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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그는 진정한 대한민국축구의 LeGend 다 . JPG
게시물ID : sports_461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음향감독
추천 : 12
조회수 : 124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5/18 09:58:11

차범근 , 차붐에대한 포스팅을 작성하려고했지만 본인의 짧은지식과 글재주로인해

작년구입한 포포투의 THE LEGEND OF CHABOOM 의내용을도우미삼아 작성하게되었다.


1953년 5월 22일, 경기도 화성 출생

학력 : 경신중학(1966~1969), 경신고등학고(1969~1971), 고려대학교(1972~1975)

클럽 : 신탁은행(1976), 공군(1976~1979), 다름슈타트(1978), 프랑크푸르트(1979~1983),

바이엘 레버쿠젠(1983~1989)

감독 : 울산현대(1990~1994), 대한민국 대표팀(1997~1998)

중국 선천핑안(1998~1999), 수원삼성(2004~2010)

경력 : IFFHS 선전 '20세기 아시아MVP', 독일 분데스리가 통산 308경기 98골, 유럽 통산 372경기

131골 PK득점 없음, A매치 121경기 55골, 독일 FA컵통산 27경기 13득점

유럽 최고 리그로 군림하던 분데스리가

197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는 그야말로 유럽 최강의 리그였다. 차범근이 유럽으로 건너간 1979년

UEFA(유럽축구연맹)이 발표한 리그랭킹에서 독일은 총점 52.617점을 획득하며 1위에 올랐다.

2위 네덜란드(39.200), 3위 벨기에(38.300), 4위 잉글랜드(38.141)를 압도적인 점수차로 누르고

선두에 오른것이다.(당시 스페인5위,이탈리아는 9위였다.)

차범근이 뛰었던 79년부터 89년까지중 79~84년까진 줄곧 1위였고 85년부터 89년까진 2,3위권에있었다.

현재 분데스리가는 재정적으로 가장안정적인 관중이 평균관중이 가장많은 리그다.


75년 메르데카컵에서 일본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차범근은 대학을졸업한뒤 신탁은행에 입단한다.

하지만 신탁은행이 서울은행과 합병하면서 문제는 비롯되었다.

차범근을 눈독 들여왔던 자동차보험측에서 팀이 해체될 경우 이적이 가능하다는 축구 협회 규정을 들어

'차범근 가로채기'에 나선 것이다.

서울신탁은행측은 당연히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차범근은 76년 9월에 개막된

박대통령컵(박스컵)에 소속팀이 없는 '축구협회'소속 선수로 출전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때아닌 스카우트 파동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리고 9월11일 말레이시아와의 개막전에 나선 차범근은 대표팀이 1-4로 뒤지던 후반 38분부터

7분간 무려 세골을 몰아치며 혼자 힘으로 4-4 동점상황을만든다.

이른바 '7분의기적'이다. 이후 차범근의 인기는 하늘모르고 치솟았고

박스컵이 끝난뒤 76년 10월 공군에 입대한 차범근은 78년 1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사상 첫 남북 대결을 0-0으로 마친뒤 한국이아닌 독일행비행기에 오른다.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를통해 기량을 확인한 독일축구계가 러브콜을 보낸것이다.

차범근은 독일에도착한지 하루만에 리그 최하위팀인 다름슈타트와 6개월 단기계약(월봉1만마르크,약260만원)

을맺고 보쿰을 상대로 리그 데뷔전까지 치른다.

하지만, 차범근은 그 이후 경기를 뛸수없었다.

당초 특별 입대 케이스로 공군에 입대하면서 일반병들에 비해 조금 일찍 전역하기로

서면계약을 맺었지만 이 약속이 유야무야되면서 전역 일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78년 12월 전역으로 알고있던 차범근과 달리 당국에서는 만기복무를 주장했고 결국 11일만에 독일생활을

접고 79년 1월 5일 급히귀국하게된다.

