소화할 능력이 없는 방송 심의위원들은 이들에게 빨간 딱지를 붙여 버렸다). 그래서 정상적인 세상에서 이 앨범은 상당히 불편하게 들린다. (김민규)
85. 김수철 황천길 (1989/서울음반)
1981년 작은거인 2집이라는 불멸의 하드록 음반을 내고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청년 로커 김수철은 의외로 팝 발라드로 진로를 변경했다. 하지만 이는 '의외' 라기보다는 당시 가요계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범위가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같다. 그 결과 만들어낸 것이 <못다핀 꽃 한 송이>, <세월>, <정녕 그대를>, <내일>과 같은 팝 발라드가 담긴 김수철 1집(83)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대중들은 이 곡들에 큰 호응을 보였고, 이 음반은 김수철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1985년 3집 이후 아티스트로서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려 시도했던 그는 이전부터 그의 숙원사업이었던 국악과 양악의 접목을 시도한다. 이른바 '크로스오버 국악' 작업을 시도하는데, 그 첫 작품이 1987년에 나온 <비애>, <인생>, <삶과 죽음>이 담긴 <김수철> 이었다. 그리고 이 <황천길>은 이런 그의 일련의 작업이 드디어 완벽한 결실을 본 작품으로, 태평소가 주선율로 이용되는 <황천길>, 아쟁이 주선율로 쓰여지는 <한> 등 국악기의 맛이 이럴수도 있음을 새롭게 인식시킨 '퓨전 국악'의 이정표였다. (박준흠)
세상에는 화려한 조명을 주식으로 삼는 이들이 있는 반면 그 빛의 불순함을 못 견뎌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스스로 '어둠의 자식들' 이길 원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왜 이를 악물고 힘들게 소리내고 있느냐고 묻기 전에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지점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강아지 문화/예술의 세 번재 앨범인 허클베리 핀의 <18일의 수요일>은 올해 신촌/홍대 클럽 씬에서 나온 반가운 결과물 중의 하나다. 이 앨범에서 허클베리 핀은 '불을 지르는 아이'와 '절름발이'의 꿈의 비틀린 틈새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각성하고 그것을 내성적인 목소리로 표출한다. 스스로 '광의의 펑크'라고 이야기하는 이들 음악의 정서는 일그러진 디스토션 기타음을 배경으로 무작정 내달리는 것에 있지 않다. <갈가마귀>, <사마귀>, <죽이다> 같이 거칠고 단순한 구성의 곡이 쉽게 귀에 채이지만 허클베리 핀의 음악이 우리에게 공명하는 것은 '태양은 구름을 몰아내/우리의 지도를 그릴 것<죽이다>)'이라고 당차게 내치는 목소리와 밴드의 자화상인 <허클베리 핀>의 낮은 목소리가 공존하는 것에 있다. (김민규)
87. 이상은 외롭고 웃긴 가게 (1997/킹레코드)
이상은은 1988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을 차지하면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뮤지션이다. 데뷔시는 탬버린을 들고 무대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어린 가수에 불과했었고, 이때는 그녀의 뮤지션으로서의 가능성을 눈치채기에는 사실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1992년에 이상은 그녀의 음악 경력에서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 <이상은>을 발표했다. 감각 있는 젊은 뮤지션 안진우의 편곡과 기타가 뛰어난 이 음반은 그때까지 그녀가 갖고 있었던 '가벼운 애들 가수'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이는 예상치 못한 실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1995년에는 완벽한 음악감독이 되어 <공무도하가>를 일본인 스탭들을 이끌고 녹음했고, 1997년에는 이 음반을 발표하여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상은으로 성장했다. <집>, <사막>, <외롭고 웃긴 가게>로 차례로 여행을 떠난 그녀는 이 땅에서 음악의 한 유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상은과 비슷한 성향의···'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박준흠)
