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연재]미라주 (1-2)
게시물ID : readers_164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이안다
추천 : 2
조회수 : 27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10/04 09:57:03

 한 달에 한번 쓸까 말까 하는 성안의 회의실에는 숨을 쉴 수가 없을 만큼 먼지가 쌓여있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 놓였는지 모를 종이뭉치가 굴러다닌다. 어린애들 대여섯명이 전쟁놀이라도 한 듯, 멀쩡하게 놓인 가구가 없다. 왕의 시종인 파로는 청소를 지켜보며 지난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 생각해보니, 두시는 아예 참석을 안했었다. 그렇다면 파로또한 참석하지 않았던게 분명하다.

귀족 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거야?

파로는 청소까지 감시해야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몇 시간 뒤에 귀족들이 올 것을 생각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금방 포기한다.

탁자위에서 돌돌말린 황색 종이 뭉치를 발견한다.

“이게 뭐죠?”

파로가 묻는다. 지루했던 손은 벌써 두루마리를 풀고 있다.

“며칠 전 성으로 온 우편입니다. 혹시 몰라 두었습니다.”

테이블을 치우던 하녀가 말한다. 파로는 그것을 편다. 꽤 길어서 내용을 파악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린다. 의자에 앉아 좀 더 자세하게 읽어보고 싶었지만, 주변에는 왕좌와 귀족들이 앉을 의자밖에 없다. 하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파로는 어쩔 수 없이 종이를 만다. 그를 지켜보는 다른 하인들은 파로가 종이에 있는 빽빽한 글자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파로는 그것을 잘 챙겨둔다. 정리가 거의 끝나간다.

“귀족들은 언제쯤 온다던가요?”

파로가 묻는다.

“한시간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다른 하인이 대답한다. “준비하시기는 빠듯할 겁니다. 제가 폐하를 모시고...”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파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 사람’에게서는 연락이 오던가요?”

“오늘 중으로는 도착할듯합니다.”

그의 하인이 대답한다. 오늘 중이라.

“그럼 저는 제 방에 있다가 바로 폐하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파로가 성큼성큼 걸어 문에 다다른다. 그의 하인은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지만, 파로가 먼저 문손잡이를 잡는다. “귀족들이 도착하면 이곳에서 기다리라 일러주시면 됩니다.”

문을 닫는다.

두시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전 왕의 가족들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은 모두 쫒아내고,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 분명 필요한 일이기는 했으나, 사람들의 경험이 아직 부족한 탓에, 파로가 온갖 곳에 참견을 해야 한다. 시간을 많이 빼앗는 일이니만큼 변수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디 변수가 이것뿐이랴.

한참을 걸어, 파로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3년 전만 해도, 왕자가 썼던 방이다. 오래전에 이 방이 일반사람들의 집보다도 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파로는 주변의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책상으로 다가간다. 의자에 앉아 두루마리를 겨우 펴려고 하는 순간에 노크 소리가 들린다.

대체 또 무슨.

파로가 서랍 안 비슷비슷한 종이 속으로 두루마리를 집어넣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을 가로지른다.



시덥지 않은 일을 마치고, 왕과 함께 회의장으로 다시 향한다. 방금 전과는 달리,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에는 상당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문손잡이를 잡으면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파로의 시선은 두시에게서 비껴나있다. 문을 열기까지, 왕과는 한마디 대화도 지나지 않는다.

왕이 사용하는 복도는 귀족들이나 하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달라 왕좌로 바로 향한다. 왕좌는 단 위에 있는데, 귀족들이 앉는 테이블과 꽤 많이 떨어져있다. 휘장이니 뭐니 해서 장식도 많고,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의자 자체도 엄청나게 화려하다. 왕좌 앞에는 귀족들의 눈이 왕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얇은 가리개가 드리워져 있어 귀족들은 왕의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다, 물론, 지난 왕 때에는 없었던 물건이다.

이에 반해 파로는 가리개 앞으로 나가 귀족들과 얼굴을 마주해야한다.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차라리 의자를 앞에 두고 말하는 게 낫지.

