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맨땅에 헤딩하라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의 씨앗이다) - SES
설립되던 시기부터 해외시장을 준비했던 SM은 국내에서 인기를 얻은후 일본으로 진출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장기체류을 요구하는 해외활동으로 인해 병역문제에 자유로운 다국적 여성팀을 기획하게 되었고 한국어권, 영어권, 일본어권뿐만 아니라 중국어권에서 자란 소녀를 포함한 4인조 그룹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중국어권 여자연습생이 중도에 포기하면서 3인조로 나왔습니다.
SM은 한국 기획사와 일본 기획사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공동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본진출이 이루어집니다. SES는 기획 당시부터 해외 활동을 염두해두고 결성된 그룹이었으나 진출과정이 주먹구구식이었고 허술했으며 일본 측과 커뮤니케이션도 엉망이어서 계약후 결국 많은 문제점이 들어나게 됩니다.
SES의 가치을 알아본 이지치 히로마사(일본 여그룹 SPEED의 프로듀서)는 일본 계약건으로 극비 방한까지 합니다. 그러나 SM은 히로마사와의 협상을 중단하고 스카이플래닝이 회사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1/3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금액으로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일본기획사파트너로 스카이플래닝과 계약한 SM은 음반배급사로 소니와 체결한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니뮤직 측에서 SES 쪽에 7년의 계약기간을 요구했지만, SM과 SES의 계약기간이 5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속기간이 짧아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계약이 무산되고 맙니다.
소니외에 다른 음반메이저레이블과 음반계약을 체결할려고 했으나 모두 스카이 플래닝과의 계약을 거부하는 바람에 별수없이 마이너음반사인 VAP와 음반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스카이 플래닝이 규모가 거대해보이지만 연기자, 모델 기획사라서 가수에 대한 기획이 매우 부실했습니다.
특히 세련되면서 단정했던 한국에서의 스타일과 달리 일본에선 촌스럽고 천박해보이게 한 의상과 헤어스타일, 기획력부재와 어설픈 지원을 하는 스카이플래닝기획사의 삽질, 또 흥보력부족과 유통도 제대로 못하는 VAP음반사의 삽질, 그리고 의사소통문제을 해결하지 못한 어설픈 SM의 행정처리등등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 - 헤이삼
SES의 매력을 살리지못하게 되며 처음 계약과정의 엉청난 실수로 인해 SES의 일본진출은 말그대로 고난의 행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과 북한을 제대로 구분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제일교포는 차별을 받으며 살았던 시절이였었습니다.
한국출신을 당당히 내세웠으나 팬사이트에 어떤 일본인이 SES가 보는 눈앞에서 포스터를 찢었다거나 SES한테 날계란을 던졌다는 등의 후기가 올라올 정도로 차별이 심했습니다.
SES는 외국인으로서 갖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이국적 느낌을 내도록 음악도 R&B풍에 영어발음도 원어 발음에 가깝게 내는거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쪽 음반사에서 일본내에서 그런 컨셉으로는 먹힐 수 없다고 해 영어 발음도 일본식으로 바꿔서 앨범을 내면서 현지 그룹과 차별화를 두지 못하면서 결국 일본 내 수많은 댄스 그룹 중 하나로 취급되고 마는 결정적인 실수을 하게 됩니다.
결국 2002년 12월 SES가 해체함에 따라 일본활동도 종료됩니다.
(당시 일본대중에게 R&B노래는 일본어에 맞지 않다란 인식이 있었는데 그걸 깨뜨린게 미시아란 가수였습니다.
그직후 정확한 영어 발음에 전통 미국식 음악을 들고온 우타다 히카루가 성공한후 일본내에선 신선하고 세련돼 보인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만약 SES가 영어원음발음에 R&B노래를 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거라고 SES팬들이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2. 철저하게 준비된 기획으로 승부하라(이미지메이킹과 우수한 흥보전략) - 보아
SM은 SES의 실패로 자신이 직접 기획하기로 마음먹고 SM제팬이라는 현지기획사을 설립하여 직접 기획과 프로듀서을 합니다. 또한 소속가수를 일본에 진출시킬 때 음박레이블과 협상에서 최소한 프로듀서권은 SM 쪽과 합의하도록 계약을 맺습니다.
