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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 아인슈타인이 바꿔놓은 한국의 입시 제도(딴지일보 펌)
게시물ID : humorbest_1663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피터제길슨
추천 : 51
조회수 : 2119회
댓글수 : 4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7/05/23 16:24:11
원본글 작성시간 : 2007/05/23 14:19:45
본 우원 학력고사 세대다. 요즘 '3불 정책' 어쩌구 떠들고 있지만, 당시엔 과외와 보충수업 금지라는 더욱 막강한 2不까지 있었다.(물론 보충수업 금지는 이내 사그러들었지만). 서슬퍼런 전두환 시대였다고는 하나, 중고딩 들은 지금보다 훨씬 '자유’를 만끽하며 살았던 거 같다. 더구나 교복 자율에 두발 자유까지 있었으니 대한민국의 현대사 중에 청소년들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과외도 없고, 보충수업도 노골적으로 강요 못하는 분위기였으니 꼰대들의 불만은 터져나왔다. 요즘 애덜 공부 너무 안한다는 잔소리는, '요즘 애덜 싸가지 너무 엄따'라는 4천년전 수메르인들의 불평과 더불어 고금을 막론하고 꼰대들의 2대 레파토리를 형성했었다.

우쨌든 대입 시험 제도는 요즘의 '죽음의 트라이앵글’(내신+수능+논술)에 비하면 한층 간명해서, 지금의 수험생들에 비해서 적어도 입시 전략으로 골치 아픈 건 좀 덜 했던 거 같다. 

또하나. 대입 시험 직후에는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뉴스들이 있었다. 훌륭한 법관이 포부인 전국수석합격자 이너뷰(근데 왜 항상 전국수석은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자신의 미래가 '훌륭한 법관'이 되는지 정말 미스테리다.), 성적 비관 자살, 극심한 눈치작전, 시험의 난이도... 이런 익숙한 풍경 뒤에는 한국의 입시위주 교육에 대한 장탄식의 칼럼이 또 악세사리처럼 붙곤 했다. 지금하고 다를 게 뭐 없었다. 아마 우리 전세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기에 89년 이후, 재학생의 학원수강이 허용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교육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밀사교육은 여전히 극성을 부렸었지만....다시 뛰는 한국인 아니, 학부모... 

대한민국 건국이래 지금까지 입시제도는 대략 16번 이상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암기식 - 주입식 교육, 치솟는 사교육비, 공교육 붕괴, 공부 안하는 대학생 등으로 지적되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은 지난 수십년간 반복되었던 일이고, 또 그것을 해결한다고 입시 제도를 뜯어고치는 일이 튀는 레코드판처럼 무한 반복되는 실상은 그야말로 '호호호... 코미디야, 코미디'다. 수십 년 동안 동일한 문제점을 두고 제도와 정책을 십 수번을 변경하는 일도 기네스북에 등재될 일이다. 그러면서도 해결은커녕 문제가 더욱 악화된다면 가히 엽기적이라 할만하다.


 죽음의 트라이앵글의 형성. 

암기식 - 주입식 교육의 대안으로 열린 교육, 창의성 교육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한 반에 50명이 넘어가는 '콩나물 교실'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주입식 - 암기식으로만 배워왔고, 가르쳐왔던 교사들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전과목 만점을 향해 총력 투쟁을 해야 하는 학력고사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한, 그 역시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전문가들은 이 '불가능'에 도전했다. 취학연령 인구 감소라는 자연적 요인도 있겠지만, 나름 교육재정을 투입하여 이제 고교 한 반의 인원은 30명대로 줄어들었다. 또 연수 프로그램도 강화하여 교사의 수업의 질을 강화하려고 했다. 학력고사는 수학능력시험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창의적 교육의 길은 멀어지고, 공교육 붕괴의 소리는 높아만 갔다. 정말 미스테리한 일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유행시킨 '세계화, 국제화'라는 담론은 어김없이 교육의 영역에도 침투되었다. 수능이 도입된 건 이 김영삼 정부 때인데 세계화 시대에 암기위주식 교육으로는 국제경쟁력에 도태된다! 이런 지상명령에 언론, 시민세력들은 각자의 가치관으로 입시제도에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주 충격적인 보고서가 하나 날아들었는데, '아인슈타인이 한국에 있었다면 전문대도 못 갔다!’라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은 수학 빼고는 나머지 과목에서는 별볼일 없었는데 한국의 총점 제도 하에서는 성적이 형편없기 때문에 그의 천재성이 그대로 묻힐 것이 뻔하다라는 얘기였다. 이거 생각해보니, 장난이 아닌 것이다. 


