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할 사람에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묻는 것은 그 사람의 장래 희망직업을 묻는 상투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실질적인 대답은 그 사람의 실제희망 보다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상태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생활을 할 사람에게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식당에 같이 들어온 사람에게 "뭐가 먹고 싶니?"라는 질문과 견줄만 하다.
그리고 그 대답은 먹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의 질문이냐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그 상황이란 것이
1. 먹고 싶다고만 하면 뭐든 편하게 먹을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 먹고 싶은 것을 말한다.)
2. 가급적이면 비싼음식은 피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 먹고 싶은 것을 눈치를 봐가며 말한다.)
3. 애초에 비싼음식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일수도 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 중에 그나마 먹고 싶은 것을 말한다.)
장래의 희망직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할수도 있다.
즉, 돈이 별로 없어서 고를수 있는 음식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음식이란 것의 맛이나 위생이 형편없다.
심지어 그 엉터리 음식이라도 피할수가 없다.
이는 즉,
4. 뻔히 엉터리인 음식을 하는수 없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취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선택권은 주어졌지만 여기에서는 사실상 선택의 자유란 것이 없다.
여기에서는 피할수 없는 의무와 가짜선택에 따른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뭐가 먹고 싶은지 묻는 것이 우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여나 이와 비슷한 엉터리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뭐가 되고 싶은지 묻는 것 또한 우문일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그런 우문도 모자라서 그에 대한 대한 현실적인 대답에다가(그러니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희망직업)
왜 그렇게 꿈이 소박해? 꿈은 크게 가져야지. 따위로 응수한다면 그것은 개념도 진심도 생각할 생각도 없는 것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이런 대화가 이 시대 멘토들이 충고나 조언을 할때 거의 빠지지 않는 루틴이라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