또한 일본레이블은 7년이라는 장기간 계약기간을 원했고 또한 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나이가 어려야 나중에 탑이 될때 오랜동안 인기을 얻을수 있습니다. 즉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2,3년 활동을 하고 일본에서 7년을 하려면 10년을 활동할 수 있는 ‘여자’ 가수여야 했죠.
즉 나이가 초등학생이어야 준비가 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결국 SM은 전국에 있는 초등학교 여자 아이에서 오디션을 하고 마침내 발견한 가수가 바로 보아입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죠.
발굴후 SM은 보아에게 일본어, 댄스, 영어, 노래까지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하고 13살의 나이에 데뷔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데뷔한지 1년만에 일본에 진출하게 되죠.
준비된 과정도 성공적으로 에이벡스라는 거대음반사에 계약을 체결합니다.
첫 쇼케이스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번째 싱글 ID PEACE B를 발매를 했고, 오리콘에 20위권안에 진입해 한국언론들은 모두 깜짝놀라게 했습니다.
첫 싱글이 발매할때 당시 보아는 개인차가 없어 택시나 전철을 타고 이동을 했고 일본 지방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길거리캠페인을 비롯해 일본 전역의 레코드점을 돌아다니며 직접홍보를 하고 라이브를 하고 싸인회, 씨디 구매회 등 발로 뛰는 홍보행사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결국 에이벡스의 최대이벤트인 에이네이션에서 보아는 쓰러지고 맙니다.
그당시 sm제팬이라는 신생기획사의 흥보와 또한 보아의 일본스케쥴을 캔슬문제로 직원들이 너무 바빠서 보아는 쓸쓸히 병실에 누워있게됩니다.
퇴원후 보아의 모습은 더이상 방송에서 볼수없게 되고 한국사람들은 일본의 벽은 역시 너무 높다 라는 말과 함께 보아는 점점 잊혀져 버립니다.
2001년 연말 디지털 슈퍼 드림 라이브에서 보아는 氣持ちはつたわる를 곡을 선보입니다.
결과는 10대의 여고생팬이 생겨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립니다.
아마도 일본에선 파워풀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수가 없으므로 어느정도 10대의 일본여자에게 매력적으로 어필이 되었죠.
여세을 모아 팝잽에서 Listen to my heart을 곡을 발표합니다.
결과는 대 성공.
보아의 인생을 바꾼 명곡이 탄생하게 되고 일본에서 크게 유행을 탑니다.
그러나 문제는 보아는 한국에서 2집녹음을 위해 한국에 있는 상황이라 그 당시 일본에 없었고, 그 덕에 일본내에 프로모션이 없는 문제로 보아의 노래는 아는데 보아는 모르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Listen to my heart는 '일본의 신인가수가 부른 곡'이 되어 보아는 얼굴없는 가수가 됩니다.
2002년이 되고 에이벡스는 보아의 1집앨범과 동시에 5번째 싱글을 발매하는데 이누야샤의 엔딩곡인 Every heart입니다. Every heart는 발매전부터 벨소리차트1위를 기록하며 대단한 반응을 이끌었습니다.
SM이 에이벡스와 계약을 맺을때 그 첫 포문이 중요했기 때문에 수익의 대부분은 마케팅 비용으로 충당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게 됐죠.
이제 에이벡스가 보아의 가능성을 믿고 엄청나게 옥외광고와 CF를 통해 보아를 알렸습니다.
당시에는 한국 출신이라는 것이 일본 활동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보아는 코스모폴리탄으로 포장됐습니다.
또한 일본내에선 '어린나이'가 엄청난 경쟁력을 가지기 때문에 어린나이라는것을 강조했습니다.
보아 - 타키시메루
에이벡스는 각종매체에 Every heart를 부른 가수와 Listen to my heart를 부른 가수는 동일 인물이며, 영국에서 몇 개월, 뉴욕에서도 살고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한국에서 온 15세 천재소녀. 이런식으로 보아을 이미지메이킹을 하게됩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한국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천재소녀의 BOA의 모습을 상상하며 오랫만에 제대로 된 가수가 나왔다 라는 말을 하였고, 보아는 말 그대로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의 첫 앨범이 오리콘 첫등장 1위를 하게 되고 100만장을 팔게 됩니다.