이게 다 아인슈타인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0.1점 차이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학력고사 제도는 점수따기 기계로만 학생들을 내모는 최악의 제도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도 김영삼 정부의 이런 문제의식에 화답한다.

 “학교에 가도 시험, 시험, 집에 가도 시험, 시험. 우리는 이런 식의 살리기 아닌 죽이기를 교육이라 부르지 말아야 한다. 높은 이론 공부는 소수의 책벌레나 하게 하고 대다수 나머지 보통 아이들은 취미대로, 자기의 한가지 탤런트대로 살게끔 해주자. 북 잘 치는 녀석은 북 쳐서 벌어먹게 북 대학으로 보내고, 헤어 스타일에 흥미 있어 하는 녀석은 미용대학으로 보내고, 모양 잘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은 모델학교나 패션 코디네이터 학교로 보내주자. 도대체 그런 재미있는 것 하고 싶다는데 원자 물리학자 될 녀석이나 할 고답적인 것을 왜 가르쳐 고문을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취미대로 나가도 그 분야에서 1류 되는 것이 곧 출세가 되게끔 우리의 풍토를 철저히 바꿔놓자.

그러면서 초-중-고교를 심신수련, 자연관찰, 생명존중, 문화예술 감상, 예절 배우기, 바른 기의 습득, 극기훈련, 토론문화에 익숙하기, 그리고 낭만적인 죽은 시인의 결사(dead poets society) 의 장으로 만들자.” (류근일, 1995년 6월 11일)

그래서 도입된 게 미국의 S.A.T를 흉내낸 수학능력시험이다. 즉 말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만을 측정해보는 시험이다. 나머지는 대학에서 입학할 학생의 '특기'를 적절하게 평가해 선발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나깨나 '행정부는 대학에서 손떼라!'며 대학 자율화를 목청껏 소리치던 한국의 유수대학들은 학생 선발권의 일부가 느닷없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자 고민이 되었다. 학생의 특기 적성이라니? 우리가 언제 그런 거 신경썼나? 그래서 대학은 자신들의 특기, 적성을 발휘하여 학생 선발에 본고사를 잽싸게 도입했다. 

입시생들은 비상이 걸렸다. 아, 씨바 교과서에 구경도 못한 문제가 나오다뉘! 학원으로 과외로 달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명문대학들은 누가 더 수준높은(어려운) 문제 내나 경쟁에 돌입했다. 느닷없이 60, 70세대들의 본고사 열풍이 불어닥친 것이다.

교육부는, '이런 니기미덜 국영수 위주의 입시제도 바꾸라 했더니만 그걸 더 극단으로 몰아부치네?' 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부랴부랴 입시제도 변경. 이제부터 본고사 금지다. 학생 선발 할 때 수학, 과학, 영어 이런 거 문제 내믄 죽을줄 알아. 대신 창의적인 논술... 그런거 내. 정책이 이렇게 바뀐다.   

창의성 교육의 일환으로 도입된 논술 시험 역시 코미디로 귀결되었다. 토론 수업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고딩 수업에서 논술이 쌩뚱맞은 과목이 되어버린 건 당연지사. 역시 해결사는 학원과 과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미국 대학의 선발 제도에서 충격적인 예가 또하나 보고되었다. S.A.T 시험 만점자가 하버드에 입학을 거부당했다는 기사였다. 헌혈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봉사정신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제 한국의 대학들은 입시 전형에 '인성 요소'까지 포함시켜야 할 중대한 사유가 생겼고 중,고딩 들은 피뽑고 봉사할 장소를 찾아 나서는 길거리 천사표가 되어야 했다.

