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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오초칠국의 난 - 오왕 비의 최후
게시물ID : history_164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86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6/20 15:18:12

태위 주아부가 이끄는 한나라 군에게 패배한 오왕 유비는 남은 군사 수천을 이끌고 밤을 틈타 단도로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주아부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계속 추격하여 단도에 주둔한 오나라 군을 격파하고 남은 오나라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오왕 유비는 어쩔 수 없이 동월로 도망가 몸을 의탁했습니다. 동월엔 아직 병력이 1만 여명 이상은 있었으므로 여기를 기반으로 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으는 등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습니다. 한편 오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경제는 전선의 모든 장군들에게 다음과 같은 실로 무시무시한 조서를 내렸습니다.

 

 

「무릇 듣건대 착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써 그에게 갚아주며, 그릇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그에게 갚아준다고 하였다. 고조 황제께서 친히 공덕을 표창하시어 제후를 세우셨는데 유왕, 도혜왕은 왕위가 끊어져 뒤를 잇지 못하였다. 문제께서는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유왕의 아들 수, 도혜왕의 아들 앙 등을 왕으로 세워 그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고 한나라의 번국으로 삼으셨으니, 그 덕은 천지에 어울리고 밝기는 일월과 나란한 것이다. 오왕 비는 덕을 배반하고 의를 등지고는 세상의 도망 다니는 죄인들을 꾀어들어 천하의 화폐를 어지럽히고, 병들었다 칭하고 입조하지 않은 지 20여 년, 유사가 여러 차례 비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효문 황제께서는 그를 관대히 대하여 그로 하여금 행실을 고쳐 옳은 일을 하게 하고자 하셨다.

 

지금 결국에는 초왕 무, 조왕 수, 교서왕 앙, 제남왕 벽광, 치천왕 현, 교동왕 웅거 등과 연합하여 모반하였으니 대역무도하게도 병사를 일으켜 종묘를 위협하고 대신 및 한나라의 사자를 학살하였으며 많은 백성을 겁주어 무고한 사람을 일찍 죽게 만들고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매우 포학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 앙 등은 또 더욱 대역무도하게도 종묘를 불태우고 종묘의 어물을 노략질 하였으니 짐은 이를 심히 가슴 아파하여 흰 옷을 입고 정전을 피하는 바이니 장군들은 마땅히 사대부들을 독려하여 반역의 적도를 쳐 무찌르게 하라. 반역의 무리를 치는 자는 깊숙이 들어가 많이 죽이는 것을 공으로 한다. 목을 베고, 사로잡은 사람으로 300석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는 모두 죽여 놓아주지 말라. 감히 이 조서에 대해서 의론하거나 이 조서대로 하지 않는 자는 모두 허리를 벨 것이다[1].」

 

 

이러한 조서가 내려올 때 즈음, 주아부는 오왕 유비가 동월로 도망친 것을 파악한 한나라 측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동월을 치는 대신 현상금 황금 1,000근을 거는 한편 사람을 보내어 동월 꾀었습니다. 동월 측에서도 오왕 유비와 협력해서 한나라와 싸우는 것은 불이익이라고 판단하여 한나라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동월측은 유비가 군사들을 위로할 때 사람을 시켜 유비를 창으로 찌르고 그 머리를 그릇에 담아 치전(네 마리의 중등 말이 이끄는 마차) 편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유비가 그렇게 죽자 아직 남아서 저항을 하고 있던 오나라의 군대도 속속 태위 주아부나 양효왕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유비의 아들인 자화와 자구는 민월로 도망치고[2], 이즈음에 초왕 무는 자살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오왕 비의 신하로써 성양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주구에게도 이러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는 유비가 회수를 건너기 직전 직접 오왕 비에게 탄원하여 하비로 나아가 하비 현령을 죽이고 스스로 군대 3만을 모아 북쪽 성읍을 공략하고, 순식간에 군사를 10만으로 증가시키고 성양에서 성양 중위군을 격파하는 등 기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오왕 유비의 패전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주구는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판단하고 군을 되돌려 하비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비로 도달하기도 전에 등에 종기가 나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들 군대가 유비와 합류하였다면 한나라로써는 골치 아픈 일이 되었을테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왕 유비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조왕 유수는 아직 한단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상 유비의 죽음으로써 3개월간 천하를 뒤흔들었던 동성제후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 반란이 성공했다면 고조 유방이 그 고생을 해가면서 건국했던 한나라는 갈기갈기 찢어져서 다시 전국시대의 상황이 되거나 아니면 서진시대의 <팔왕의 난>의 프리퀄 버전이 되어 통일 왕조의 등장은 더 뒷날로 엄청나게 미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무제 시기의 그 엄청난 위업(물론 병크도 많았습니다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조 시절과는 달리 한경제 시절에 이르러서는 중앙정부의 힘이 제후들을 압도하게 되어, 일개 제후가 강대해보았자 상대가 불가능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동안 중앙정부는 이천석 이상의 관리들과 그 자제들을 중앙정부의 통제가 용이한 관중 지역으로 옮기게 하는 등 조심스럽게 힘을 기르고 있었고[3], 알게 모르게 제후국들의 힘은 약화시켜나갔습니다. 제후국의 몰락은 어쩌면 필연적이었고, 조조의 헌책이나 오초칠국의 반란은 그 불길을 더욱 앞당긴 것이었습니다.