'독립 레이블'을 통한 언더그라운드 씬의 앨범은 90년대 중반 이후 매우 번성했다. 때로는 열악한 작업환경을 드러내는 것으로, 때로는 투철하고 고집스러운 반골정신으로, 때로는 기상천외한 각종 아이디어들로 그들은 기존 대중음악시장을 잠식하려 하고 있다. 그러한 소위 '인디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한 밴드는 바로 앤이다. 이들은 때로는 'funky'하고, 때로는 스트레이트하며 때로는 서정적이기도 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동시에 매우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장현정의 보컬은 랩과 멈블을 종횡하며 새로운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재기 넘치는 가사전달마저 선보이고 있다. 외국의 몇몇 밴드와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다양함 넘치는 앨범 구성은 이들을 여타의 '비인가종목 카피 밴드'들로부터 차별화한다. <무기력 대폭발>에서의 스트레이트함은 히트 넘버 <러브레터>로 그들을 접한 많은 청자들을 의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서프 뮤직이나 스카 등의 '한국적으로 소화해내기 힘든' 서커스를 선보이기 때문에 이들이 각광 받아야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조원희)
이들은 1986년 데뷔 음반으로 우리 나라에서 헤비메틀의 시대를 연 장본인이면서(사실 최초의 헤비메틀 연주가 담긴 음반은 1983년 무당 2집이었다. 여기서 <그 길을 따라>는 헤비메틀 리프를 본격적으로 차용한 곡이다), 1990년 자신들의 4집으로 그간의 힘겨웠던 '메틀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시나위는 잠정적으로 해체되었고, 일군의 메틀 청년들(김종서, 임재범, 이근형, 오태호, 서태지 등)은 진로변경을 모색했다. 신대철은 김영진(베이스/시나위, 카리스마 출신), 오경환(드럼/뮤즈 에로스 출신)과 1991년에 블루지한 하드 록을 추구했던 자유를 결성해서 앨범 하나를 발표했고, 박광현 2집, 남궁연 1집에서는 세션을, 손성훈의 솔로 음반에서 프로듀서와 세션을 했다. 하지만 시나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5년만에 다시 시나위를 재개, 90년대 록 조류 (얼터너티브 록)를 흡수한 본작을 발표했다. 그의 달라진 기타톤(그런지 기타 톤)이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 음반에는 <매 맞는 아이>, <지켜봐야 해>, <너에게 주고 싶어>, <혼돈의 끝>, <상심의 계단>등 좋은 작품이 수록되었고,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시나위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이 음반을 선정하겠다. (박준흠)
90. H2O 2집 (1992/아세아레코드) [김준원(v), 박현준(g, key), 강기영(b, key), 김민기(d)]
러닝타임 35분짜리 앨범이지만 그 내용물은 녹록하지 않다. 시나위 출신의 강기영을 중심으로 당시 TV에 출연해 수많은 여성들을 설레게 했던 박현준과(비록 그녀들은 이들의 앨범을 듣지 않았지만) 김준원이 모인 H2O는 당시 한국 록 음악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헤비메틀이나 LA 팝메틀과는 다른,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을 선보였다. 흔히 에디 베더(Pearl Jam)에 비교되곤 하는 김준원의 개성 있는 보컬 톤이라든가 단순히 드럼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개성 있는 강기영의 베이스, 테크닉 싸움장 같던 당대의 기타 사운드와는 동떨어진 배킹 위주의 여유로운 박현준의 기타는 3집에서 만개하여 9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를 낳지만 여기서도 이미 그 날카로움은 주머니를 뚫고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개성'은 삐삐밴드에서 그 극단을 보여준다. 80년대의 많은 헤비메틀 음악인들이 받은 '테크닉만 출중한 생각 없는 카피 집단'이라는 비판은 이들에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 추천 트랙은 <너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으로, 뻔한 발라드곡처럼 보이는 제목과는 딴판으로 한국에서 몇 안되는 베이스가 돋보이는 명곡이다. (신승렬)
91.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1993/삶의 문화/한국음반)