이때 보아의 나이 만 15세였죠.
그 이후 보아는 일본내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일본프로그램 총 통틀어 최고라 칭송받는 홍백가합전에 6회연속 출연하게 됩니다.
보아 - 배드드라이브
3. 미래의 씨앗을 심어라. 준비된 자에게 언젠가 기회가 온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준비된 전략) - 소녀시대 수영
2002년 한일월드컵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 TV 프로그램 ASAYAN에서 공개오디션을 추진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어린이 연예인지망생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진행해서 2인조 한일여성듀오을 만들어 가수로 데뷔시키고 활동하는 과정을 담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여기서 SM의 최수영과 이연희가 오디션에 도전합니다
응모자만 해도 일본에서 8,698명, 한국에서 7,194명, 합계 1만 5,892명이었습니다.
이 많은 응모자에서 추려내서 일본에서 일본여자 9명, 한국여자 9명과 대결을 펼치는 서라이벌오디션을 실시한후 최종으로 선발된 소녀는 12살이었던 최수영과 13살의 다카하시 마리나!
이렇게 두 소녀가 한 팀을 이루게 되고 카와무라 류이치 프로듀서가 유닛명을 Route 0 이라고 정합니다.
(참고:그룹명 'route0'은 '0'을 일어로 읽으면 '제로'나 '레이' 이지만 일부러 한국어인 '영'이라고 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연희와 소녀시대 수영의 데뷔전 일본오디션
다카하시 마리나와 수영
이렇게 선발된 최수영 양과 다카하시 마리나 양은 철저한 교육을 받고 2002년 4월 26일 일본에서 싱글 1집 'START'로 데뷔합니다.
한일 월드컵에 앞서서 "한일을 연결하는 다리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요"라고 밝힌 두 소녀는 2002년과 2003년, 2년동안에 활동하면서 일본에서 세장의 싱글을 발표했지만 그다지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해체하게 됩니다
그당시 수영은 혼자서 지하철를 타고 미리 프로그램의 피디와 만나서 사전에 오디션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소녀시대멤버들에게 고생한 애기를 들려주었죠.
루트영은 일본에서 가요 차트 1위를 차지한 보아도 만났는데 보아는 이들에게
"아직 어리니까 일어도 곧 잘 할 수 있게 될거야. 힘들겠지만 힘내!"라고 격려와 조언를 아낌없이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때의 경험은 먼 훗날 소녀시대의 일본진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4. 밑바닥을 구르고 지방을 공략하라 (출연이 안될경우 우회해서 돌아가라) - 동방신기
SM의 모든 연습생을 경쟁시켜 최고의 실력가을 모아 동방신기라는 그룹을 론칭했습니다.
동방신기라는 말 그대로 아시아을 제패하겠다는 SM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그룹이죠.
2004년 가요계의 탑으로 올라선후 2005년에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출합니다.
예전에 SES가 일본기획사와 일본음반사의 요구로 인해 스피드의 아류가 되어 흔한 걸그룹이 되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되어버린것에 감안하여 동방신기는 아이돌그룹이 아닌 아카펠라그룹으로서 그룹을 알렸습니다.
동방신기는 일본으로 진출할때 댄스보다 가창력과 실력으로 승부하는 아카펠라 그룹으로 포커스를 맞추고,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이벤트나 소규모 공연에서 항상 라이브을 하며 최고의 퍼포먼스을 관객들에게 어필합니다..
그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의 아이돌에게 가창력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점을 이용해 동방신기는 가창력과 화려한 댄스실력을 내세웠고, 후에 그들의 차별화된 전략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남성가수는 여성가수보다 진입장벽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그리고 현역한국탑의 가수라는 타이틀도 일본에선 하잖게 취급하죠.
