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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의 정체--제대로 압시다....
게시물ID : humorbest_1650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음의눈
추천 : 33
조회수 : 1676회
댓글수 : 0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7/05/06 02:54:48
원본글 작성시간 : 2007/05/05 09:13:18
서대문독립공원은 친일사대적 장소’  
이수병기념사업회 70여명, 독립문 일대 역사기행 가져 
 
 2007년 04월 10일 (화) 10:17:32 김양희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 지난 8일 이수병기념사업회 회원과 가족 등 70여명이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기행'을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이수병기념사업회 회원과 가족 등 70여명은 지난 8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기행’ 행사를 가졌다.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는 1990년 이수병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매년 4월이면 서울과 수원 양 교정에서 추모제를 진행했으나 지난 2005년 30주기 추모제부터는 인혁당 대책위 차원의 합동 추모제로 진행되면서 추모제의 의미가 퇴색돼 올해 32추모제에 앞서 이번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해방 이후에는 독재 정권이 민주 투사를 가두었던 서대문 형무소와 구한말 영은문을 헐고 지은 독립문 등이 자리한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행사를 준비한 정해랑 경희민주동문회장은 “최근 인혁당 희생자들의 무죄 판결로 명예회복은 됐으나 가해자들도 명예회복이 될 정도로 역사가 수구로 회귀하고 있는 실정이다”며 “이번 행사 참가로 후배들이 열심히 사는 계기가 됐으면 바란다”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과 달라 

  ▲기행 참가자들이 김종욱 경희대민주동문회 기획부장에게 서대문형무소 역사기행의 의미에 대해 듣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이날 행사에서 김종욱 경희대민주동문회 기획부장은 서대문 독립공원이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독립의 의미와 다른 독립을 가진 친일 사대적인 장소라고 밝혔다. 

김 부장에 따르면 독립문은 1895년 2월(고종 32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조직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대주의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밖의 서구 열강과 같은 자주독립국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고 1896년 7월부터 전국민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한 성금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시키고 일본의 속국으로 삼기 위해 우리의 독립을 강조한 것으로 이 당시 사용한 독립의 의미는 주권을 찾기 위한 독립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 일본이 강화도조약과 시모노세키조약 당시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라고 강조하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독립문의 앞 모습.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격인 이완용이 썼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증거로 몇 가지를 꼽자면 독립문의 한글과 한자 현판을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격인 이완용이 썼으며 1928년 조선총독부는 4,0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보수공사까지 했다. 만약 독립문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독립투사들을 가두는 형무소 앞에 독립문이 그대로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김 부장의 설명이다. 

 

또한 우리가 배워온 역사의 상식으로는 독립협회는 애국자들이 모여 나라의 자주독립을 표방해 결성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간판격으로 내세우는 이상재, 주시경 선생을 빼고 거의 모조리 친일 인사가 장악하고 있다. 

 

고문에 필립(서재필),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며 1898년(2대)에는 이완용이 회장이 되고 부회장으로 윤치호가 등장한다. 3대에는 윤치호가 회장이 되고 4기에는 일본인도 회원으로 받을 정도로 친일을 일삼았다는 것. 

 

독립문의 상징 서재필, ‘필립’의 부끄러운 행적 

    
  ▲ 독립공원내 서재필 동상.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서재필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적포기자로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키다 실패를 하자 일본으로 탈출을 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 

망명 후 그는 스스로를 필립으로 불렸고 그가 만든 독립신문에서조차 ‘피재손’이라 했다. 필립은 조선 정부가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한 미국인으로 1898년 정부에서 추방 당하려하자 “자신은 10년 계약으로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왔는데 아직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월급 2만8200원과 미국으로 돌아갈 여비 600원을 요구했다한다. 당시 독립문의 공사비로 4,000원이 들었으니 그 돈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김종욱 부장의 설명이다. 

또한 돌아가면서 그는 우리나라로 들어올 때 귀국이 아닌 입국이라는 표현을 했고 추방당할 때 출국을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해서 가는 것”이라고 했다한다. 

독립신문은 조선 정부가 마련해 준 신문사 건물과 4,400원의 국고금으로 창간됐는데 이 안에는 시설비가 3,000원이고 필립이 거주할 집이 1,400원에 이르렀다. 

이처럼 독립신문은 나라의 재산인데도 불구하고 필립은 미국으로 돌아갈 즈음에 ‘독립신문’의 소유권을 일본 공사에 넘기는 계약을 했으나 일본 측이 이행하지 않아 매각에 실패, 매국노와 다를 바 없는 행보를 보였다. 