모던 포크의 감각적 수용자로 시작하여 이제는 수단으로 포크를 수용한 정태춘은 민중운동의 통일되고 확실한 목소리가 사라져가고 있는 이즈음에 다시 재조명되어 마땅하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노래한 가수가 아니다. 그가 엘리트 지식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이웃의 삶을 이성이 아닌 가슴으로 가감없이 노래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제도권의 박해로 그의 음반들은 '불법'이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뒤돌아 볼 때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 두 음반의 합법화 결정은 그의 선택이 옳았으며 그의 투쟁이 조그마한 승리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죽음>과 같은 낮게 읊조리는 절규가 가득 찬 <아! 대한민국>과는 달리 본인도 밝히듯 여전히 그 메시지는 강렬하지만 보다 일상적인 정서에 가까이한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그의 향토적인 초기작과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저 들에 불을 놓아>와 같은 강렬한 어조의 노래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아내이자 동지인 박은옥과 함께 한 이 음반은 사회성 짙은 모던 포크의 걸작으로, 민중가요의 제도권에 대한 소중한 승리로서 기억되고 있다. (황정)
92. 양희은 1집 (1971/킹레코드)
세상에는 무수한 <아침이슬>이 있다. 1971년 앳된 처녀의 맑고도 강한 목소리에 실려 세상에 나왔던 젊은 날의 고뇌와 결단을 그린 서정적인 노래 한 곡은, 수록음반이 작곡자 김민기 독집의 판매금지조치에 휩쓸려 공식적인 무대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후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선연히 살아 독재정권의 신경질적인 과잉우려를 실현시키기라도 할 듯 술집에서, 거리에서 끝도 없이 불리워졌다. 그 결과 애초의 소박함 위에 부르는 이의 비분강개 혹은 결기가 덧붙여졌고, 80년대에 들어와 얼마간 자기도취적인 정서는 소시민적·지사적이라는 당시로선 치명적이었던 딱지를 달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1987년 가을, 6월 항쟁의 가시적 성과물 중 하나로서 <아침이슬>이란 더블앨범에 간소한 기타 반주의 원곡이 그대로 실림으로써 이 노래를 구전으로만 접했던 세대와 처음 조우했다. 한편 '국민정부'가 <상록수>를 국민가요로 삼을 것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작년 가을 김민기 헌정앨범 <1997 아침이슬>의 서두를 장식한 새 녹음은 남성합창을 깔고 애국가 한 구절과 동반한 무게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들고 부른 이들조차 버거울 정도로 시대와 호흡하며 대중과 함께 했던 노래가 첫 선을 보인 이 음반은 함께 수록된 곡들이 <꽃 피우는 아이>를 제외하면 <일곱 송이 수선화(Seven Daffodils) 등 모두 60년대 미국 포크송의 번안곡이었던 탓인지 재발매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대로 전설과 기억의 영역 속에 남게 되었다. (조성희)
1980년대에 해금되면서 내놓은 작품인 이 음반은 9인조 브래스 록 그룹으로 만든 음반이었고, 신중현의 음반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를 거론 할 때는 보통 한국 록의 대부로 얘기하면서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을 그의 대표작으로 보아왔다. 하지만 사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은 더 맨이나 뮤직파워 같은 브래스, 키보드 파트가 있으면서 특유의 '쩍쩍 달라붙는' 느낌의 리듬 기타 배킹(backing)이 깔리는 음악이다. 이는 이 음반의 <아무도 없지만>, <저무는 바닷가>, <떠나야 할 사람>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들은 멋진 리듬 기타 배킹과 신중현만의 감각적인 솔로 애드립이 돋보이는 매우 훌륭한 곡들인데, 이 음반은 사실 묻혀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그도 인정하듯(그는 이 음반의 기타 애드립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 음반에서의 감각은 그의 연주경력에서의 베스트이고, 그의 필은 무척이나 독특했다. (박준흠)
94.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1989/서울음반)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온순한 인상의 합법 앨범을 발표한 것은 1988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이 일렉트릭 사운드를 받아들인 것 이상으로 (물론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 한정된 이야기겠지만) 이슈를 일으켰다. 눈을 가린 경주마와 같은 이러한 시각에 의해 벌어진 간극은 아직도 대중음악의 일관된 흐름 내에서 이러한 흐름의 음악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조건을 낳고 있다(록이 '저항'이냐 아니냐, 록을 '수단'으로 여기느니 하는 허접쓰레기 같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등을 배출한 전직 운동권 노래패로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간극이 낳은 현실이다. 