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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청백리 재상 포증(포청천)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6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genesio
추천 : 8
조회수 : 509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6/25 12: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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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뿌윤~ 파오팅티엔~
 
우리에게는 포증이라는 이름보다는 포청천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북송 인종시대 재상 포증(包拯)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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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증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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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시호는 효숙(孝肅)이다. 999년 여주(廬州) 합비(合肥:지금의 안후이성 허페이)에서 출생하였다. 포공(包公)이라고도 한다. 1027년(인종 5) 진사(進士)에 급제,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이 되었으나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임하였다.
1037년 다시 천장현(天長縣:지금의 안후이성 천장현) 지현에 임명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이어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와 지간원(知諫院) 등을 거쳐 1056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가 되었으며 1061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임명되었다.

관료생활을 하는 동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판관이 되자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으며, 높은 벼슬에 오른 뒤에도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청백리로 칭송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청천 [包靑天]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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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증이 유명해진 것은 바로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 개봉부윤(開封府尹) 시절입니다.
이 개봉부윤은 송나라 수도인 개봉을 담당하는 관직으로써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개봉시 시장이라는 행정직이었지만 당시에는 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에
포증은 개봉부 내의 사건에 대해 자기 스스로 고소, 판결 그리고 사법 집행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범중엄의 신정이 실패한 후 조정이 날이 갈수록 부패해졌습니다.
특히 도성 개봉부에서는 고관대작들의 탐욕이 날로 심해졌으며, 일부 황실의 내외척들은 나라의 법을 마음대로 어기며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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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포청천에서 부패한 관리의 명사로 나오는 방태사 아저씨>
 
그런데 개봉부에 포증(包拯)이라는 지부사가 새로 부임되어 와서, 이런 악한 무리들을 엄하게 다스리고 부패 상황을 어느 정도 돌려놓았습니다.
포증이 오기 전의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 그리고 권문세족들이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서,
그 어느 누가 개봉부 지부사로 오더라도 권세가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의 뇌물을 받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포증은 부임한 후 이 부패한 풍기를 바로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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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개봉부에 있는 북>
 
그 당시 송나라의 법규에 의하면, 관청에 고소를 하는 사람은 먼저 고소장을 써서 아역들에게 올리고,
그러면 아역이 그것을 지부사에게 올리도록 되어 있었죠.(지금의 변호사나 법무사와 유사하죠.)
그러나 악덕을 일삼는 아역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했습니다.
그래서 포증은 이 법규를 없애고 그 대신 관청 앞에 북을 걸어놓게 했습니다.
고소할 일이 있는 백성이 북을 치면 관청에서는 즉시 그를 불러들여 고소를 심리(審理)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드라마 포청천에서 억울한 백성들이 항상 개봉부 북을 두드린 것이 실제로 역사적 사실이었던 거죠. ㅎㅎ
이렇게 백성들이 직접 고소장을 지부사에게 올리도록 하자 더 이상 악덕 아역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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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청천이 명판관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설화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천장현(天長縣, 안휘성 천장현) 현령으로 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농민이 밭 갈던 소를 외양간에 들여놓고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소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주둥이를 벌려 보니 누군가가 소의 혀를 베어 간 것이 아닌가. 농민은 그 길로 관청에 달려가서 소의 혀를 베어 간 놈을 잡아 달라고 포증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범인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한동안 궁리를 하던 포증은 농민에게 이렇게 분부했다.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 소를 잡아버리게나.”

한창 부리는 소를 잡으라니, 이 현령이 제정신인가! 농민은 한참 동안 포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농민들이란 대개 부리는 소를 잡기 아까워하는 법인 데다가 당시 법률도 밭 가는 소를 사사로이 잡는 것을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이 다시 생각해 보니, 혀가 잘린 소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이며, 현령이 잡으라고 해서 잡은 것이니 율을 어긴 죄는 현령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농민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소를 잡아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어떤 자가 현청을 찾아와서, 그 농민이 소를 사사로이 잡았다고 고해 바쳤다. 이에 포증은 그에게 몇 가지를 묻고 나서 갑자기 당상을 치며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네 이놈, 어디 와서 거짓말이냐? 남의 소 혀를 잘라놓고 오히려 주인이 소를 잡았다고 고자질을 하다니! 어서 네 죄를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눈이 휘둥그레진 그자는 한동안 말을 못하더니 황급히 무릎을 꿇고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한 짓을 이실직고했다. 그는 소 주인에게 원한이 있어서 그 보복으로 소의 혀를 베어 간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소 임자가 소를 잡자 관청에 고발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판관 포증 [鐵面包拯] (중국상하오천년사, 2008.4.25, (주)신원문화사)
 
 이런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포증은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과중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들을 해결해 범죄자들을 엄하게 다스렸고,
그러다가 개봉의 질서가 문란해지자 인종의 어명으로 개봉부 지부사의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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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인종, '경력(慶曆)의 치(治)'라는 북송의 최전성기를 맞았다.>
포증이 개봉부에 부임한 이후 엄하게 죄를 다스리자, 법을 함부로 어기면서 사리사욕을 채우던 권세가들은 겁이 나서 몸을 사렸다고 합니다.
일부 권세가들은 포증에게 뇌물을 먹이려 했으나 주위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청렴한 사람이란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도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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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개작두, 용작두, 호작두(좌측부터) 각각 개작두는 평민 죄인, 용작두는 왕족과 귀족 죄인, 호작두는 탐관오리의 처형에 사용했다.>
 
포증은 인종의 신임을 얻어 이후 추밀부사(樞密副使)로 등용되었고, 
조정의 요직에 오른 후에도 언제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포증은 일생 동안 정직하고 청렴하게 살아온 깨끗한 관리, 즉 ‘청관(淸官)’으로 중국 역사에 이름이 난 사람입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만백성의 칭송을 받았거니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칭송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를 존경해 ‘포공(包公)’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민간에서는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세가들의 탐욕을 엄하게 다스린 그의 일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엄하게 법을 다스린 이야기를 엮은 희곡과 소설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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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만에서 드라마화된 "판관 포청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포증이 유명해 진 것은 1994년도에 드라마 "포청천"이 대만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와 방영되었던 시절부터라고 합니다.
 
실제로 1993년 대만에서 제작되었을 당시에도 대만과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2000년대 부터 드라마로 다시 제작하자는 끊임없는 논의가 있어왔고, 2008년 부터 중국에서 다시 드라마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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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다시 드라마로 만들어진 포청천>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10년 넘게 흘렀는데도 주연 배우 세 사람이 얼굴이 전혀 늙지도 않고 똑같다는 것이었죠.
 
(참고로 극중에 전조 배역 맡으신 분은 나이가 지금 거진 50대입니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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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청천이라는 인물을 사랑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부패해 있고, 
 
포청천 처럼 백성을 위하고, 법에 따라 엄히 판결하며, 부패와 불의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을 열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청천의 모습은 우리나라 법조인들, 정치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할 수 있죠.
 
사실 한국의 위인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대법원, 대검찰청에 할 수만 있다면 포청천 동상이라도 세우고 싶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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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포청천 관련 글을 쓰면서 박원순 현 서울시장님이 생각났습니다.
 
실제로 박원순 시장님도 법조인 출신이시고, 서울시를 관장하는 서울시장이시죠.
 
어찌보면 당시 수도 개봉부를 관할하던 포증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서울시장이 예전 개봉부윤처럼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박원순 서울시장님도 재선에 성공하신 만큼,
 
서울 시민들을 위해 주시고 각종 부패와 불의에는 단호히 대처하시는
 
포청천같은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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