 

 

[1] 여름 6월, 조칙을 내어 이르길 "이번에 오왕 비등이 반역하여 병사를 일으켜 서로 위협하고, 이민(吏民)들을 그르치게 했으나, 이민들은 그만둘 수 없었다. 지금 비등은 이미 멸하였으니, 이민들 중 응당 비등에게 연좌되거나 군대서 도망치다 체포된 자는 모두 사면하라. 초 원왕(元王)의 아들 예(예) 등은 비 등과 같이 역모를 꾀했으나, 짐이 차마 법을 더하지 못하겠으니, 그 적(籍)을 없애 종실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 한서 경제기

 

[2] 오왕의 아들 자구가 민월로 달아나서 동구가 자기 아버지를 죽인 것을 원망하며, 민월에게 동구를 치라고 계속 권유하였다. 건원 3년, 민월은 군때를 동원하여 동구를 포위하였다. 동구는 군량이 떨어지고 곤경에 처하여 투항해야 할 순간, 급히 천자에게 사람을 보내 보고하도록 하였다. 천자가 태위 전분에게 물으니, 전분이 대답하였다.

 

 

「월나라 사람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은 본시 흔한 일이며, 반역 또한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러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구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나라 대부터 예속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자 중대부 장조가 전분을 힐책하며 말하였다.

 

 

「힘으로 구제하지 못하고, 덕으로 보살피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실제로 할 수 있다면 왜 그들을 버린다는 말입니까? 진나라는 함양까지도 버렸습니다. 어떻게 월나라만을 버린 것이겠습니까? 이제 작은 나라가 곤궁에 처하여 천자께 급히 사정을 호소하는데도 천자께서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디에 가서 호소할 것이며, 또 천자께서는 어떻게 온 나라를 자식처럼 보살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자가 말하길

 

 

「태위는 나와 함께 이를 의론하기에 부족하오. 나는 막 즉위하였는데 호부를 내어 군국에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고는 장조에게 부절을 지니고 회계에서 군대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자 회계 태수는 호부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내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장조는 결국 사마 한 사람을 베고 천자의 뜻을 이해시킨 다음. 원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가 동구를 구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민원을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동구는 온 백성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모든 백성들이 강회 일대로 이주하였다. - 사기 동월열전

 

 

[3] 고제 9년 11월, 제와 초의 큰 씨족인 소씨(昭氏) 굴씨(屈氏) 회씨(懷氏) 경씨(景氏), 전씨(田氏)의 다섯 성을 관중으로 옮기고, 전택의 편리를 봐 주었다. - 한서 고제기

 

고제 11년 6월, 영을 내려 사졸(士卒) 중 촉(蜀) 한(漢) 관중(關中)으로 따라 들어간 자에게 종신토록 부역을 면하게 했다. - 한서 고제기

 

이해 고조는 초나라의 귀족 소씨, 굴씨, 경씨, 회씨와 제나라의 귀족 전씨를 관중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 사기 고조본기

 

진나라의 효공과 소공이 함양에서 나라를 다스렸으므로 한나라 때에는 이를 도성으로 삼았고, 장안 부근에 여러 능현(전한 원제 이전에는 황제의 능묘를 하나 세우면 능묘 부근에 현을 하나씩 두어 그 현의 백성들이 능묘를 섬기도록 하였습니다)을 세웠으므로, 사방의 사람과 물자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 사기 화식열전

 

 

※ 출처 : 사기 고조본기, 사기 강후주발세가, 사기 오왕비열전, 사기 화식열전, 한서 고제기, 한서 경제기, 중국의 역사 진한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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