당시 여론은 '대형선수의 해회유출을막자', '나라와 국민을 버린것이다' 와

'국위선양'이다 '꿈을 저버리지말자'는 측으로 나눠면서 찬반양론이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속에 차범근은 79년 5월31일 만기전역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축구협회가 주관한

성대한 고별경기를 치른 뒤 6월 22일 다시 독일로 출국한다.

(당시 고별전은 고대OBVS연대OB로 TV에 중계될만큼 큰관심을끌었다)


79/80시즌을 앞두고 독일에도착한 차범근은 다름슈타트로 찾아갔지만 계약위반을

문제삼는 구단측에의해 다시 뛸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다.

당시 차범근을 영입했던 부흐만 감독은 슈투트가르트로 팀을 옮긴 뒤였다.

차범근은 부흐만 감독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미 외국인 선수 보유 한도를 채운 슈투트가르트의 처지 탓에 부르만 감독은

다시 잘 알고지내던 베르더 브레멘에 차범근을 소개했고 이 곳에서 입단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차범근은 브레멘과 프랑크푸르트의 실랑이속에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다. 단 10분간의 입단테스트 뒤 연봉25만마르크(약 7800만원)

고액 입단을 체결했다. 또 프랑크푸르트는 1년전의 단기계약으로 차범근의 소유권을 주장하던

다름슈타트에게 이적료 격으로 20만마르크 지불하는 등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2명이던 외국인제한을 충족시키기위해 스위스출신의 루돌프엘스너를 내보내면서까지 차범근을 입단시켰다.)


차범근이 입단한 프랑크푸르트는 전시즌 리그5위로 분데스리가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구단이였다.

당시 팀에는 74년 독일월드컵 우승주역인 '그라보스키', '휄첸바인'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수비수 '부루노페차이'등이 소속되어있었다.

팀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차범근은 애용하던 11번을 배정받고 데뷔시즌부터 훨훨날기시작한다.

그라보스키 , 니켈 등이뽑아주는 기가막힌패스를 상대골문에 집어넣으며

단순에 분데스리가 최고의선수로 떠오른다.

차범근曰 "앞에 공이 딱딱 떨어지니까 공차는게 정말 즐거웠다."

79/80 시즌 31경기에 출전해 12골을 터뜨리며 득점 7위에올랐다.

하지만 그해의 스포트라이트는 단연 UEFA컵에 출전한 프랑크프루트에서

차범근은 11경기(3골)에 모두 선발출전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것이다.

1차전 원정 2-3 패

2차전 홈 1-0 승 원정다득점 원칙에따라 우승

(당시 경기편집본&우승뒷풀이가 있으나 여긴올릴수없어 생략)


첫시즌 놀라운활약으로 분데스리가 스타로떠오른 차범근 하지만 , 두번째시즌 불의의사고를 당한다.

데뷔시즌을 통해 상대팀 수비수들의 표적이됐지만 차범근은 시즌 2라운드에서 빌레펠트를 상대로

2골을 몰아치며 2-0 승리를 이끄는등 여전한 활약을 이어가고있었다.

1980년 8월 23일 , 3라운드에서 맞붙은 레버쿠젠이 고의적인 파울로 차범근을 괴롭힌것은 당연지사.

결국 차범근은 이날 상대팀 수비수인 위르겐 겔스도프의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에 금이가는 중상을입는다.

경기는 레버쿠젠의 3-2승리였지만 잔인한 태클에 흥분한 독일언론들은 '차붐 축구인생끝나나'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부상을 더크게 보도했다.

당시 독일언론과 레버쿠젠 팬들까지 겔스도프를 비난하며 형사고발까지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상에누운 차범근의 "고소는 없다. 하느님의이름으로 용서한다."는 한마디로 일단락된다.

화해와 용서를 몸소 실천한 차범근의 병실엔 온갖종류의 꽃다발이 몰려들었다.

뛰어난 기량에 관용까지 베풀줄아는 동양선수에게 독일팬들이 마음을 연것이다.

