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9&uid=311543 기자실 이야기, 덧붙여 한겨레 이야기
번호 311543 글쓴이 천년세월 (jktclc) 조회 4276 누리 1452 (1459/7) 등록일 2007-5-22 12:00 대문 46 톡톡 1
기자실 이야기
그러니까 88년 2월부터 97년 환란사태가 벌어지던 해 2월까지 약 9년 동안 제가 그렇고 그런 매체 취재기자로 있으면서 보고 들었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10년 전 얘기이고 따라서 지금과는 사뭇 동떨어진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실이 어떤 것인지 전혀 감이 없는 서팡들에게 기자실이란 그런 것일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 정도를 전하는데 충분할 것이라 생각돼 키질을 하게 되네요.
원래 기자실은 전두환 정권 때 가장 잘 운영되던 일종의 시스템인데요,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시행했던 언론 통폐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 이전에는 사실상 언론 자체는 자유경쟁 상태에 있었고 신문이나 통신의 경우에는 능력만 된다면 특별한 시장진입에 제한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지역신문을 포함한 소자본의 언론들이 여럿이었는데 사실 이것이 정권을 창탈하는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꽤 귀찮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입이 많으면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입이 한 둘은 있기 마련이고 그러니 당근 입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이런 말입니다.
이 때 신군부는 기가 막힌 용어를 등장시킵니다. ‘난립’이라는 용어죠. 언론이 난립하는 통에 국민들이 헛갈린다는 거죠. 그래서 친절하게도 몸소 칼을 들어 소위 언론통폐합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데요, 이 사건이야말로 오늘날 조중동 시스템을 고착시키고, 한겨레를 만들어내고 다시 타락시킨 ‘원죄’가 되는 셈입니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의 난립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언론매체의 수를 법으로 정해버렸습니다. 그 이상 언론의 시장진입을 금지하는 것이지요. 그 수는 1 통신, 2 방송, 8 중앙일간지, 각 도 1 지방신문입니다. 즉 통신사의 경우 언론통폐합이 있기 전까지 국내에 시사통신, 무역통신, 동양통신, 내외통신...등 여섯 개가 있었는데요, 이를 모두 하나로 통폐합(말이 통폐합이지 사실상 모두 폐지시키고 새로 하나를 만든 것이지요) 시키고 그 이름을 여섯 개가 통합되었다 하여 연합통신이라 붙이게 됩니다. 연합통신의 ‘연합’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방송은 아시는 것처럼 KBS와 MBC 둘이고요, 지방 방송은 어떤 식으로든 이 두 방송사의 간판 안으로 복속됩니다. 8 중앙일간지는 조선, 동아, 중앙, 한국 등 4개 일간지와 매일경제, 한국경제 2개 경제지(당시 꽤 잘나가던 서울경제신문, 내외경제신문 이 과정에서 모두 사그라졌고요), 코리아헤럴드와 코리아 타임즈의 2개 영자신문입니다. 각 도별 지방신문은 제가 이름까지는 일일이 기억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까 정말 기막힌 교통정리가 된 셈인데 이때부터 전두환 정권의 업그레이든 된 언론 장악이 시작됩니다. 전두환 정권이 태동하는 과정에서는 검열이다 뭐다 해서 심지어는 기사내용 일부가 삭제된 모습 그대로 신문이 발간되는 흉물스러운 일도 많았습니다만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는 그런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일이 없어졌다기보다는 그럴 필요가 사라진 것이죠.
자 이제 한 출입처의 기자들을 모두 합해도 지방신문을 빼면 모두 11개입니다.(맞나? 요즘 셈이 안되서리) 지방신문은 정치면이나 주요면은 통상 연합통신의 기사를 받아쓰고 나머지 지방소식과 관련된 부분을 주로 취재했기 때문에 중앙부처의 출입처에 나타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요 정부부처마다 대략 이들 11개 언론사의 기자들이 얼굴을 비치게 됩니다.
전두환 정권의 입장에서는 정말 훌륭한 시스템이 태동한 겁니다. 이들 11개 언론사만 통제하면 모든 게 끝이거든요. 통제라기보다는 야합이죠. 이들 언론과 밀월관계를 시도하는 거죠. (물론 은연중에 말을 듣지 않으면 ‘관계 끝’이라는 무언의 협박까지 포함해서입니다.) 이들 언론에 독점적 권리를 인정해주면서 반대급부로 이들 매체를 자신들의 홍보물로 전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땡전뉴스 아시죠? 땡 하고 아홉시 종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 시작한다는 그 땡전뉴스요. 바로 이 같은 환경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처음에 언론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는 어쨌는지 몰라도 좀 시간이 흘러보니까 언론의 입장에서도 이만한 쾌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주도적으로 ‘언론 카르텔’을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는 거죠. 가령 중앙일간지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시장진입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업체라야 고작 넷이 전부입니다. 경쟁이랄 수도 없죠. 어차피 당시 신문이란 게 부수경쟁은 중요하지 않고 광고비가 중요한 것인데 광고를 하는 기업에서는 그래야 넷이니까 공평하게 광고를 나눠주면 그만이고 이들 신문은 적절히 광고비를 담합하면 그만이고, 정말 꿈같은 세월을 지내게 됩니다.
