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다른 이들과 견해 차이로 인해 작거나 큰 논쟁을 벌이곤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쟁은 새로운 도출점 없이 공허하게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하고 남은 자리에 감정이란 찌꺼기만 남길 뿐입니다. 논쟁도 대화의 한 형식일진대 왜 이러한 병폐가 있을까 고민하다 최근 어떤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논쟁과 토의란 말을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두 용어에 대한국어사전 따위의 건조한 정의는 지금 제 글에선 그닥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초점을 혼란한 현실에 두고 있으니까요. 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요즘의 우리 사회에서는 토의란 말만 있을 뿐 그 실체는 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토의로 이름불린 모임마저도 대화가 진행될수록 논쟁으로 흘러가곤 하니까요. 결국 공허한 메아리 뒤에 설전이 남긴 더러운 찌꺼기만 굴러다닐 뿐입니다. 토의가 토의로 끝나는 경우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 토의의 형식을 빌어 자기 견해를 추인받는 왜곡된 경우만 본 듯하네요. 뭐 이 경우도 더러운 감정이 남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토의마저 논쟁이 되는 세태, 우리는 말과 생각의 정글 속을 누비는 사냥꾼이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칫하면 화제를 돌리는 물타기라는 위험한 늪지에 빠질 수도, 관련없는 외적 요소로 내용의 권위나 진실성을 흠집내려는 가시독에 찔릴 수도, 비아냥과 조소로 무장하고 앵앵거리는 독충의 습격을 받을 수도, 편가르기에 따른 오도와 왜곡이라는 상대 부족의 맹습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사냥꾼으로서 독과 함정, 세력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려 합니다. 결국 벌레들에 의해 뜯기는 한줌의 뼈무더기만 한켠에서 썩어갑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토의나 검토는 사라지고 대립적인 논쟁만 있으며 심지어 그런 논쟁에 익숙해지다 못해 즐기기까지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됐을까요? 토의는 상대와 견해가 같아야 성립할 수 있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까요? 토의라고 시작해 논쟁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이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논쟁으로 시작해서 토의로 끝나는 경우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논문을 써야하는 업을 가진 제 입장에서 남에게 듣고 저도 말하던 바는 명확한 결론이었습니다. 논문에는 주장하는 바가 뚜렷해야 한다고 강조했었습니다. 그렇게 쓰면 글이 완결미가 있게 됩니다. 이러니 몇몇 미국 논문들을 접하면서는 설명만 구구절절하지 결론이 불분명한 스타일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에 돌이켜 제가 속한 학계를 보자니 서로 자기 말만 할 따름이라 서로 다른 주장들이 사방으로 끌어대니 중심은 언제나 제자리였습니다. 이런 돌이킴으로 저는 미국 논문들의 미덕을 한 가지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 스타일에서는 결론보다는 대상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우선이었던 겁니다. 결론은 좀 미뤄두고 실제 대상, 즉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을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 그대로 보려고 하는 미덕이 있었습니다. 그러하니 해석에 따른 결론보다 성세한 분석이 우선이었던 겁니다. 우리는 상대에게 결론부터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분석을 먼저 말하면 아픈 머리를 흔들면서 귀찮아하고 짜증을 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서로에 대한 몰이해로 정글에서의 긴장감 넘치는 사냥과 습격은 어째선지 즐기려 합니다. 우연히 만난 다른 사냥꾼에세 손내밀어 맹수를 함께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찔러 상처입히는 사이 어느덧 우리 등 뒤로 현실의 문제라는 맹수의 발톱과 이빨이 번뜩이는 경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