당시 병원의 예상과는달리 빠르게 회복한 차범근은 7주만에 훈련장에 복귀,

10월18일 카이저슬라우턴과의 홈경기에 출전해 팀의 3-2승리를 결정짓는 결승골을 터뜨리며

부활을알렸다. 하지만, 몸상태가 완전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그해 12월에 바로셀로에서열린

세계올스타에는 불참한다. 이와중에도 리그 28경기 출전 8골을 기록한그는

시즌막판에 열린 독일 FA컵(DFB포칼) 결승전에서 카이저슬라우턴을 상대로

팀의 3-1 승리를 확정짓는 세 번째 골을 터뜨려 2년연속 우승트로피를 거머쥐게된다.

그리고 차범근의 연봉인상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단의 뜻에의해 연봉이 오르며

고액연봉자대열에 합류한다.(연봉이 올라가면 이적료도 올라가는 방식)

81/82시즌 리그 11골 UEFA컵 에서 1골을 기록

82/83시즌 33경기 출전해 15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득점자에 오른다. 이 기록이 더욱다 가치있는이유는

당시 팀이 10위에그치는 부진속에 있었다는점이다.

그리고 차범근의 재계약을 앞두고 재정난이 겹친 프랑크푸르트는 여러팀들로부터 입단제안을

받는다.


당시 차범근을 눈독들였던 팀들은 슈투트가르트와 이탈리아 나폴리, AC밀란등도 포함되어있다.

고심끝에 차범근이 선택한팀은 당시만해도 하위권에 불과하던 바이엘 레버쿠젠.

모기업인 바이엘사가 클럽이 아닌 그룹 임원진까지 동원해 정성을들인것이 차범근의 마음을 움직인것이다.

결국 차범근은 1983년 7월, 135만마르크(약4억원)의 이적료프랑크푸르트에 안겨주며 레버쿠젠으로 이적한다.

당시 차범근의 연봉은 52만6,000마르크(약1억5천만원)으로 팀내 최고이자

분데스리가 톱클래스 수준이였다.

지금이야 분데스리가 강호로 꼽히지만 당시만해도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독일에진출했던 79년 처음으로 올라온

약체중의 약체였다. 차범근曰 "1부리그 잔류만해도 보너스를주는걸보고 무척 놀랐다."

그무렵 레버쿠젠감독은 이후 한국의 올림픽대표팀을 맡기도했던 디트마 크라머였다.

일본대표팀에 동메달을 안기기도했던 명장으로 뮌헨,프랑크푸르트등을거쳐 레버쿠젠 지휘봉을잡았을때이다.

차범근의 기량을 높이평가한그는 차범근을 주축으로 공격진을 재편했다.

최전방에서 팀의 공격을이끈 차범근은 입단첫해 12골을터뜨린것을비롯 , 3년연속 두자릿수의 골을기록하며

팀을 6위까지 끌어올린다. 아직까지 차범근이 레버쿠젠에서 환대를받는 이유중 하나다.

하위권팀을 중상위권 강호로 끌어올린것이다.

반면 차범근이 나간 프랑크푸르트는 강등권에서 허덕이고있었다.

그리고 또한가지 85년 덴마크 축구영웅 알란 시몬센이 갖고있던 분데스리가 외국인선수 최다골인

76골을 넘어섯다는것이다. 이후 차범근이 세운 98골은 1999년 스위스출신의 사퓌자에의해 깨진다.

현재는 브라질출신 엘버가세운 133골이 외국인선수 최다골기록이다.

85/86시즌당시 차범근은 17골을기록, 득점왕인 스테판쿤츠의 22보다 5골뒤졌다.

하지만 스테판 군츠는 패널티킥으로 6골을 기록한반면 차범근은 패널트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차범근이 골을기록한 14경기 (11승 2무 1패) 팀 성적 (15승10무9패)를 압도한다는걸봐도

차범근이 팀에 중추나 다름없다는걸 보여준다.