재학생들의 학원 수강 금지가 풀리고, 입시 제도가 현격하게 바뀌니까 바퀴벌레보다 더한 적응력으로 살아가는 학원의 영향력은 급속히 올라갔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잠만 자는 애들이 늘어난다. 교사들은 '이거 뭐야? 학교를 완존 졸로 아네?'하는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 공교육 강화가 내신 강화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데 수능 시험이 '자격 시험'의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만큼 이른바 '변별력'이 좀 떨어지게 되면, 내신이 입시 비중에서 상대적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친구의 노트를 찢어버린다든지 하는 등의 교실에서의 살풍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교실에서 공부하는 놈은 다 내가 도태시켜야 할 경쟁자들이다. 서태지가 고발한 교실 이데아 -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 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의 현상 속에 자살자가 속출하는 고딩들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상대 평가 위주의 내신을 절대 평가 쪽으로 바꾸었다. 

내신에 절대 평가 요소를 많이 집어넣게 되니까 성적 인플레이션이 당연히 뒤따른다. 고등학교 위상이 명문대 입학생 수로 결정되는데 어떤 바보 선생이 점수를 짜게 줘서 타학교 재학생들을 좋게 하겠단 말인가?
 
한편, 최상위권 그룹에 대해서는 내신과 수능으로 변별력을 가늠하지 못하자 수학 올림피아드, 과학 올림피아 등 메이저리그의 입상실적으로 '특기, 적성'을 측정해냈다. 이건 물론 '외고'와 '과학고'에서 내신에 불리한 학생들을 위한 구제책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올림피아드 전문 학원이 등장한다.

사실 '이해찬 1세대'라는 오명을 쓰는 이해찬이야말로 억울하다. 특기 하나 만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자! 아인슈타인을 보라! 이런 지상 명제를 만든 것은 다름아닌 김영삼 정부가 아니던가. 위에서 인용한 류근일 조선일보의 논설주간의 칼럼을 보라. 수능을 도입한 95년 5.31대책에 바로 화답해서 나온 칼럼이었다. 류근일이 누구던가? 조선의 김대중과 더불어 용호상박 양대 수구꼴통 논설위원으로 손꼽히는 자 아니었던가. 언론이 선동하고 김영삼정부가 만들었던 교육정책을 집행했던 자신이 동네북이 되다니 정말 억울할 법도 하다.

총리 청문회에서 교육부총리 재임시절의 이해찬의 정책에 대해 한나라당의 질타가 쏟아지니까, 이해찬이 어이없어 하면서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그 박세일이를 증인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왜냐면 박세일이는 그 5.31 대책을 입안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박세일은 쌩까고 도망다니기 바빴다. 


이게 다 이해찬 때문이다

사실, 이해찬은 김영삼 정부에서 입안된 '경쟁력 강화' 교육 이데올로기를 아주 우직하게 밀고간 것이었다. 창의력 말살하는 입시위주 교육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 까지는 아주 좋았다. 본고사 금지, 보충수업 금지, 모의고사 금지, 평이한 수능시험 등은 사실 학생들로 본다면 전두환의 과외 금지 조처 이후 최대의 장거이자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는 예상되듯이 대학 당국과 언론들의 비명소리다. 학생들을 모두 돌대가리로 만들었다, 그 어떤 변별력도 없이 어떻게 학생을 뽑으란 말이냐, 대학에서 애덜이 수업에 적응을 못한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지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교육당국은 이 소음을 참아내지 못하고 다시 회귀하기 시작한다. 수능시험의 난이도를 높인다거나, 면접을 빙자한 본고사를 슬며시 눈감아 주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정책의 대강이 구르고 굴러서 오늘의 '황금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되어 온 것이다. 그러던 것을 이제는 노골적으로  3불정책을 완전 폐지해버리라고 방귀깨나 뀌는 대학과 양아치 언론이 거품 물기 시작했다. 그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그냥 쌩얼로 입시제도 바꾸자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갔다'고 일찌감치 선언한 노무현으로서는 인과응보적 업보라 할만하다.  