간간이 모습이 지워진 졸업사진을(누가 이들의 모습을 이 사진에서 지우려 했던가) 재킷으로 한 노·찾·사 2집은 노래패 곡의 전형에서 벗어나진 않지만 이전의 조악할 수밖에 없었던 불법 테이프의 느낌과는 달리 (따로 또 같이의) 나동민의 프로듀싱을 거치며 보다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안치환이 부른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여공의 모습을 그린 <사계>, 정태춘, 박은옥의 <5·18>에 삽입된 <오월의 노래> 등 모두 80년대 노래운동의 훌륭한 자산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을 '후일 담류'로 싸게 팔아 넘기려는 이들은 <저 평등의 땅에>의 당당하고 아름다운 서정을 반드시 다시 들어야 한다. (김민규)
95. 정태춘·박은옥 북한강에서/바람 (1985/지구레코드)
남도에는 황토가 있다. 불그스레한 황톳길에 발짝마다 먼지 풀풀 날리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한 사내의 등에는 '시름짐만 한 보따리'고, '저 산꼭대기 아버지 무덤'(<사망부가>)이 기다리는 그 길 끝머리에는 도솔천이 얼핏 비칠지도 모른다. '간다간다/나는 간다/선말고개/넘어간다' (<애고, 도솔천아>), 혹은 '님의 가슴/내가 안고/육자배기나/할까요'(<장서방네 노을>) 등, 4/4조 민요가락이 구비구비 고개 넘어 들을 지나 강을 끼고 바다로 흘러가며, 아스팔트의 아이들에게도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 이전 선조에게서 유전된 흙의 기억을 일깨운다. 박은옥의 '곱디고운' 목소리는 <바람>과 <봉숭아>에서 들을 수 있고, 1집부터 함께 했던 유지연이 편곡을 담당하여 일렉트릭 기타 속에 진국으로 어울리는 한국적인 가락을 조율하는 데 일조했다. (조성희)
96. 김현식 4집 (1988/서라벌레코드)
짧은 인생역정 동안의 간난고초와 탐닉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겨오며 시기적으로 급격한 변모를 보였던 김현식의 목소리(들) 가운데 남은 이들 뇌리에 가장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 아마 이 시절의 강렬한 허스키 보이스가 아닐까. 1987년 대마초 파동 이후 타의에 의한 공백기를 딛고 돌아온 그는 비록 미청년의 면모는 잃었으나 목소리의 거친 기운이 강렬함에 깊이와 매력을 더해주는 시기를 맞았고, 그 절정의 순간들이 신촌블루스 2집과 이 앨범에 담겨있다. 백 밴드라기보다 오히려 음악적 동반자였던 봄·여름·가을·겨울과 헤어진 후 만들어진 이 앨범에서는 송병준, 이정선, 장기호, 유재하 등의 곡과 자작곡 두 곡이 실렸고, 박청귀 등 세션 뮤지션들의 도움과 송홍섭 편곡을 거쳐 이병우의 프로듀싱이 앨범을 마무리했다. 김현식 특유의 발라드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사랑할 수 없어>도 새삼 감동적이며, 신촌블루스의 이정선이 제공한 <한밤중에>, <우리네 인생> 모두 훌륭하지만 특히 후자는 흥겹게 출렁이는 생의 낙관 혹은 달관으로서 유독 돋보인다. 유재하 버전과 대조되는 김현식의 <그대 내 품에>는 꺼칠한 남자 목소리의 힘과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과시하고 있다. 김현식 이전에 김현식 없고 김현식 이후에 김현식 없다. (조성희)
97. 김현식 2집 (1984/서라벌레코드)
전인권과 함께 80년대를 상징하는 보컬리스트로서 고 김현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를 노래만 잘 불렀던 '팝 발라드' 가수로 폄하한다면 6,70년대 국내 록의 대부분을 '밤무대 사운드'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980년 <봄·여름·가을·겨울>, <당신의 모습>이 실린 데뷔 앨범의 처참한 실패 이후 4년만에 와신상담 내놓은 이 앨범의 성공은 김현식을 공중파와 공연장 모두에서 환영받는 이로 변모시켰다. 이렇게 된 것에는 <사랑했어요>의 멜랑콜리가 지대한 공헌을 했고(이러한 '소녀취향'의 감상을 꼬집는 이들이 있지만 이 앨범의 상업적 성공이 없었더라면 김현식이 이후 앨범에서 자신의 원했던 음악을 표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까?)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독보적이었지만 (<뭐라고 딱 꼬집어 얘기할 수 없어요>를 김태화처럼 부를 이가 없듯이 <골목길>을 김현식의 느낌으로 부를 이가 없다) 김현식이 뮤지션으로 비중 있게 언급될 수 있는 이유는 최이철의 기타가 발군인 블루스 록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와 김현식의 샤우팅 보컬이 빛을 발하는 <어둠 그 별 빛>, <회상> 등의 곡에 있다. 김현식은 이 앨범 이후 백 밴드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3집을 발표하며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민규)