한국의 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일본대중들은 동방신기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또한 그당시 남자댄스그룹은 쟈니스에 의해 TV출연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TV출연이 불가능한 동방신기는 무명의 신인으로 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불교대학 강당과 쇼핑몰의 계단에서 무료공연을 하기도 했고 유선마이크를 잡고 댄스공연도 했으며 무대도 없는 곳이면 길거리공연을 하고 음향장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공연을 했습니다.
이렇게 바닥을 구르니 드디어 지방케이블방송에서 새벽방송에 겨우 출연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일단 메이저인 지상파에 나올수 없으니 여러개의 지방방송과 케이블방송을 출연하여 지역밀착형 프로모션을 합니다.
즉 지상파에 갈수 없으니 지방방송을 공략하여 지방에서 인기을 다진 다음 수도로 진입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일본은 수백개의 지방도시들이 있는데 그런 지방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여러가지 예능방송에 출연합니다.
목장가기, 농장가기 젖소 젖 짜기, 말생회 먹기, 고양이 생회 먹기, 소혓바닥 요리먹기등등
점점 지방을 하나하나 공략하면서 인지도을 높여갑니다.
이런 활동으로 서서히 지방에서 자신의 코어팬층을 다집니다.
여러가지 자그마한 행사을 하면서 팬층을 결집시킨 동방신기는 팬층이 늘어나자 투어을 하였고 부도칸까지 공연을 할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2년을 노력하니 드디어 2007년에 지상파인 헤이삼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뮤직스테이션(엠스테)의 벽은 높았는지 멘트 한마디 못하는 백댄서로 코다쿠미에게 얹혀서 겨우 출연합니다.
아무튼 방송에 출연할때마다 동방신기는 하루종일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직접 CD를 돌리면서 흥보을 합니다
동방신기 - 주문 (일본TV)
2008년 한국스탭들이 만든 Purple Line. 그 곡으로 동방신기는 데뷔 3년만에 첫 오리콘 위클리 1위를 함과 동시에 아시아투어도 20만을 동원합니다.
2008년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으며 결국 그해에 홍백가합전 출연도 합니다.
2009년 3월, 천하의 쟈니스도 막을수 없었는지 일본데뷔 4년만에 뮤직스테이션에 정식으로 출연을 합니다.
2월부터 일본투어와 아시아투어를 병행했는데 무려 45만명을 동원했습니다.동방신기의 인기는 하루 자고일어나면 팬이 늘어났고 상품을 내놓는 족족 매진이고 못만들어서 못팔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동방신기는 꿈에도 바라던 도쿄돔까지 공연을 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도쿄돔공연후 거짓말같이 동방신기는 JYJ와 신동방신기로 2개의 그룹으로 분리됩니다.
이때 에이벡스는 모든 SM소속가수의 일본활동을 중지시키는 최악의 결정을 하게 됩니다.
5. 현지화의 위험성 - 천상지희
천상지희는 SM 여성연습생중에서 가장 뛰어난 가창력과 화려한 댄스실력을 지닌 여성을 뽑은 정예팀이었습니다.
동방신기와 마찬가지로 2005년에 일본에 진출합니다.
천상지희도 역시 힘들지만 열심히 활동하여 점점 기반을 쌓게 됩니다.
Piranha로 일본에서 인기을 얻은 다음 일본에서 첫 콘서트 《天上智喜 Graceful Vol.1》콘서트를 개최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드디어 에이벡스가 천상지희의 성공에 확신을 하여 천상지희의 전국 LIVE TOUR 개최가 결정됩니다.
천상지희 - Piranha (에이네이션)
하지만....
스테파니는 허리부상으로 빠지게 되며 결국 투어을 도중에서 중단하게 됩니다.
얼마후 3인체제로 전환하고 이제 일본활동을 다시 재개할 예정이었습니다.
이때 동방신기사태로 에이벡스가 모든 SM소속가수을 일본활동중지을 결정합니다.
천상지희, 보아는 지나친 일본 현지화로 인해 한국의 기반까지 모두 잃게 되는것을 감수하면서 일본활동을 했는데 에이벡스의 일본활동중지로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활동이 중지되는 커다란 고난에 부딪힙니다.