회의가 있는 날, 다른 일정이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파로는 두시가 의자에 제대로 앉는지 확인한다. 가리개를 살짝 걷히고 밖으로 나간다. 이후에, 가리개가 원래 위치로 돌아갔는지 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폐하가 오셨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로가 말한다. 명색에 회의이지만, 별로 생산적이지는 못하다. 파로가 왕이 한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을 늘어놓는다. 귀족들은 앉아서 듣는다. 귀족중 하나가 이의를 제기하면 끝도 없이 길어지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굉장히 드물다.

한마디로 말해, 미처 없애지 못한 의례적 행사일 뿐, 모든 일은 왕의 뜻 대로이다.

파로가 그의 키 사분의 일정도 되는 종이를 숨도 안 쉬고 읽어 내린다. 중간 중간에 귀족들과 눈이 마주친다. 그들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은 참으로 한결같다. 지루해. 심심해. 따분해. 이미 익숙해진 파로는 감정의 동요 없이 해야 할 말을 마친다.

“그럼, 이의 있으십니까?”

회의를 끝낼 준비를 하며 파로가 말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소리가 그의 귀에 박힌다. 이런.

“오늘 일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사병에 대해 폐하와 이야기하고 싶소이다.”

밀면 굴러갈 듯한 늙은 귀족이 이야기한다.

“말씀하시지요.”

파로가 말한다.

“폐하와 이야기하고싶다 하였는데.”

귀족의 표정이 꽤나 볼만하다.

“제가 폐하의 말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잊으신겁니까?”

파로가 대응한다.

“하인이 아니라 폐하와 이야기 하겠다 말했다.”

귀족의 목소리가 점점 굳어간다.

“제가 폐하를 대변하고 있다 이야기 했습니다.”

파로는 물러나지 않는다. 귀족이 나지막히 욕지거리를 내뱉는게 들린다. 정적이 흐르는 동안에도, 파로는 차분하다.

결국, 귀족이 입을 연다.

“내 사병을 움직이는데에 성에 동의가 있어야 한다더군.”

귀족이 말한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양해하셨으면 합니다.”

파로가 대답한다.

“당신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던데.”

귀족이 말한다.

“맞습니다.”

파로가 말한다.

“이 성에는 폐하와 자네 하나밖에 없나?”

귀족이 말한다. 그의 표정이 차츰 뭉개진다.

“폐하가 하시는 일중 몇 가지를 제가 돕고 있을 뿐입니다.”

파로가 단어선택에 유의하며 천천히 말한다.

“어찌 하인 따위가 폐하의 일을 도울 수 있는가?”

귀족의 얼굴에 냉소가 드러난다.

“귀족께서 말씀하신 이야기의 요점은 그것이 아닌듯 합니다만.”

파로가 차분하게 말한다.

“하인 따위가 내 말에 토를 달아?”

귀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쌓아왔던 것을 토해내듯, 파로에 대한 불만을 내뱉는다. 일개 하인 주제에 왕을 등에 업고 귀족들을 통제하다니? 다른 귀족들은 신나서 구경하는듯하다. 귀족의 말 사이사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족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지금당장 거리로 나가도, 이곳보다는 조용할 듯하다.

“폐하의 앞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시죠.”

파로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마치 왕이 말한 것처럼, 한마디씩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단번에 입을 닫는다. 석상처럼 앉아있던 두시가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귀족들의 얼굴은 얼어 붙은 것 같다.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인 따위가? 그들의 표정이 전하는 말은 명료하다. 파로는 열댓 명의 귀족들이 내보내는 냉기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파로의 눈초리는 오히려 귀족들의 화를 돋운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뚫고 하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온다. 그의 귀에 말 몇 마디를 전한다. 아예 멈춰 버린 듯한 방 안에 하인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파로의 목소리는 싸늘하다. 귀족들을 뒤로하고 베일 뒤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왕을 모시고 방을 나선다. 귀족들이 그를 어찌 보는지 빤히 느껴진다. 뒤에서 나지막히 하는 말들도 들리는듯하다. 입을 다문 파로는 답답함을 억누른다.

수없이 많은 복도를 가로지른다.