가요와 블루스의 접목이라는 대전제하에 여성가수들의 보컬이라는 소전제를 훌륭하게 배치한 신촌블루스 3집은 이정선이라는 한국적 블루스 기타의 모범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엄인호의 신촌블루스'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엄인호의 기타는 그것이 독학에 의한 것이기에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고유의 색깔이 있다. 이러한 면 때문에 신촌블루스의 '가요 블루스'는 곧 엄인호의 기타와 동격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한 엄인호의 기타는 객원으로 참여한 보켤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애드립에서 더욱 더 그 맛을 느끼게 하는데, 역시 3집에서도 1, 2집의 한영애, 김현식에 못지 않은 이은미, 정경화라는 걸출한 여성보컬과 함께 그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다소 록적 톤을 가진 이은미와 애절한 고음역을 지닌 정경화라는 블루스보컬의 신성들이 각기 자신의 색깔에 맞게 <그댄 바람에 안개로 날리고···>와 <비오는 어느 저녁>을 녹음한 이 음반은 이 두 곡만으로도 한국적인 블루스의 대표반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즉, 신촌블루스의 음악은 블루스가 가지는 대중친화력을 가장 뛰어나게 한국화한 대중음악계의 또 다른 시도라 할 수 있다. (황정)
99. 윤도현 1집 (1994/LG미디어)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어이, 거기 박수 좀 쳐요'라고 말한 윤도현은 그 순간 '제 2의 강산에'인 양 여겨졌다. 흥겨운 록큰롤 넘버 <타잔>의 이미지 또한 강산에의 <예럴랄라>와 겹치며, 이를 부추킬 만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밴드의 수장이 된 지금의 윤도현은 강산에와는 다른 방향으로 변모했다. 요즘 이야 긴 머리를 휘날리며 캐주얼웨어의 패션 모델과 뮤지컬 주인공으로 맹활약하고 있지만 갓 제대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시절 윤도현의 음악은 외모 만큼이나 소박하고 솔직했다(앨범 부클릿에 실린 윤도현의 말은 정말 그다운 표현이다). 윤도현을 튀어 보이게 만든 <타잔>과 라이브시 혼자 피아노를 치며 부르곤 하던 <가을 우체국 앞에서>가 공존하는 것은 이후 2집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와 <다시 한 번>이 함께 실리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 외 <임진강>, <큰 별은 없어> 등의 곡이 실린 이 앨범에서 세션으로 참가한 토미 기타, 손진태, 조동익, 강호정, 함춘호 등은 한 몫 톡톡이 했다(이후 강호정, 엄태환은 윤도현 밴드에 참여한다). 이 앨범은 가능성으로 남았지만 윤도현밴드로 내놓은 2집은 '성장'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은 앨범이었다. (김민규)
100. N.EX.T The Return Of N.EX.T part.Ⅰ The Being(1994/대영에이브이) [신해철(v,key, g), 임창수(g), 이동규(b,v), 이수용(d)]
에 이은 넥스트의 두 번째 앨범으로 이후 이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문양(이집트 벽화에서 나온 듯한 눈, 혹은 새의 변형)과 장황한 앨범제목, 철학적 거대주제에 대한 도전, 화려한 기타 연주와 신서사이저의 웅장한 사운드 스케이프들을 한 눈에 펼쳐놓았고, 이는 제 3부 로 이어진다. 그들의 열성팬이 결집되기 시작했고, 그 막대한 쪽수와 열렬한 보위능력을 겸비한 동아리밖의 일반인에겐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을 건드려 본 작고 아름다운 발라드 <날아라 병아리>를 선사했다. 사후적으로 평가한다면,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단군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사운드가 아니었나 싶다. 뭔가 호화롭고 거창하면서도 왠지 속은 비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던진다는 면에서, 마침 (다시 한 번 역사를 단순화시킨다면)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IMF 체제하에서 넥스트 역시 구조조정 내지 슬림화의 과정을 거쳐 좌장 신해철이 펼치는 단촐한 솔로 활동으로 귀결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조성희) [기타] 블로그 집필 - 두드림(doo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