6. 소셜네트워크을 활용하라 - 소녀시대
SM은 SES의 여성스러움, 핑클의 친근함, 보아의 실력파이미지을 함께 믹싱하여 소녀시대을 론칭합니다.
SM은 보아, 천상지희가 지나친 현지화로 인해 한국에서의 기반이 잃어버리는 결과을 초래하게 되자 어떻게 하면 헐리우드스타처럼 현지화을 하지 않으면서 인기을 끌게 될지 연구을 하게 됩니다.
보통 해외같은경우 경우 아티스트를 알려기 위해선 지역 TV방송에 나가고 라디오에 음악을 내보내면서 클럽의 무대나 길거리공연, 지역행사로 조금씩 차츰차츰 알려가는 방법을 택합니다.
특히 일본은 이런 밑바닥과정을 거쳐야 지상파음방에 진입할수 있죠.
보통 일본에서 뜰려면 4년정도 팬을 모으는 작업을 하는데 밑바닥에서 정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후 스타가 됩니다.
모든 SM가수는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했으며 보아, 동방신기는 성공했으나 SES, 천상지희는 실패하고 주저않았죠.
그러나 유투브라는 월드와이드 채널이 생겨나 전세계의 콘텐츠를 주고받으면서 해외에 알려지는게 가능해졌습니다.
SM은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가 급부상하자 유튜브에 자사의 아티스트 신곡을 전세계를 향해 동시에 공개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그런후 자사의 아티스트에 대한 정보교류을 원활히 할수있도록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자사아티스트의 홈페이지을 개설하여 팬층을 결집시키는 전략을 씁니다.
유튜브 동영상 재생횟수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시장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는 하나의 자료로 삼았고, 그 전략을 통해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가 아시아투어을 감행하여 둘다 아시아에서 부동의 탑이 됩니다.
특히 원더걸스의 노바디와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 그리고 소녀시대의 Gee는 중화권과 동남아을 휩쓸었죠.
The Great Escape
SM은 소녀시대의 일본진출전략으로 일본데뷔전에 유튜브에 영상을 내보내서 팬을 확보하고
데뷔도 하지않았는데 2만명 규모의 데뷔 쇼케이스을 열게되어
해외 아티스트 데뷔 쇼케이스에서 2만 명 동원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에 일본 미디어들이 알아서 달려들게 만들어 결국 NHK에서 톱뉴스로 보도가 되고
자연스럽게 밑바닥과정을 생략할수 있게되어 바로 지상파 TV에 노출을 할수 있는 급상승 효과를 얻었습니다.
또한 보아와 동방신기가 고생해서 만든 케이팝의 실력파이미지와 그들이 만들어낸 케이팝 한류팬들도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루트영시절를 껶은 수영은 일본어와 일본문화를 잘 알고 있어서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죠.
일본에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간 소녀시대는 메이저 음방인 헤이삼, 엠스테에 출연하게 되며 점점 성공을 길을 향해 걷게 됩니다.
7. 소녀시대의 맹활약과 화려하게 부활한 동방신기
2011년 5월 31일 오사카를 시작으로 사이타마, 도쿄, 히로시마, 나고야, 후쿠오카를 도는 소녀시대의 일본 콘서트 투어를 개최합니다.
총 45만명의 티켓 응모자가 몰려 목표 관객동원수가 당초의 2배로 늘어났고, 공연내내 전석 매진이었습니다.
여기서 소녀시대로 뭔가 보여줘야 후에 SM의 다른 가수들까지 안착이 되니까 SM회사의 사운을 걸어 모든 역량과 노하우를 집결해서 만든게 아닌가 싶을정도로 대단한 퀼리티을 자랑했죠.
소녀시대도 그동안 갈고 닦은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투어를 함과 동시에 일본 첫 정규 음반 GIRLS' GENERATION을 발매해서 시너지 효과를 노렸고 결국 87만 장 이상을 팔아버립니다.