 풍선 누르기 대회

지금까지 묘사한 입시제도 변경의 풍경을 요약하면 한마디로 냉탕과 온탕의 반복이라 할 수 있겠다. 수능이 쉬워졌다. 변별력이 없다고 질타 당한다. 그러면 어렵게 낸다. 사교육비 증가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내신을 상대평가로 하자. 그러자 교실에서 친구간에 살벌한 경쟁으로 인간성이 황폐해진다. 절대평가로 하니 반평균이 90점이 넘는 인플레가 발생한다. 본고사를 보자니 학교 교육은 붕괴된다. 본고사 안 보자니 대학은 자신의 '특기 - 적성'을 살려서 학생을 뽑을 수 없다고 한다. 수능시험이 1년에 단 한차례만 보면,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좌우되는 건 불합리하다고 해서 시험 횟수를 더 늘렸더니, 수험생을 시험 노예로 만든다는 반발이 뒤따라온다. 수시 모집 제도도 마찬가지의 부작용이 나온다.

대학에 들어가려는 수험생들이 너무도 많다고 하니까 대학을 더 만들었다. 수요자 중심! 그러나 in seoul 대학이 아닌 곳은 갈수록 텅 비어만 가고 희한하게 입시지옥은 여전하다. 대입학원도 모자라 이젠 편입학원까지 기승을 부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해봐도 사교육비는 줄어들 기미가 없다. 아니 갈수록 폭증한다. 

뜨겁다고 해서 찬물 붓고 차갑다고 뜨거운 물 붓는 이런 짓거리를 정책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풍선 효과와 똑같다. 튀어나온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볼록해진다. 다시 그곳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뒤에서 또 볼록... 이런 건 텔레토비 친구들을 데려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사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건 모두가 알면서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그런 문제, 즉 학벌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쪽팔린 이면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교육 문제는 이미 교육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입시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의 그 어떤 입시 제도를 다 갖고 와서 실험해보라.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사교육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예로부터 입신양명의 출세의 꿈을 선조들로부터 유전자처럼 내려 받아왔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선천적 출세컴플렉스가 빚어낸 한국의 문벌의식과 유무형의 사회적 차별관행이, 압축성장의 기묘한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기형적인 교육열이 발생한 것임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특목고에 왜 가는가?  자기 적성을 살리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명문 대학에 가려고 가는 것이다. 왜 명문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공부하러 가는게 아니라 출세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SKY에 가지 못하면 차선으로 그 보다 한 단계 아래로 평가되는 대학에 들어간다. 그 또한 이르지 못하면 차차선으로 그 밑으로 평가되는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학벌의 피라미드는 아래로 더 넓어지고 위로는 높아진다. 

그러면 비싼 등록금내고 왜 무턱대고 대학을 일단 입학하려 하는가? 대학이나마 나오지 않으면 사람 취급 안하니까 그렇다. 그러나 지방 대학이라도 몸에 담았지만, 졸업 이후를 생각하니 답이 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학점 따면 뭐해? 누구도 봐주지 않는 성적표인걸.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들이 설명회도 개최하면서 취업 홍보에 열을 내지만 지방 대학에는 입사지원서조차 구경도 못한다. 

편입해서 학벌세탁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래는 암담하여 다시 또 입시 전선에 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현실에서 공교육 정상화니, 열린 교육이니, 창의적 교육이니 하는 건 염불 외는 속에서 할렐루야 내뱉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설대가 차칸 학생 뽑는다고 하면 차칸 학생되기 과외가 등장하고, 한달도 안되어 [차칸학생 되기 100일 프로젝트]라는 책이 교보문고에 진열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책은 당연히 근본적이어야 한다. 손때에 찌든 시험 제도나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수험생들을 시험제도의 마루타로 만드는 한심한 짓거리는 이제 고마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

 대안들

비정상적인 입시 과열과 사교육비의 이상 지출은 앞서 말한 대로 입시제도 그 자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10대 말 어느 시기에 특정한 방식으로 측정된 지적 성취도가 한 사람의 그 이후 삶을 결정해버리는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이다."(고종석)

입시 기계, 망국적 사교육 등은 이미 새삼스러운 문제도 아니지만 그것은 악성종양처럼 뿌리가 너무나 깊게 박혀있는 명문대를 향한 초집중화 현상에서 기인한다. 그런만큼 대책은 당연히 더욱 발본적, 종합적이어야 한다. 

입시 제도 하나로 해결해보겠다는 것은 백내장 눈의 실명을 안경으로 해소하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입시에 올인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의 틀 자체를 쇄신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근본적인 방향타로 설정되어야 한다. 