조선인임을 스스로 거부한 그는 늘 영어로 말하고 대중연설조차 영어로 할 정도이며 “조선인이 미개한 이유는 쌀밥과 김치를 먹기 때문으로 미국인처럼 빵을 먹어야 한다”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그가 창간하고 주도한 독립신문의 비판의 초점은 러시아였고 더 많은 이권을 빼앗고 있는 일본과 미국의 비판 기사는 단 한건도 없었다. 

김 부장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간한 날을 기념, 우리는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을 하고 있다”며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고 말했다. 

대표적 친미 인사 이승만은 서재필의 제자이며 1996년 조선일보는 ‘서재필 기념전’을 하기도 했다. 당시 ‘친미 사대적인 신문이 이런 좋은 일도 하네’ 생각했다는 김 부장은 서재필에 대해서 알게 된 후, ‘역시 조선일보답다’ 했다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사 교과서에는 서재필이 애국자라 쓰여 있고 서재필의 고향인 전남 보성에는 서재필 기념관까지 있다 한다. 

 

‘서대문’ 명칭도 일제 잔재 

     
  ▲서대문 형무소 옥사 내부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 바 있는 경희대 79학번 최낙범 씨(맨 오른쪽)가 정해랑 경희민주동문회장(가운데)과 당시 옥사경험을 대화로 나누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1993년에는 한총련 학생 18명이 독립문에 올라가 쌀개방 반대를 외치고, 1995년에는 한국통신 민영화파업 당시 통신 주권을 지키자며, 2004년에는 쌀시장 개방을 막자며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또 재작년에는 한 단체가 독도 망언 규탄 현수막을 독립협회의 사무실로 쓰인 독립관에 걸고 집회를 했으나 이곳들은 친일의 대표적인 장소라 집회 장소로 맞지 않고 조선시대 우리 민중들의 반일집회 장소였던 덕수궁 앞, 대한문 앞, 탑골공원 앞 등이 적당하다고 김부장은 전했다. 

 

서대문이라는 명칭 역시 일본의 잔재가 남은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남대문, 동대문 등과는 달리 서문을 새문이라 불렀으나 개항이후 일본인들이 서대문이라 부르던 것이란다. 

김종욱 기획부장은 “이런 내용들이 전국민적 공감을 얻으면 이곳은 독립공원이 아닌 수치의 공원이 될 것이다”고 전했다. 

이창훈 사무국장은 “이곳은 어린 학생들의 참관 등으로 일 년에 50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 하는데 하루 빨리 바로 잡혀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 내에서 영상물을 비롯, 전시유물들을 둘러봤다.

 

일행의 안내를 담당한 김재봉 선생은 “4만여명의 애국지사가 투옥되고 400여명이 순국한 이곳은 민족의 성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시대 외에도 독재정권이 민주투사를 가두는데 사용되었음에도 일제시대 당시의 이야기만 전시되어있다. 이에 이수병기념사업회 측은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 바 있는 경희대 79학번 최낙범 씨의 설명을 듣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는 “80년도에 2년 정도 이곳에 살았는데 당시 학생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구호가 빵으로 빵으로라 할 정도로 감옥에 들어가 세상을 바꾸자고 했었다”며 “지금도 양심수가 100여명에 이른다지만 민주화는 되지 않아 앞으로도 정치적으로 구속될 일은 많을 듯하다”고 말했다. 


     
  ▲ 옥사 관람 후 사형장을 참관했다. 사형장 앞에 헌화하는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옥사 관람을 마치고는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과 함께 사형장을 참관했다.

사형장에서 박 의장과 정해랑 기념사업회장, 경희대학교 하대현 총학생회장 등은 헌화와 함께 술을 올리고 희생된 수많은 선열들의 넋을 기렸다. 

이에 앞서 박 의장은 기념사업회원들에게 이수병 선생과 관련한 여러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하대현 총학생회장은 “그저 구경삼아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부끄럽다”며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시점이니 만큼 열사들의 뜻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이수병기념사업회원 외에 참관을 온 일반인들도 일부 행사를 끝까지 함께 하기도 했다.

이중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소태진 씨는 “현대사 소모임의 서울 답사 장소로 서대문형무소를 정해 왔는데 일제시대보다 해방 직후 독재에 악용된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고 보여주기식으로 전시가 돼 일행보다 일찍 나오던 중 옥사 체험 이야기를 듣고 함께 했다”며 모임의 자료집까지 얻어가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경희대학교 민주동문회가 주축이 된 이날 행사는 77학번부터 07학번까지 30년에 걸친 다양한 세대가 만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재학생과 졸업생들의 연대와 화합의 자리가 됐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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