기자요? 물론 기자들도 좋아야죠. 그래도 언론의 소프트웨어가 기잔데 함부로 대할 수 있나요? 기자들을 위해서는 ‘기자실’이라는 기막힌 시스템이 발동합니다. 즉 각 부처별로 ‘기자실’을 만들어 이들 ‘공인된’ 기자들을 한 곳에 모아두는 겁니다.(이른바 ‘기자단’이라는 이름을 붙여서죠) 모아서 뭐하냐구요? 밥 먹여주고, 술 사주고, 고스톱 치라고 장소 마련해주고 가끔 미친 척하고 돈 잃어주면서 판돈 대주고, 중요한 사건 있거나 명절 때 되면 촌지 챙겨주고... 일반 기업체나 경제단체 기자실 같으면 가끔씩은 지금 금리가 내려가지 않으면 기업들 다 죽는다는 식으로 정신교육 시키고, 그러고 나서 기사 잘 나왔다 시키면 동반취재라는 명목으로 해외여행도 한 번씩 시켜주고... 하지만 이것만 갖고는 안 되죠. 기자도 먹고 살아야지. 때 되면 기사 챙겨주고. 기사 챙겨준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요, 기사거리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가끔 그러기도 하지만) 아예 기사를 써준다는 뜻입니다. 기자는 앉아서 몇 줄 쓱쓱 고쳐서 본사로 팩스 송부하면 다음날 각 신문마다 토씨하나 안틀린 기사들 쭉쭉 잘 올라옵니다. 기자생활 땡잡는 겁니다.
재미 붙인 나머지 나중에는 각 출입처 기자들마다 기자단 간사를 선출하는데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게 출입처 기자실(기업체는 기자실, 혹은 홍보실이라 불렀고요)의 업무담당자(공보관이라 불렀습니다)와 흥정할 거리가 있으면 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가령 촌지라 하더라도 기자들이 한꺼번에 있는 자리에서 업무담당자가 나눠주는 경우도 있고 때론 간사에게 일괄 지급하고 간사가 알아서 분배하는 경우도 있고... 기사거리 있으면 엠바고를 정해야 하는데 자기들끼리 상의해서(제 기억으로는 당시 조선, 중앙, 한국경제는 조간, 한국, 동아, 매일경제는 석간이었습니다) 조석간 적절히 분배하고, 경제단체나 일반 기업체 같으면 해외 동행취재는 이번에 모두 가기 어려우니까 이번에는 어느 신문이 가기로 한다든지... 뭐 그런 것들 조율하는 게 소임거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유통이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당시 중앙일간지들은 한결같이 8면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는데요, 요즘 경쟁적으로 증면된 상황과 대조해보면 정말 초라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당시 인쇄시설이나 여타 여건들이 지금보다 열악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같은 상황이 법률적인 언론카르텔이 깨질 때까지 계속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만큼 중앙일간지들이 정보량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중앙부처뿐 아니라 각 단체나 하급기관까지도 이 같은 기자단의 관례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관계로 어느 신문 어느 면을 펼치더라도 다른 신문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 그 당시 신문들의 커다란 특징이었던 겁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언론시장 진입이 허용되고 나서야 신문들은 증면경쟁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정보의 내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야의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본질과는 관련 없는 아주 사소한 영역에 대해서만 여당에 대한 비판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을 뿐 각 신문은 한결같이 여당 편이었는데요, 이 점에서는 중앙일간지, 경제지, 영자신문 모두 마찬가집니다. 가령 대표적인 영자신문이 코리아헤럴드의 예를 들면 - 저는 몇 년 동안 이 신문을 보면서 사설(Editorial)은 거의 읽는 편이었는데요 - 정말 유치한 부분의 여야 다툼에 관한 것까지 한결같이 야당이 죽일 놈들이더군요. 기업과의 유착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급기야는 전두환 통치가 끝날 무렵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고조되었으나 이를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전무한 실정이 돼버렸습니다. 이 때 한겨레신문이 태동합니다. 6 29 민주화 항쟁이 있던 1987년 발기인 대회를 하고 아울러 국민들로부터 설립기금을 받기 시작합니다. 저도 그 당시로는 피 같은 돈 10만원을 눈 딱 감고 한겨레신문에 보냅니다. 그 당시 많은 국민들이 참된 언론에 목말라했던 만큼 한겨레신문에 보내는 열망은 컸습니다. 처음 한겨레신문이 공모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를 성공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습니다만 결국 이듬해인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은 창간호를 발행합니다. 말하자면 한겨레신문은 당시 참된 여론에 대한 국민적 갈망의 소산인 셈입니다.