학벌주의를 쇄신하는 것은 조중동의 선동대로 기계적인 평등주의로 개인의 능력차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언론에서 주목받은 강릉대 전자공학과의 경우를 보자. 이 대학은 그야말로 학벌주의의 전형적인 그늘 속에서 죽어지내던 지방대의 그렇고 그런 학과에 다름 아니었다. 웬만하면 미달이었기 때문에 원서만 넣어도 합격할 정도였다. 대부분의 지방대생들이 그렇듯이 지방대로의 입학이 10대 때의 입시 실패로 여겨졌고 그만큼 열패감에 젖어서 학교생활은 절망적이었다. 91년도에 부임한 조명석 교수는 이런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학생들에게 도전의식을 불어넣어주었다. 옛 직장(현대전자)에 '학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공정하게만 뽑아 달라'며 읍소할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외환위기 이후 취업문은 더욱 굳게 닫쳤다. 실력을 간판으로 입증하는 전략으로 나아갔다. 미국 유학 프로젝트. 97년 의지가 굳은 복학생을 집중훈련시켜 미 워싱턴대학원에 입학시켰고, 그 이후 한 해에 한 두명씩 입학시키면서 재학생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급기야 2005년에는 10명, 2006년도에는 14명이 미국 상위권 대학원에 입학했다. 

새벽 2시까지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전공과목은 원서로만 진행했다. 방학에는 12시간씩 영어코스를 밟았고 시험도 정규 수업 이후에 치를 정도였다. 실로 엄청난 학습량을 소화해야만 했고, 그 혹독한 학습과정을 통과한 공고 출신 학생도 미국의 상위권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외국 학위를 받은 이들 졸업생들은 인텔 연구소를 비롯해 삼성, 엘지 등 유수한 기업체에 100% 취업을 했다고 한다.

이 대학 왕보현 교수는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던 학생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내 30위권 안에 드는 대학에서 전과목 A학점을 받았다"는 사례를 들며 이것은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조명석 교수는 말한다. “공부하는 방법과 재미를 몰랐을 뿐, 수능 성적이 낮은 아이들에게도 잠재력이 있습니다... 국내 명문대에 못 가면 전공과 관계없이 공무원 시험 등에만 몰리는 건 국가적 낭비입니다. 영어와 전공 실력만 갖춘다면 글로벌 인재로 자라나 세계 과학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두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주어야 합니다.”(중앙일보)

카이스트에 부임한 첫 외국인 총장으로 주목 받은 노벨상 수상자 러플린 교수도 이런 현실을 직시했다. 

“한국 사회가 좌절한 학생들을 위한 제2의 기회들을 좀더 다양하게 제도화한다면 많은 이득을 볼 것이라고 느끼며, 기회 있을 때마다 그렇게 주장한다.”

학벌주의가 만연한 풍토는 비명문대생들에게 의기소침 효과(chilling effect)를 불러와서 의욕을 꺾고 이것은 다시 비명문대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강화시키게 되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반대로 일단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은 '후광 효과(halo effect)'로 인해 좋은 평판과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때문에 노력의 필요성이 반감된다.

대학의 서열화와 학벌주의의 풍토는 진보의 관점에서 볼 때 형평성의 왜곡이거니와 산업론자들의 관점에서도 이처럼 경쟁력 약화의 주범이 아닐 수 없다. 

강릉대의 경험은 학벌물신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그리고 학생의 잠재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다.

김근태식 표현으로 '계급장' 떼고 강릉대와 같은 사례로서 대학 간에, 학생 간에 실력으로 견주는 풍토가 자리잡는다면, 한국 대학의 경쟁력과 수준이 한결 높아질 것은 자명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학벌주의 풍토를 쇄신하는 것은 나라 경제에도 보탬이 된다. '기러기 아빠'로 상징되는 조기 유학 열풍은 살벌한 중고교 입시 경쟁과 비명문대가 배제되는 풍토를 비껴나가려는 요인도 상당수 작용한다. 학벌 물신주의가 사그라지면 이런 비정상적 세태는 한결 완화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학벌주의 타파는 교육 정상화,  경쟁력 강화, 형평성 확대 등 일거 삼득, 1타 쌍피 양피박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부 시민단체나, 민노당에서 주장하는 서울대폐지 - 국립대 네트워크 라든지, 대학평준화 정책 등은 일단 방향은 괜찮다고 본다. 