콘서트 마지막에 펼친 퍼포먼스 지니, 배드걸 (헤이삼)
콘서트을 보고온 일본인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僕は日本のアイドルも好きですが、世界に出て行くならそろそろ「素人っぽさ」から抜け出した方がいいと思います。正直、昨日の少女時代のショーは衝撃的でした
나는 일본의 아이돌도 좋아합니다만, 세계에 나간다면 이제 「아마추어 같음」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정직, 어제의 소녀 시대의 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 데이브 스펙터(일본 방송에 출연하는 미국인)
솔로코너가 시작되는 즈음부터 무엇인가 나의 보는 시선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뭡니까 이 여자애들은? 이라고... 이것이 한국인가? 라고...
이건 뭐 엄청 퀄리티가 높고, 댄스도 노래도 각 멤버 솔로로도 충분할 정도로 차례차례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연속으로...
보는 도중부터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가타리스트 Kenshi
2011년 윤호와 창민등 2인으로 재편된 동방신기가 부활하면서 일본 에이네이션공연에서 8년동안 엔딩을 독차지했던 하마사키 아유미를 제치고 엔딩무대을 장식하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또한 싱글 Why? (Keep Your Head Down)를 발매하며 총 28만장을 판매하였죠.
동방신기 - Keep your head down (뮤직스테이션)
2012년 톤투어를 개최해서 55만명을 동원하여 일본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킵니다. 또한 톤앨범은 33만장를 팔아치웠죠.
동방의 놀라운 인기에 NHK방송에서 이례적으로 동방신기의 특집프로그램을 단독편성하여 NHK의 순간시청률 종합1위를 달성합니다.
2013년 타임투어를 돔투어로 개최하여 무려 85만명을 동원합니다.
타임투어의 경이로운 인기에 해외아티스트로써 최초로 닛산 스타디엄을 2회 추가공연을 결정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타임앨범 이틀만에 25만장판매, 현재 차트 진행중 )
8. 마침내 일본에서 SM을 브랜드화시키다.
소녀시대가 투어을 돌고 있는 도중에 SM은 파리에 SM타운공연을 합니다.
결과는 대성공.
특히 백인에 약한 일본인에 SM 브랜드을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샤이니가 영국에 진출할때 "애비로드 라이브!"을 선보이며 일본인에게 비틀즈을 연상시키는 전략을 씁니다.
또한 샤이니는 투어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슈퍼쥬니어도 도쿄돔을 2일 매진시켰습니다
동방신기와 소녀시대가 연달아 히트하면서 점점 SM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가자 SM는 도쿄에 SM타운라이브을 개최합니다.
무려 15만명을 인원을 동원하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SM이 1998년 SES로 진출시킨지 13년만에 동방신기와 소녀시대로 SM의 브랜드화을 성공시키면서 마침내 일본에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SES의 일본진출에서 일본애들의 박대에 한이 맺힌 SM은 소녀시대로 한을 풀게됩니다.
특히 SES의 첫 일본데뷔곡이 만나는 세계(めぐりあう世界)인데 소녀시대의 첫 한국데뷔곡이 다시 만난 세계(また巡り逢えた世界 )입니다.
(참고: 몇몇 일본인의 블러그에서 SES의 일본데뷔곡과 소녀시대의 한국데뷔곡의 이런 점에 놀라워하며 애기을 많이 하는 편이더군요.
タイトルが「めぐりあう世界」だったとは・・・
少女時代のデビュー曲が「また巡り逢えた世界 Into The New World」
とはSMEの執念を感じる
타이틀(SES)이 만나는 세계 (めぐりあう世界)라니.......
소녀시대의 데뷔곡이 다시만난세계(また巡り逢えた世界 Into The New World)라니 SM의 집념이 느껴진다.
소녀시대 팬의 블러그중...
少女時代のデビュー曲(韓国)は、『Into The New World(まためぐりあった世界)』ですが、 S.E.S.の日本デビュー曲のタイトルは『めぐりあう世界』でした。
これは偶然なのか、事務所(SMエンターテイメント)の思い入れなのか、興味深いところです。 )
소녀시대의 데뷔곡이 다시만난세계(Into The New World(まためぐりあった世界)인데 SES의 일본데뷔곡이 만나는 세계(めぐりあう世界)입니다.
이것은 우연인가, 사무소의 생각인가, 흥미진진합니다.
SES - 만나는 세계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출처 - 가생이 방송연예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