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 하광훈 객원기자] '스승'과 '수제자'로 부르며 서로를 아끼는 하광훈(왼쪽)과 김범수가 만났다. 이번 리메이크를 위해 함께 작업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녹음실에서 하광훈과 김범수는 음악과 인생에 대한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다.
하나 지적하면 열을 깨우쳐
#김범수를 처음 만난 99년 우리는 양수리 작업실에 들어가 몇 달 동안 숙식을 함께 했다. 김범수는 나에게 한 번도 혼난 적이 없는 유일한 가수였다. 가수의 화려함에 대한 허영심이 없었고, 하나를 얘기하면 열을 알아서 했다. 2집 때부터 김범수와 작업했던 프로듀서들은 아마도 신이 났겠지. 어떤 기교를 요구해도 다 소화하는 가수가 김범수니까. 그렇지만 나는 미국에서 김범수의 노래를 들으며 다소 불안할 때가 있었다. 노래는 기교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거니까. 이제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
하광훈(하)=하광훈 객원기잡니다, 어색한데…. 하하, 새 리메이크 앨범을 낸 기분은 어떻습니까.
김범수(김)=정규 앨범을 준비할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랐습니다. 멀리 보고 낸 음반입니다. 이 앨범이 세월이 지난 뒤에도 좋은 평가를 받을까, 하는 심정으로 작업했어요. 리메이크 유행에 휩쓸려서 빛이 바래지는 않을까 하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의미있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노래의 감정선을 최대한 담백하게 살려간다는 이번 리메이크 앨범 컨셉트가 맘에 들었어요. 요즘 리메이크 앨범이 유행이라지만 저는 이미 10년 전에 조관우 리메이크를 만들어서 400만 장 판매를 기록해 본 사람입니다. 리메이크를 위한 리메이크를 하는 거라면 반대했을 겁니다.
김=하 선생님과 6년 만에 다시 작업해서 얻은 게 많아요. 데뷔 이후 나도 모르게 길들여졌던 부분들에 대해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못 고쳤던 부분을 선생님이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런 부분은 제 노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하=이번 리메이크 작업이 곡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집중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화려한 노래보다는 영원히 기억될 노래를 남겨야 진정한 가수거든요.
한국적 모습 찾는게 더 중요
#사람들은 김범수를 R&B가수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한국적 모습, 내 모습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흑인이 10년간 창을 했다고 치자. 아무리 잘해도 한국인의 창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흑인음악을 한국적으로 소화한 DJ DOC는 훌륭한 뮤지션이다. 최근 함께 작업한 변진섭에게도 얘기했다. "10년 전 미스코리아 사진 봐라. 예쁘디? 촌스럽잖아." 바로 그거다. 김범수는 신이 내린 보이스와 성실, 겸손을 갖췄다. 유행을 따르기보다는 세월이 지나도 빛나는 가수로 남으라고 주문하고 싶다.
하=요즘 하는 음악적 고민은 뭔가요.
김=사실 하 선생님이 99년에 '이런 게 좋은 음악이야'라며 들려 주신 음악은 지극히 대중적이란 생각이었어요. 간단하게 저는 R&B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의견은 일정 부분 수평선을 그렸었지요. 가수생활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R&B 가수 타이틀이 쉬운 게 아니구나. 아니, 내가 R&B를 한다고 하면 남들이 인정할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R&B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지만, 흑인음악의 특성을 살려서 가요에 잘 접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기교나 화려함으로 채우는 게 아니라 '여백의 미'를 살려야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하=크~ 이제야 그걸 알았군요.
김=5년 넘게 가수 생활하면서 음악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하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하=정제된 걸 해야 나중에 부끄럽지 않아요. 스무살 때 진심은 쉰 살 때도 부끄럽지 않지만, 스무살 때 잘난 척은 스물다섯 살만 돼도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에릭 클랩턴의 명곡 <원더풀 투나잇>의 기타 리프가 얼마나 간단합니까. 클랩턴 같은 대가가 그것밖에 못해서 누구나 칠 수 있는 기타 리프를 쳤겠어요? 대중이 누구나 노래 방에서 자기 느낌대로 부를 수 있는 쉬운 노래, 그렇지만 김범수가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진짜 명곡입니다. 그걸 알았다니 뿌듯합니다.
어깨 힘빼고 자연스럽게
#미국에서 잠깐 한국에 들어왔던 2003년 김범수의 콘서트를 몰래 찾은 적이 있었다. 솔직히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김범수는 무대 바로 앞에서 열광하는 열성팬들에게 흥분해서 페이스를 잃고 있었다. 저 멀리 남의 손에 이끌려 온 사람, 부끄럽지만 음악이 좋아서 콘서트에 처음 와 본 사람을 팬으로 만드는 공연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중에는 김범수 콘서트의 총감독을 해 보고 싶다.
하=1집 이후 저 보고 싶었습니까? 하하.
김=물론이죠. 신인은 프로듀서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과는 처음 만나서 신앙 인생 비전 용기 이성 문제 등 모든 부분을 함께 대화했어요. 그때는 이해 안되는 것도 많았죠. 활동하면서 때때로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특히 인생의 경험을 진실되게 노래해야 한다는 말씀….
하=음반 얘기 좀 해 보죠. 저는 김범수가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법을 배웠다는 부분에서 이번 리메이크의 의미를 찾고 싶어요.
김=이번 음반에 실린 <내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어떤 그리움> <I Believe> 등은 아주 옛 노래가 아닙니다. 그 시대의 느낌으로 노래하는 데 주력했어요. 뭔가 더 자연스럽고, 내 얘기가 진실이어야 한다는 일관된 컨셉트로 만들어진 앨범입니다. 진실을 노래하는 게 바로 솔(soul)음악의 기본일 수도 있죠.
하=마지막으로 김범수가 바라본 프로듀서 하광훈에 대해 한마디 해 주시죠.
김=사실 그래요. 제 음악에는 하 선생님이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워낙 큰 가수들과 작업하신 하 선생님에게 김범수라는 가수는 작은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 선생님은 뮤지션을 떠나서 진짜 스승입니다. 잘못된 부분은 한치도 변함없이 지적해 주시고요. 하 선생님이 '이 녀석만은 자랑할 만하다'고 할 만한 가수로 남겠습니다.
하=아아…. 감동적이네.
김=제게도 덕담 한마디 해 주셔야죠.
하=끝까지 가수로 남는 가수가 되십시오. 50대, 60대 나이에도 김범수가 콘서트한다고 하면 500명이든 600명이든 모일 수 있는 가수로 남기를 바랍니다.
나, 하광훈(41). 어느덧 남들은 나에게 전설의 프로듀서 겸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붙인다. 하긴, 변진섭 이승철 조관우…. 많은 가수들이 나와 함께 작업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들 중에서도 나의 수제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가수는 단 한 사람, 김범수(26)다. 아니, 내 생각에 김범수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다.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가수다.
1999년 김범수를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김범수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스해 그의 음색적 색깔을 찾아주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6년 만에 김범수를 다시 만나 최근 나온 리메이크 앨범의 타이틀 곡 <메모리>를 선물했다. 이 곡은 과거 내가 작곡하고 조관우가 불렀던 <겨울 이야기>의 멜로디와 가사 일부를 수정해 리메이크한 곡이다.
그동안 나는 김범수를 바라보며 딸을 시집보낸 어머니의 심정이었다. 김범수가 진정한 한국 최고 가수의 길을 가기를 바랐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오늘은 나의 수제자 김범수를 직접 인터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