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서울 올라와서 자취하는 대학생입니다. 자취방이 학교 근처에 있구요. 학교 안에 지하철 출입구가 있어서 집에 갈 때 그 쪽으로 다닙니다. 4시 55분 쯤에 수업을 마치고 저녁 먹기 전에 레포트 쓰려고 집으로 가는데, 지하철 안에 들어가니까 왠 분께서 갑자기 붙들고 사정을 토로하시더라구요.
대강 요약하면 서울에서 어떤 취직관련 시험을 치고 1차를 붙었는데 집에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지갑을 포함한 손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려서 돈이 없다. 강변 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하는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
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하셔서 도저히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구요 (전 울산 사람입니다;; 전라도 비하가 아니라 진짜로 못 알아듣겠더라구요 ㅠㅜ 발음도 강하게 하시는 데다가 말하는 속도까지 빠르셔서;;). 자꾸 2차도 합격해서 성공해서 젊은 애들 돕겠다는 말을 하셔서 대화가 잘 안 통했어요.
솔직히 버스비 18000원도 아깝지만 첫 눈에 사기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서울에 취직 때문에 올라왔다는 사람이 옷이 너무 꾀죄죄하고 (늘어난 회색 티셔츠에 칠부 청바지;;;) 머리도 떡져있고 입에서 악취도 났어요;;
딱 봐도 노숙자잖아요. 대체 무슨 시험인지는 몰라도 안암에 있는 것도 이상하구요;; 가방을 잃어버렸으면 그 후로 못 움직였을텐데 어제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하니 시험을 안암에서 쳤거나 아니면 셤을 치고 안암에 온 거잖아요? 안암이 안암골이라고 불릴 정도로 좀 구석진 곳인데 갓 상경한 시골사람이 일부러 여기까지 올 일은 거의 없어요 진짜(혹시나 싶어서 서울에 지인이 있냐니까 없대요;;)
그래도... 그래도 혹시 만에 하나 정말로 급한 사정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핸드폰이 있으니 주변 지인한테 연락해서 인터넷으로 티켓을 예매해라. 이런 식으로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 분께서 가족은 지금 할머니밖에 없다. 그 분은 인터넷 쓰실 줄 모르신다. 아버지께선 배타고 나가신다. 친구한테 연락하는 건 조금 거시기(이 말 진짜로 쓰는군요;;)하다. 이러시더라구요.
이 순간 '형제 자매도 없나 이 사람은? 이 쯤되면 거의 사기네 -_ -' 싶어서 제가
"그럼 제가 생판 모르는 사람을 도와드리기는 좀 그렇고 18000원도 자취생한테는 큰 돈이니까, 제가 핸드폰 빌려드릴테니 어떤 식으로든 그 쪽 상황을 제게 증명해 주세요. 할머님이든 아는 사람이든 전화하셔서 그 쪽 말대로 어제 여기 올라오고 시험 치신 거 맞다면 제가 그 땐 도와드릴게요." 했습니다. 그 분께선 몇 초 고민하시더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고 하시더라구요. 마침 저를 본 친구가 무슨 일이냐며 제 쪽으로 와서 그 분께 죄송하다고 하고 그 친구한테 가면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서울에 올라온지 1년이 다 되가는데, 그 동안 지하철에서 남 도와주는 일 몇 번 했다가 나중에 100% 사기 같아서 진짜 땅을 치고 후회한 적 많거든요. 예전에 교대역에서 지하철 기다리는데 무슨 인도 혹은 서남아시아 쪽 외국인이 와서 외국의 빈곤 아동 돕는다면서 막 명부에 이름이랑 폰 번 적게하고 돈 내라해서 저 그 때 멍청하게 만 원 냈습니다;;; 울산엔 그런 사람 없었거든요ㅜㅠ
이런 경험이 많은지라, 저도 이후로 남을 돕는데 굉장히 조심스럽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심증으론 거의 사기라고 하지만 진짜 사람이 순진해서 그렇게 어리숙하게 보일수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빠져나오고 나서 집에 오기까지 계속 죄책감 비슷한 걸 느끼네요. 혹시나 내가 저 사람한테 엄청난 굴욕을 준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만약에 진심 저 상황이었으면 진짜 자존심 같은 거 다 무너졌을 거 같거든요...
지금 착잡합니다. 그냥 속는 셈치고 도와줄껄 하는 생각도 드네요 에휴;; 오유님들 생각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