이런 한겨레였던지라 기자단 문화에 대한 한겨레의 대응은 처음 매우 신선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촌지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이 먼저 나왔습니다. 당시 언론이 촌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관행적인 취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는 즉 기자단에서 왕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험난한 길을 자초한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마지못해 받은 촌지를 되돌려주거나 사회단체에 기부하겠다는 말도 한겨레신문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 저는 한겨레신문이 이른바 ‘기자단’이라는 잘못된 언론관행을 바로잡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할 하면서 일종의 전율 비슷한 것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한겨레가 오늘 ‘부처 기자실 통폐합 반대’ 목소리를 냈네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한심한 일입니다. 제가 기자실이라는 곳을 안가본지 10여년이 된 상황이어서 지금 기자실이 어떤지는 확실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짐작은 갑니다. 여전히 기자들 죽치가 앉아서 ‘거리’나오면 되지도 않는 즉석 세미나 하고, 대통령 씹어대고(요즘은 한겨레도 가세 안하나 몰라) 그 중 오피니언 리더가 한 둘 쯤 있을 것이고 그러면 대충 감 잡아서 각각 신문사로 돌아가서 대충 각색하고 기사 쓰고... 원래 기자실이란 게 그런 용도 외에는 다른 일을 하기 어려운 곳이지요. 물론 담당자에게 가끔 설명을 듣기도 하겠지만... 그런 건 기자 없어도 나중에 신문사 담당기자에서 잘 알아서 송고 넘어 갑니다.
한겨레신문이 오늘 제시한 이유들 정말 한심합니다. 이런 구절이 있네요. “일선 부처와 지리적으로 떨어진 통합 브리핑실에만 출입이 제한될 경우 더 깊은 취재를 하고 싶어도 담당 공무원과 만날 약속 잡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씨팔 이런 것을 말이라고 하나, 앉아서 기사 받아쳐먹을 생각이면 다리몽둥이를 잘라 버리고 기자생활을 하던지... 제가 좀 심했나요?
원래 정부란 속성상 정보유출을 차단하려고 하는 쪽에 가깝고 이를 어떤 식으로든 파헤치는 것이 언론의 속성이라면 속성인 셈입니다. 그런 점에서 ‘닫힌 참여정부’라는 말은 없습니다. ‘열린 참여정부’란 모든 국민들이 정책에 관여하고 질책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는 뜻이지 협상중인 FTA 정보를 언론이 먼저 까발리라고 열려있다는 뜻이 아니거든요. 요즘 들어 되지도 않는 말 지껄이는 꼴이 어쩌면 조중동과 그리도 닮아가는지... 참으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한겨레신문을 보면서 몇 번이고 정도로 돌아오라고 채찍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먹고사니즘’에 바빠 놔두곤 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참지 못해 모든 일정 뒤로 제치고 서프질 먼저 합니다. 한겨레신문에 호소합니다. 제발 못된 찌라시 형님들 흉내 그만 내시고 원래 자리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도 ‘조중동한’ 소리가 듣고 싶은가요? 어느 날 안티 ‘조중동한’을 기치로 또 다시 신문 기금 공모운동이 이 땅에 벌어지면 어찌 얼굴을 드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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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적절한 박근혜 이야기..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11924 "자, 이상으로 마치고 오늘은 특별히 마지막 세리모니를 하나 하겠습니다."
22일 오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기자간담회가 끝나자 한선교 의원이 이같이 말하며 갑자기 한 신문사 기자를 앞으로 불러냈다. 알고 보니 이 기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
준비된 케이크의 촛불을 기자가 끄고 박 전 대표와 의원들은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이어 박 전 대표는 이 기자와 함께 케이크를 자르며 "오늘 즐겁게 보내라"는 덕담도 건넸다.
하지만 함박웃음을 짓던 박 전 대표와 의원들과는 달리, 생일을 맞은 기자는 내내 쑥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다가 케이크를 자르고는 "지금 창피해 죽겠다"며 바로 들어갔다.
이에 앞서 박 전 대표는 간담회에서 정부의 각 부처 브리핑룸 및 기사송고실 통·폐합 방침에 대해 "국민의 알권리를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박 전 대표는 "국민들에게는 각 부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알권리가 있다"면서 "그것이 투명한 나라 경영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보유세 조정할 필요있다"
한편, 박 전 대표는 근로자와 서민을 위한 감세, 경제활성화를 위한 감세 등을 뼈대로 한 '연간 6조원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했다.
그는 "감세정책으로 근로자와 서민들의 부담을 대폭 줄이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겠다"며 물가연동 소득세 도입과 유류 관련 세금 10% 인하 등을 제시했다.
또한 박 전 대표는 부동산 세제와 관련해서는 "보유세의 증가율이 너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국민들이 너무 큰 부담을 한꺼번에 느끼지 않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