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되는 방법
우리가 책을 읽을때 그 책의 내용은 아직은 경험되지 않은 지식과 사실의 형태로서 우리의 뇌에 머무른다. 그러다 이 지식과 사실이 실제로 느껴지는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감정을 배우게 된다. 머리 속의 지식과 사실이 감정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이는 뇌와 몸, 정신과 신체의 합일로도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합일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습득하게되며 이 새로운 경험은 또 새로운 감정을 탄생시킨다. 신체는 이 새로운 감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변화를 하는 데 이러한 변화가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서 체득화된 것이 바로 진화인 것이다. 우리는 긴 긴 인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진화를 거듭해왔다. 그리고 이 진화의 과정 속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담겨있는데 그 감정들 중에는 분노, 심판, 증오, 두려움, 불안감 등과 같은 고통을 유발하는 감정들 또한 속해있다. 이러한 감정들의 중독성은 매우 강해 결국엔 우리 정체성의 일부를 형성하게 된다. 강력한 감정을 유발하는 일의 경험은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양식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이 생각과 행동양식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년기에 겪은 트라우마로 지속적인 불안감을 안고 성장한 청년에게 있어 불안한 성격은 그 청년의 정체성이 된다. 이러한 감정의 강력한 영향은 연쇄적 고리를 물고 계속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는 습관의 형성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미치게되는데,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35세가 될 무렵에 우리의 정체를 규정하는 것의 95%가 습관화된 무의식에 기반하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암기하는 행동과 감정적 반응은 나머지 5%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중년을 넘긴 사람이 삶의 변화를 주고자 한다면 5%에 불과한 의식으로 그 변화를 일궈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삶을 다짐해도 왠지모를 죄책감과 부정적인 기분이 들게 하여 하여 궁극적으로 삶의 변화를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명상은 이러한 무의식을 인지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인지는 습관화 된 무의식을 직면함으로써 기존의 행동을 바꾸어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명상은 실질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꼭 방법이 명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점은 자신의 감정이 변화하고 발생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있다. 즉, 굳이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일상 생활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상을 추천하는 이유는, 명상의 경우 우리를 외부 환경으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감정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차단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단절된 고요 속에서 감정은 더욱 더 요동치게되는데, 계속된 명상을 통해 이러한 감정의 요란함을 길들인다면 우리의 몸은 마침내 변화하게 된다. 몸이 나의 새로운 사고방식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이전과 같은 똑같은 부정적 상황에서도 예전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과거의 자신과 생각, 행동양식, 감정을 직면함으로서 인지를 통해 악순환의 연쇄고리를 끊어내고 새로운 자신과 익숙해지는 방법인 것이다.
인간은 그 어느 생명체보다도 현실감있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생각만으로도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고민거리들을 생각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최악의 상황조차 머릿속에서 아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으며 무의식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몸마저 현실의 일과 머릿속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우리는 기억의 심연 저 깊은 곳으로부터 숨어있던 과거의 아픈 기억들까지 끄집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아픈 기억이 떠오르면 우리는 마치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난 것마냥 반응하기도한다. 이는 떠올리는 경험과 관련된 감정들을 유발하고, 몸은 그 감정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련의 현상들로인해 과거와 미래 속에 집착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길들이고있다. 즉, 그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 속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생존에 의한 본능이다. 생존 본능에서 발로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비로소 현재에 충실할 수 있게 된다. 우습게도 이러한 현재의 충실한 상태는 음주, 마약을 한 상태와도 유사하다. 과거의 성격들로부터 사라져버리게되는 것. 본능에서의 부정적 감정을 제어하게되면 우리는 더 이상 에고에 구속되지 않는다. 탈아를 통해 우리는 덜 분석적이게되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이 이렇게 탈아의 상태로 감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되는 것이 곧 우리의 자연적 상태이자 창의력 넘치는 상태이다. 창의력이 넘치는 상태에서는 자아가 사라진다. 시간도, 공간도 모두 의미가 없어지며 보다 높은 차원으로의 인식의 발달이 이루어진다. 이는 모든 것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진보인 것이다.
반면 생존 본능에서 발로된 삶은 타인과의 거리감을 형성하며 자신만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탈아, 자아가 사라진 상태인 것이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미지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 비로소 변화의 시점이 찾아오게 된다. 이는 위험하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모험이 될 것이며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위험하고도 흥미로운 모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준다면,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맞이하기 위한 행동양식에도 변화가 온다면 우리 몸의 유전자와 뇌는 이에 맞춰 확장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현실 속에서 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똑같은 생각과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선 이러한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나의 생각, 행동, 감정이 나의 현실을 변화시킨다. 사실 글 앞에서부터 이러한 변화를 <변화>로 표현했지만 그보다는 원래의 것으로의 회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회귀로의 과정은 '의도'와 '내맡김'의 섬세한 균형이 필요한데,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의도를 통해서. 그리고 기존의 나를 초월하는 그 무언가를 신뢰한다는 것에서 우리의 회귀는 시작된다. 이 신뢰는 내가 원하는 특정 방향으로, 나의 의도에 맞게 진행될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을 말한다. (배가 나아갈 수 있도록 바람에게 맡기 듯) 문제는, 우리의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현재'를 믿을 수 있는가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앞에서 언급한 일정 수준 내맡김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통해 뇌와 몸의 변화를 미리 이뤄내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도 이런 과정에서 하나의 준비 단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외부에서 결과가 현실화된다. 본능을 거스르고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우리의 몸은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 이미 일어났다고 믿기 시작할 것이다. (몸이 과거 아픈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에 고통스러움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이와같이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신뢰의 경지에 오르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안다는 사실을 아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시작하는 것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굉장히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시작하기조차 두려워 포기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야한다. 우리 삶이 지루하고 재미없는 반복적 일상으로 지속되는 이유는 우리가 계속 그쪽에 길들여져왔고 친숙한 것을 본능적으로 갈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 연쇄고리를 끊어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친숙한 삶을 살아가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