그들이 제시한 대안은 프랑스를 비롯해서 유럽의 대학 모델을 이식한 듯 하다. 대학수능시험을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화하고 대학입학은 그 자격시험을 통과한 모두에게 주어지는 대신에 졸업은 어렵게 하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시험에 통과하는 학생은 전체의 67%이며, 그렇게 해서 대학에 입학한 자의 50%는 중도 탈락한다.

'입학은 쉽게 - 졸업은 어렵게' 원칙이 성립되려면 우선 대학재정부터가 등록금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립 대학 재정의 80% 이상이 등록금으로 채워지는 현실에서 어떤 미친 교수가 매학기마다 뭉텅이 돈을 지불하는 '고객'인 학생을 실력 없다고 내쫓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대학에서 학생 50%를 짜를 수 있는 건 그들에게 공짜로 가르치니까 아무 눈치볼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국가에서 대학재정의 상당부분을 채워줘야 한다면 사립은 이미 사립이 아니다. 그러므로 대학평준화 정책은 고등교육기관의 공교육화가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고, 그것은 교육 예산 확충과도 맞물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프랑스의 대학 평준화 제도는 그랑제콜을 비롯한 유사 초엘리트 교육기관이 뒷배경으로 상존한다. 이곳은 거의 사관학교 비슷하다. 입학은 어렵지만, 국비로 장학금을 다 지급하고 취업까지 완전히 보장되어 있다. 고급관료, 전문직은 이곳 그랑제꼴 출신자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오죽하면 영국 언론에서조차 "프랑스는 그랑제콜이라는 학연으로 얽혀 있고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국가"라고 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 프랑스 대학제도가 한국에 그대로 이식된다고 한다면 전국의 학원은 그랑제꼴 전문으로 운영될 공산이 아주 크다. 엘리트 교육 기관마저 다 없애고 평준화된 대학에서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육의 효율성 측면에서 많은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평준화론자들은 교육의 형평성과 더불어 영재 교육을 비롯한 엘리트 교육에 대해 설득력있는 대안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교육 제도의 변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민교육헌장 말마따나,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사회 저변의 분위기다.
 
역대 교육부장관 중에 '망국적 과외병'을 입시제도 밖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본 우원이 기억하기로는 딱 한 사람 있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한완상 씨다. 그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혁신적인 제안을 했다. 입사 원서란에 학력기재란을 없애는 아이디어를 냈다. 흡사 벌거벗은 임금님을 본 어린아이의 눈처럼 정말 정직하게 본 것이다. 

'닥치고 명문대 고고씽'을 하는 현상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대기업들의 명문대 선호도가 한 몫 자리잡고 있는 게 자명한 사실. 명문대 선호 인플레이션은 조중동이 부르짖는 엘리트 교육과도 사실 거리가 좀 있다. 우리나라 인구 6배인 미국의 상위권 10대 대학에서 배출된 졸업생이 1만명인데, 우리나라 SKY 3개 대학에서 배출된 졸업생은 매해 1만 5천명이다.

학력인플레 문제의 단적인 예를 하나들어 보자. 철학의 나라 독일에서 배출된 철학사는 고작 410명인데, 우리나라는 1,467명이다. 그러나 철학박사는 독일이 265명, 우리나라는 41명이다. 이공계열도 사정은 대강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닥치고 대학, 닥치고 명문대를 고고싱하는 이유는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 기업들의 채용관행이 학력 인플레를 조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SK 그룹의 입사 담당 실무자의 인터넷 증언은 이렇다. "수천, 수만 통씩 쏟아지는 지원서를 실무자 몇 명이서 무엇을 기준으로 가르겠는가? 그저 대학순위대로 짜르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처넣을 수밖에 없다."

한완상은 이런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황당하다며 파상적인 공세를 펼친 조선일보에 의해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최고의 전문직종이라 꼽히는 사법시험조차도 학력제한이 없는 데 도대체 왜 그것이 황당한 일로 치부되어 하는지는 조선만이 알리라.

