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며 재판장은 저승 사자처럼 느껴지만 때로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 서초동 법원청사 소년 법정에서 있던 일이다.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났던 A양(16)에게 김귀옥(47) 부장판사가 말했다.
"자, 날 따라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말에 머뭇거리자 다시 크게 하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따라 하던 A양은 물론 법정에 있던 A양 어머니도 함께 울었다. 재판 진행을 돕던 참여관/·실무관·법정 경위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폭행으로 소년 법정에 섰던 전력이 있어 '소년보호시설 감호위탁' 같은 무거운 보호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不)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뿐이었다.
김 부장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던 A양은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 그러나 남학생들에게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마비증상이 나타났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학교를 겉돌며 비행 청소년과 어울리면서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판사는 방청객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왔지만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말하겠어요? 아이의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눈시울이 붉어진 김 부장판사는 눈물범벅이 된 A양을 법대(法臺) 앞으로 불러 세웠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할까. 그건 바로 너야.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돼. 그러면 지금처럼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두 손을 쭉 뻗어 A양의 손을 꽉 잡았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주고 싶은데 우리 사이를 법대가 가로막고 있어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