그리고 다가온 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에서 절정의 골감각을 보여준 차범근은

같은조였던 아르헨티나,이탈리아,불가리아선수들의 주요 경계대상이였다.

차범근만 막으면된다는 말이나올정도로 견제가 심했다고한다.

한편 한가지 에피소드는 당시 차범근의 대표팀합류여부를 두고 국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는데

해외에서는 이것이 뉴스감이였다. 유럽 최고의선수였던 차범근의 합류여부를두고

왜고민하는지 알수없었던 탓이다.

대표팀합류가 결정되자 레버쿠젠은 팀내최고스타의 몸상태를걱정해

팀 닥터인 졸렉을 대표팀 훈련지로 급파했다.

팀내의 후배들에게 선진축구의 기술을 전수하며 준비했지만아쉽게도 1무2패로 조별리그탈락한다.

다시 분데스리가로 돌아온 차범근은 서른다섯살에 미드필더로 보직을변경, 팀공격을

셋업하는데 큰 역할을맡아 또한번 리그6위를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덕분에 87/88시즌

UEFA컵출전권을 또 다시 획득한 레버쿠젠은 리그에서는 8위에그쳤지만 UEFA컵에선

새로운 역사를쓰게된다.

당시 챔피언스컵(지금의 챔피언스리그 전신)은 말그대로 각 리그 챔피언들만의 경연장이었다.

따라서 각 리그 2~5위권 안팎의팀들이 출전하는 UEFA컵은 지금의 챔피언스리그와 비슷한

위상과 수준을 자랑하는 대회였다.

레버쿠젠은 16강에서 네덜란드강호 페예노르트를 한골차로 꺽고 8강에올랐고

8강에선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를 만났고 바르셀로나는 전시즌 리그준우승자격으로

출전한 상태였고 수비사레타, 게리 네커 , 베른트 슈프터등을 선발로내세웠다.

1차 캄프 누 원정에서 0-0으로 비긴 레버쿠젠은 홈에서 1-0승리하며 4강에 안착했다.

그리고 4강에서서 리그라이벌인 브레멘을꺽고 결승에진출했다.


홈 & 어웨이로 치뤄진 에스파뇰과의 결승전은 드라마 그자체였다.

바르셀로나를 연고로둔 에스파뇰의 홈구장에서 열린 1차전은 레버쿠젠의 완패였다.

차범근은 전반 18분 부상으로 교체아웃되었고 결국 0-3으로 패했다.

2주뒤 1988년 5월 18일 홈구장으로 에스파뇰을 불러들인 레버쿠젠의 목표는 '우승'보다 '선전'이였다.

결승에서 3골차를 뒤집기란 어려운일.

역시나 전반전은 0-0으로 끝나고 에스파뇰은 우승을 확정하는듯했다.

하지만 게임은 끝나지않았다 후반 12분 브라질국가대표 공격수 티타가 수비수의 실수를틈타 선제골을 넣은것이다.

기세가 오른 레버쿠젠은 6분뒤, 괴츠가 추가골을넣어 2-0으로앞선다.

1,2차합게 2-3으로 한골만더넣으면 연장전으로 갈수있는상황

하지만 골은 좀처럼 터지지않았고 종료9분을남겨놓은순간 상대진영 오른쪽에서 올라온

프리킥이 페널티박스 안쪽에서 높게 솟아오른 차범근의 머리에맞고 에스파뇰 골문안쪽에 곶힌다.

합계 3-3 연장에들어간 양팀은 골을넣지못하고 승부차기에 들어간다.

승부차기에서도 드라마는 이어진다 레버쿠젠은 첫번째와 두번째키커가 실축 0-2로 끌려가게된다.

하지만 이후 에스파뇰의 3번연속실축으로 3-2역전 우승컵을 거머쥐게된다.