 3불 폐지가 아니라 학벌 폐지가 대세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학벌주의는 앞서 말한 대로, 교육의 형평성뿐만 아니라 경쟁력 측면에서 볼 때도 암적인 현상이다. '세계화', '경쟁력 강화'를 부르짖기 시작한 김영삼 정부 시절, 수능 제도를 전면 도입한 5.31 교육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당시 조중동 또한 그 문제의식에는 너나할 것 없이 동참했다.

그러나 요즘 조중동이 합창하는 3불 폐지론을 듣자하니, 70, 80시대로 퇴보하며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기득권자들의 졸렬한 대가리가 새삼 한심할 뿐이다.

추측해보건대,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신문시장은 이제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방송을 겸업할 수 없는 제도적 한계로 인해 이들은 수조원에 이르는 사교육 시장으로 활로를 찾은 듯하다. 이들 모두가 논술 시장에 발가벗고 뛰어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국어문화운동본부]에서 6개 신문사의 사설을 분석한 결과 조중동이 논술에서 나란히 꼴찌로 1,2,3위를 차지했다. 아전인수, 논점일탈, 자의적 근거, 횡설수설 등 학생들이 배워서는 안되는 오류들로 점철되었다. 

시대와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도무지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마구 끌어와 갖다 붙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학력저하, 경쟁력을 운운하며 3불 정책 폐지를 떠들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평준화된 중등 교육 과정은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조사 결과에 따르자면, OECD 국가 중 1위로 평가되었다. 반면 조중동이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미국은 한참 밑으로 18위였다.

반면, 우리나라 대학교는 미국이나 중국의 조사결과를 봐도 100위 안에 드는 곳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대학 과정 자체의 수준과 경쟁력 향상을 촉구하는 것이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의 정상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꼴찌 수준의 대학의 문제 원인을 1등 수준의 중등 과정에 혐의를 씌운다. 말이 되는가?

조선의 평준화 비판론은 김대중의 칼럼에 이르러 엽기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조승희 사건을 보면서 인성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되는데, 평준화 정책 때문에 인성 교육이 황폐화되어 걱정’이라는 음경반전지음(陰莖反轉之音)의 논리다.

옆집 개가 죽어도 노무현 탓한다지만, 이건 해도 정말 너무 했다. 조선의 김대중은 유영철, 승희조와 더불어 정신감정을 의뢰할 만한 수준이라고 생각되지 않은가? 

사정이 이렇다면 김광석의 노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는 참으로 한국 사회에서 리얼리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경쟁력 강화를 입버릇처럼 떠들면서도, 경쟁을 좀 먹는 입시 체제를 선동하고, 논술 빵점 짜리 신문사들이 논술 시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런 신문사들의 발행부수는 전체 신문시장의 70%가 되고 침소봉대, 구라 칼럼(본지 6호 참조)으로 유명한 조선일보의 김대중은 한때 영향력 1위의 언론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니 결국엔 '독사에게 잡혀온 땅꾼만이 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우리는 어쩌면 개그 코너에서 이런 대화를 들어야 할 지 모른다.

"도대체 왜 평준화가 문제이고, 특목고 출신이 몽땅 서울대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어째서 대학경쟁력이 취약한 이유가 되는지, 돈 주고 대학을 입학하지 못하는 것이 왜 평등만능주의가 되어야 하는지 전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다~ 조중동의 방침일세!"

박찬호와 박세리, 그리고 박지성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에게 우리는 환호와 응원을 보낼지언정 질시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머리 좋고,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건 칭찬받을 일이지 욕먹을 짓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선망과 동시에 질시의 눈초리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들의 출세가 다수의 좌절을 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회, 세 번째 기회가 시스템적으로 보장된 사회라면 능력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정은 한층 두터워질 것이다. 더욱이 머리만으로 사회가 지탱되는 것이 불가능할 진데, 손과 발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한편으로 뒷받침되는 사회라면 학력 과잉의 부작용은 한결 가벼워 질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학력별 임금 격차가 심한 구조를 개선하고, 인간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는 사회보장체제를 확립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고 보면, 교육 개혁은 사회 개혁과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10대 한 시절의 성적으로 인생을 조지네 마네 하는 훈계가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민망한 짓거리는 이제 그만두자. 

3불이 아닌, 학벌 폐지가 대세인거다.


딴지 논설우원
직빵맨([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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