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백일현.심지훈.김성민.강정현] ▶ 16일 경기도 모 부대에서 일과를 마친 병사들이 내무반에 둘러앉아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다. 강정현 기자 #1. “아싸! 저거 엎어치기였지? 그치?” 지난 16일 오후 7시 경기도 문산 육군 전진부대의 한 내무반. 동료 5∼6명과 함께 내무반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아테네 올림픽 유도 생중계를 시청하던 김윤호(22)일병은 이원희 선수가 한판승을 거두자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분대장 황철순(21)병장이 옆에 있는데도 입대 8개월 된 일병은 거리낌없었다. 김 일병은 “평소에도 분대장과 함께 편한 자세로 TV를 본다”며 “요즘은 이병·일병이라고 ‘각 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2. 비슷한 시각 대대 식당. 우규진(23)병장이 저녁 식사를 막 끝내고 수세미로 자신의 식기를 닦고 있다. 그는 제대를 70일 남겨 놓은 ‘왕고참’이다. 후배들이 식기를 대신 닦아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우 병장은 “후임한테 시켰다 걸리면 엄청나게 혼난다”고 말했다. 졸병이 고참 할 일을 대신 해주는 미풍양속(?)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3. “형우야.” 조현익(22)병장이 내무반에서 신병을 불렀다. 김형우(23)이병은 입대 40일 된 막내다. 김 이병은 “네”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목이 터져라 악쓰며 관등성명을 댈 것으로 예상한 기자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만 관등성명을 대고 다음부터는 생략한다고 했다. 전진부대 소속 대대장 이찬우 중령은 “한마디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말했다. 구타 및 가혹행위, 규정 이외의 얼차려는 물론 후임병에게 심부름 시키기, 식기세척 강요 등이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군대 문화가 바뀌고 있다. 취재팀은 16일 육군 전진부대를 방문했다. 1년 전인 지난해 8월 17일 육군은 병영 내 구타와 성추행 사고 등이 잇따르자 ‘사고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취재팀은 부대 현장 방문에 앞서 터미널·역 등지에서 전국 각 부대에 근무하는 사병 30여명을 만나 이 같은 병영 생활의 변화를 확인했다. 사병들의 취미생활이 자유로워진 것도 눈에 띄는 변화다. 부대에 배치된 지 3주째를 맞는 이 부대 전투병 양모(20)이병은 배치 첫날 부대 안에 천막을 치고 역기·아령 등을 비치한 ‘야전 헬스장’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일과시간 훈련이 끝나고 자유시간을 이용해 최대한 멋지게 몸을 만들 것”이라며 “비만기가 있어 제대할 때까지 15㎏을 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고참 눈치보며 내무반에서 잔심부름하던 것은 옛 이야기가 됐다. 예전의 신병 전입신고식은 기합받는 날이었으나 요즘은 소대장 입회 하에 고참들이 신병을 축하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그러나 흔히 ‘짬밥문화’로 불리는 군대의 악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휴가 나온 전방 부대 이모(23)병장은 “많이 개선되긴 했으나 ‘개념 없는 놈’ ‘머리는 옵션으로 달고 다니느냐’는 등의 인격 모독성 발언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구타와 규정 이외의 얼차려는 없어졌으나 ‘왕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최근 제대한 최준호(24)씨는 “신병이 규정을 내세우며 선임병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아 왕따시켜 혼낸 적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