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우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신에게 찬양과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마을에는 기도를 집전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산속에서 수도하는 수도사를 초대하여, 그의 집도 하에 저녁마다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녁기도 시간이면 떠돌이 고양이가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예배 시간 내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심하게 울어대는 것이었다. 고양이 울음이 신경에 거슬려서 방해가 되는 한편으로, 간혹 고양이 울음이 들리지 않으면 '어째서 들리지 않나?' 하고 궁금해져서, 이래저래 기도에 방해가 되었다. 주민들이 고양이 울음에 신경을 빼앗겨 명상과 기도에 집중을 하지 못하자 결국 구루는 기도 시간이면 고양이를 멀찍이 묶어 놓으라고 시켰다. 이렇게 해서 매일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은 문제의 고양이를 잡아 예배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올리브나무 숲에 고양이를 묶어 놓게 되었다.
구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저녁기도를 올리는 시간이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고양이를 묶어 놓았다. 얼마 후 고양이마저 늙어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른 떠돌이 고양이를 잡아 와서라도 고양이를 묶어 놓고 나서야 기도를 올렸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도 마침내 모두 늙어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후손들은 저녁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기도를 올렸다. 묶어 놓앗던 떠돌이 고양이도 죽고 마을을 떠도는 다른 고양이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후손들은 이웃마을로 가서 고양이를 비싼 가격에 사다가 올리브나무에 단단히 묶어 놓은 다음에야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마을 사람들은 고양이를 묶어 놓지 않고 행하는 기도나 예불은 상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구루의 유식한 제자들이 학구적인 전례 규범에 대한 연구서를 출간했다. 주제는 '저녁 기도를 올리는 시간에 고양이 한 마리를 올리브나무에 묶어 두는 일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다. 다시 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고양이와 올리브나무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고, 그에 따른 다양한 학파가 생겨났다. 고양이를 기도 시간 삼십 분 전에 묶어 둬야 하는지 아니면 물푸레나무에 묶어 둬야 하는지, 나무에 묶을때 몇 미터 지점에 묶어야 하는지 등을 두고, 이들 학회는 지금도 나름대로 치밀하고 세밀한 각종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인도의 우화가 보여주는 이 관습과 의례에 관한 문제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고있지만 그 중에도 기독교가 특히 심하다.
종교생활적 율법주의가 지나치게 팽배해진 기독교는 그 진실된 종교적 진리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져 오로지 본래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율법만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율법주의 종교로 전락해버렸다.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해선 안된다. 그들은 예수를 그저 얼굴마담으로 걸어놓고는 인습으로 내려앉은 율법만을 맹신하고 추종하기 때문이다. 율법이란 무엇인가 제대로 고민조차하지 않고 그저 목회자의 말만 따라 행하는 무지의 행동들을 볼 때 그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나쁜 결과를 낳는지 이미 우리의 오랜 역사가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율법과 자기 생활과의 일치만이 지상 최고의 진리라 여기고, 율법이 무엇인지 그 근본적 의미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한 채 율법이 명하는 것들만을 추종하는 멍청하고도 어리석은 행위. 사람이 신God 앞에서 진실로 의롭게 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 채 그저 율법만을 맹신하는 행위. 진리에 관한 진실한 믿음은 뒤로 한 채 율법만을 핥아대며 자신이 신의 자녀인 양 행동하는 위선적인 행위. 이러한 행위들이 결국은 율법주의를 낳았고 돌이킬 수 없는 폐단을 낳게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 바로 이러한 율법주의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러한 율법주의의 폐단을 고쳐 진실한 마음과 진정한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을 것을 말하였지만 이러한 예수의 뜻을 따르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고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야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3;11)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낡고 퇴색된 율법주의를 져버리고 진정한 마음을 회복할 것을 말한다. 율법주의란 굉장히 위험한 맹신이다. 관습과 의례에 관한 맹신적 추종이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을 낳아버렸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신앙심을 갖지 못하고 율법만을 따르고자 하는가?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을 외치며 비신앙자들을 지옥불로 내던지려는 악마와도 같은 짓을 저지르는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건지 알기나 하는걸까? 예수는 고작 동성애를 비난하고 비신앙자들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를 회개시키고 시기와 살인, 분쟁과 사기, 악독을 없애려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혔건마는 어리석은 민중들은 예수의 뜻을 져버리고 다시금 율법주의로 회귀하였다.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태복음 12:9;13)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며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서 (1:14;15)
십일조이며 사순절이며 하는 것들이 도대체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예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자신들도 모르게 죄를 지어버린 죄인들에게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선善을 회복하게끔 참 자유를 주었건마는 다시금 자신들을 율법주의로 속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보라. 이 얼마나 끔찍한가!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법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로마서 (2:17;2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로마서 (3:3)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건 동성애를 죄악을 단정짓고 비난하고 매도하며, 무신론자들을 저희들 멋대로 심판하여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의로워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본질적 의미에 대한 궁구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위선자와도 같은 수많은 목회자들의 말만을 추종하며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 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로마서 4:13;15)
그러나 이는 율법을 폐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에 대한 맹신과 추종으로 이뤄지는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비록 그리스도가 율법으로인해 죽임을 당하였더라도 그로하여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진실한 믿음을 통해 의로워질 수 있게 되었으니. 진실한 믿음을 회복하여 그를 바탕으로 율법을 바라본다면 율법은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는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의미를 깨닫고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니,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육신으로 있는 동안 우리의 믿음이 더욱 진실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내 자신의 마음으로는 신God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