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왜의 관계에서 다음 기록을 주목할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성왕 7년(408)봄 2월에 왜인들이 대마도에 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 신라를 습격할 모의를 한다는 말을 들은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을 치려 하였다. 그때 서불한 미사품이 병기는 흉기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고 하며 큰 바다를 건너 적을 치다가 만일 승리하지 못하면 후회한들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험준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오면 침입을 막고 신라가 이로우면 나가서 그들을 잡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것이 남을 유인할지언정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계책이라고 하였다. 실성왕은 그 말을 따랐다. 왜가 대마도에 근거를 두고 신라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광개토왕비 신묘년조의 기록과 같이 왜가 391년 이래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구태여 대마도에 영을 설치하고 신라를 습격할 모의를 할 필요가 없었을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사정을 무시하고 신라와 왜의 관계를 이야기한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다. 왜는 '삼국사기' 기록대로 한반도에 있었던것이 아니라 대마도에 영을 설치하고 신라를 침범한 사실이 확인된다
광개토왕비 신묘년조 해석의 문제: 마립간 시대 왜의 존재에 대한 엇갈리는 견해가 있다. 광개토왕비의 소위 신묘년조를 둘러싼 해석이 그러한 차이를 불러왔다. 신묘년조는 다음과 같다.
A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B1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2百殘□□新羅以爲臣民
신묘년 조의 기록중 사료 B는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서(또는 신묘년 이래)백제,□□,신라를 쳐서 그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인들의 선전을 위한 문장일 뿐이다. 그러한 사실을 무시한 일본의 실증사학은 그 자체가 역사왜곡의 도구였다. 일본의 실증사학은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치적 목적에 의한 실증사학 때문에 한국고대사는 왜곡, 말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