넓은 방 안, 이수는 기다란 소파에 앉아 시간을 죽인다. 이수의 모자는 작은 탁자 위에 올라가있다. 밖에 있는 여자들이 치렁치렁한 치마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에 비해, 그녀의 옷은 남자들의 것과 같다. 키도 남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 머리는 도저히 묶을 수 없을 만큼 짧다. 분명 눈에 띌 만한 인상착의지만, 한 번도 이 일 때문에 불편을 겪은 적이 없다. 사람이 많던 적던, 사람들은 그녀와 부딪치기 전까지는 잘 알아차리지 못 하는 듯하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지나도, 그녀는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누군들 안 그럴까. 게다가 이수는 이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녀를 고용하는 사람들은 일을 극비에 부치길 바란다. 일이 밖으로 세어나가면 감당해야 할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이수 또한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일이 들어오질 않으므로, 알아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곳과 같은 큰 성에서는 이야기가 퍼지기 쉽기 때문에 하인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아 꼬투리 잡힐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한다. 때문에 기다리는 동안은 답답하지만, 이렇게 하지 못하면 일을 할 수가 없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자,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 방을 구경한다.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가 벽을 매우고 있고, 긴 테이블을 소파가 둘러싼다. 테이블 위에는 책들이 어질러져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낡은 가죽책을 집어든다. 왠 동화집?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어보지만, 금방 흥미가 떨어진다. 그녀의 발걸음이 다시 방안을 맴돈다. 추운 날씨는 아닌데도, 벽난로에는 장작이 쌓여있다. 커다란 카펫에 놓인 수는 꽤 화려하다. 커튼이 늘어뜨려져 있는 아치 너머를 슬쩍 들여다본다.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눠 놓은 듯한데, 따로 떼어 생각해봐도 지나치게 넓다. 그녀를 둘러싼 가구들은 귀족들의 것보다도 값비싸 보인다.

하인이 쓰는 방이라 하지 않았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가 들어온다. 이수의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온다.

“누구시죠?”

이수가 묻는다.

“편지를 보낸 사람입니다.”

남자가 약간 망설이며 말한다.

“당신이 왕이라는 말을 믿으라고요?”

이수가 남자를 훓어 본다. 손으로는 그녀를 이곳으로 오게 한 편지를 편다. 말미에 커다랗게 쓰여진 두시의 서명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수를 보는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파로입니다. 폐하의 잡무를 담당하는 하인입니다.”

남자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제가 지금 좀 피곤해서, 자리에 앉아 남은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만.”

남자가 의자를 권한다. 이수가 앉은 뒤에 그가 짚은 의자는 누가 봐도 상석이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의자로 가다가 이수의 시선을 의식한다. 이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저는 의뢰인과 직접 대화 하고 싶은 데요.”

이수가 말한다.

“제가 편지를 보냈다 하지 않았나요.”

파로가 받아 넘긴다. “폐하께서는 이런 일로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으십니다.”

이수는 맞받아치려다 입을 다문다.

“수긍하셨다 생각하고 얘기하겠습니다.”

파로가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서 그림을 끄집어낸다. 빛이 바랜 풍경화. 넓은 강이 종이를 채우고있다. 강 너머에는 동굴이 있고, 뒤에는 산이 첩첩이 늘어서있다. 강 위에 떠있는 작은 나룻배.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삿갓을 쓴 남자.

이수의 손이 종이를 집는다. 파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사진 속 남자를 데려오시면 됩니다.”

파로가 말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남자에 대한 정보도 같이.”

“남자를 ‘데려오라’.”

이수가 그의 말을 되풀이 한다. 그림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전 탐정이나 경찰이 아닙니다.”

“알고있습니다.”

파로가 말한다.

“제가 할만한 일은 아닌 것같은데요.”

이수가 다시 한번 말한다.

“유감스럽게도, 제 생각은 당신과 많이 차이가 있는 듯하군요.”

파로가 말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잡아 땔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수의 말문이 막힌다. 파로와 눈이 마주친다. 여유 있어보이는 파로는 그녀의 머릿속을 꿰뚫는 듯하다. 파로는 피곤하다는 아까의 이야기는 잊어 버린채, 지금의 대화가 무척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대체 이런 애은 어디서 주워 오는거지?

“의뢰를 수락하셨다 생각해도 되겠지요.”

파로가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희도 넋 놓고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며칠간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계획을 짜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정보는 저희가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파로가 외워놓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그녀가 의뢰를 거절할거라는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제가 당신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야기를 좀 해보죠.”

파로가 잠깐 일어나더니 이것저것을 챙긴다. 이수는 그사이, 그림을 집어 든다.

이수는 단 한번도, 그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으리라 생각한 적이 없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