이미 팀 결과와상관없이 팀을 떠나는것이 확정되어있던 에리히 리벡감독은

우승이 확정된직후, 다른선수들을 다 제쳐놓고 차범근에게 달려와 긴 시간 진한포옹을 나눠 팬들의 감동을더했다.

레버쿠젠역사상 첫우승이자 차범근의 UEFA컵 두번째우승은 유럽축구역사상 아홉번째로 두개의팀에서

UEFA컵을 거머쥐는 진기록도 갖게된다.

한국나이 서른여섯에 유럽무대 정상에 오른 차범근은 그해여름 'AIDS퇴치 세계올스타전'에

베켄바우어,플라티니,베스트,키건등과 함께 초대된다.

여건상 참석은 불발되었지만 당시 차범근의 위상을 보여주는 계기가아닐수없다.

유럽제패이후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한 차범근은 '토탈사커의 창시자' 리누스 미셸 감독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평일에는 독일축구협회가 주관하는 지도자 강습에 참석하고 주말에는 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특혜'를 누린다. 유로88에서 네덜란드를 정상으로이끈 미셸감독은 팀내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차범근을 극진히 배려했고 덕분에 차범근은 현역선수로는 보기드물게

주전으로뛰면서 지도자수업까지 병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한다.

바이에른 뮌헨등의 감독을 역임했던 펠릭스 마가트감독이 당시 지도자수업 동기다.

그리고, 1989년 여름. 마지막 시즌역시 주전멤버로 마친 차범근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수생활을 마친다.

차범근이 독일로 떠날당시 이런말을했다.

"저는 서독으로 떠납니다. 앞으로 좋은 축구 기술을 배워서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꼭 한국의 축구 발전을 위해 기여하겠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10년간 자신에게주어진 후진양성을 한시도 잊지않았다.

그예가 한국으로 돌아온 차범근은 지도자생활을위한 프로팀이아닌 아무도 관심을두지않았던

유소년축구교실을열었다. 유럽의 유스시스템이야말로 한국축구발전의 첫단계라고 확신했다고한다.

1990년 용산구,구로구,은평구 세곳에서 시작된것이 바로 '차범근 축구교실'이다.

차범근 축구교실이야말로 자신의 평생직장이라고한다.

차범근은 지도자로서도 인정을받아 지도자첫해 2위를기록하고

당시 불안하던 국가대표감독직에 앉게된다.

당시 예선에서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유명한 도쿄대첩까지

거침없는 무패행진으로 6경기만에 본선진출을 확정짓는다.

그때당시 예선을본사람들이라면 알것이다. 얼마나 파괴력있고 강했는지 ..

당시 국민들은 차범근을 축구 대통령이라 치켜세웠다.

하지만 월드컵조별예선에서 멕시코에서 1-3역전패

그리고 9년전 아약스에서 자신에게 사인을받던 선수들이 주전으로뛰던

네덜란드에 0-5 참패를 당한다.

당시 프랑스로 떠나기 하루전 황선혼의 부상 서정원과 이상윤의 컨디션하락이까지 ..

하지만 여론은 차범근을 가만놔두지않았고 결국 월드컵도중경질이라는 철퇴를 내리게된다.

그로부터 5년간 그는 한국을떠나 독일, 중국을 떠돌며 살아야했다.

98월드컵때 차범근만의 잘못이 아님을깨닫게된 시간이 5년이다.

98년 월드컵도중경질이라는 철퇴와 비난속에서도 그는 귀국후 이틀후 차범근축구교실에

나갔을만큼 비극속에서도 한국축구를 놓지않았다.

차범근이 한국축구에서 이루어놓은 업적은 말로다 할수없을만큼 많다.

한국축구에서 그와같은 골결정력과 돌파력 90분간 지치지않는 체력을갖춘

세계 톱클래스라 인정받는선수 언제쯤 다시나올수있을까?

그는 진정한 대한민국축구의 레전드다.



출처 : 알싸 글쓴이 FCSEOUL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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