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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한 황제, 헤라클리우스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7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ardien
추천 : 12
조회수 : 315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02 23: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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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십자가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헤라클리우스

가장 고귀한 신이며, 이 세상의 왕과 주인이며, 위대한 호르미즈드와 호스로의 아들이 
천하고 무지한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고하노라.
너는 우리의 지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군주라고 칭하고 있다. 

너는 우리의 보물을 빼앗고 우리의 하인들을 속이고 있다. 도적 떼 같은 군대로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내 어찌 너희 그리스인들을 멸하지 않으리? 너는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은 어이하여 내 손에게 카이사레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아 가지 않느냐?... (하략)

-호스로 2세-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비잔티움의 21대 황제이자 장군. 제국을 멸망 위기로 내몰던 폭군을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다. 6년동안의 전쟁 끝에 최대의 적인 
사산 페르시아를 멸망직전으로 몰아넣고 성물 참십자가를 되찾아 제국의 새로운 황금시대의 서막을 여는 것처럼 보였지만...



1. 제국의 위기와 헤라클리우스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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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 앞에 끌려온 포카스


"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헤라클리우스가 묻자, 포카스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헤라클리우스와 포카스의 대화-


유능했지만 지나치게 검소했던, 그래서 백성과 군대의 인기를 잃고 쿠데타로 죽게 된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인물은 
일개 백인장에 불과했던 포카스였다. 포카스는 그 스스로가 찬탈자였기 때문인지 의심이 많아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나르세스라는 제국 최고의 명장(울던 페르시아 아기도 그 이름을 듣고 울음을 그쳤었다고 전해진다.)을 의심하고 있었다.

당시 사산 페르시아의 왕중왕이었던 호스로 2세는 쿠데타로 쫓겨났을때 비잔티움 제국에 망명했고,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도움을 받아 
복위할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복수를 선언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비잔티움을 침공했다. 
이를 막아낼 인물은 나르세스뿐이었지만, 그는 포카스 황제를 믿지 않아 호스로 2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포카스 황제는 전병력을 긁어모아 이에 맞섰지만, 패배했고 나르세스에게 신변의 보장을 약속하며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만약 이때 황제가 신의를 지켰다면 나르세스는 다시 제국의 편에서 페르시아를 막아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황제는 협상장소에 나르세스가 
오자마자 그를 사로잡아 화형시켜 버렸다. 그밖에 유능한 장수는 2명이 있었으나 한명은 전사했고, 
다른 하나는 포카스 황제가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감옥에 갇혀있던 신세였다.


거기다 포카스 황제는 그 와중에 유대교를 탄압하고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 하는 뻘짓을 저질렀고, 유대세력은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에선 쿠데타가 빈발했다. 아바르족은 당시 비잔티움과 평화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리되자 
발칸 반도로 처들어왔고, 슬라브족 역시 비잔티움과 전쟁을 시작했다. 제국은 이제 멸망위기가 닥쳐온 것으로 보였다.


그때 헤라클리우스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카르타고 총독의 아들이었는데, 별다른 저항없이 포카스를 처형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이전까지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 제위에 올랐던 황제는 없었다. 
서쪽에서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이 발칸반도를 약탈했고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가 아시아 속주를 병합하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가 황제가 된 다음해, 비잔티움은 샤흐르바라즈에게 안티오크를 잃었다. 
2년 뒤엔 다마스쿠스를, 그 이듬해엔 성지 예루살렘마저 함락되었고, 
제국 최고의 성물이었던 참십자가(예수가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십자가.)마저 잃어버렸다. 
3년 뒤, 제국의 곡창이었던 이집트가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하자 비잔티움 전역엔 기근과 역병이 돌았다. 
황제는 성급하게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12년 동안이나 기다리며
군제를 개혁하고 행정기관을 개편했다. 그리고 꾸준히 병력을 긁어모으고 훈련시켰다.

그럼에도 희망이 없어보이자, 황제는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엎드려 탄원하자 굴복하여 이를 철회하였다. 그는 소피아 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소피아 성당의 금까지 벗겨가며 전쟁을 준비했고, 아바르와 화친을 맺었다. 
할수있는 모든 준비를 했다고 여긴 그는 드디어 성전을 선포한다.

2.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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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의 원정경로


"저 황제를 보아라! 마치 쇠로 된 모루처럼 화살과 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샤흐르바라즈-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는 제대로 된 전쟁을 겪은 지휘관들은 한명도 없었다.(이전 세대의 장수들은 포카스가 모조리 처형했다.) 
반면 페르시아는 '멧돼지' 샤흐르바라즈를 필두로 샤힌, 사라블라가스, 라자테스와 같은 많은 장수들이 있었고, 
왕중왕 호스로 2세 스스로도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병력도 불리했기때문에 희망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뛰어난 장군임을 증명하였다. 카파도키아 고원에서 그는 샤흐르바라즈를 일방적으로 패배시켰다. 
1년 뒤, 그는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간자크로 진군했다. 호스로는 약 4만명의 수비병력이면 충분히 막아낼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패배하여 니네베로 도망치고 말았다. 훈족을 회유하여 병력을 늘린 황제는 
아르메니아에서 다시 샤흐르바라즈, 사라블라가스와 샤힌의 연합군을 격파했으며, 여기서 사라블라가스는 전사했다. 
샤흐르바라즈는 매복하여 황제의 군대를 함정에 빠뜨렸으나, 황제는 선두로 나서 사기를 높여 이것마저 격퇴하였다.


그러나 제국의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때 아바르족은 평화협정을 깨고 페르시아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훈족, 슬라브족등이 포함된 8만명의 연합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고 있었다. 거기다 샤힌이 또다시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황제와 싸우러 다가오고 있었고, 페르시아의 수군 역시 샤흐르바라즈의 지휘 아래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고 있었다.

3.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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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참십자가와 함께 입성하는 헤라클리우스


"하느님 품 안에서 즐거워하라."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는 도박을 행했다. 1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보내고, 2군은 동생 테오도루스의 휘하에서 샤한과 맞붙게 하고 
가장 규모가 작은 3군은 자신의 지휘하에 페르시아로 진격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3곳 모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의 수군은 제국 함대에 의해 전멸했고, 8만에 달하는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킬 능력이 없었으므로
페르시아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해버렸다. 테오도루스 역시 메소포타미아에서 샤힌을 격파했다.
페르시아군은 라자테스의 지휘하에 니네베에서 황제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된다. 
전투중에 라자테스는 황제에게 일기토를 벌이자고 제안하여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으나, 
황제는 말을 달려 라자테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그렇게 전투의 승패는 결정되어 버렸다.

호스로는 다스타기르드의 왕궁에서 몰래 빠져나와 24년 동안 살았었던 고대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도망쳤는데, 
이 도시로 돌아오는 자는 반드시 몰락하리라는 마기의 불길한 예언이 서린 도시였다. 
결국 페르시아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호스로는 그의 아들 카바드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카바드, 아니 이제 카바드 2세가 된 그는 제국의 노예를 자칭하며 화친을 구걸했다.

페르시아는 그동안 정복한 모든 영토와 모든 로마인 포로를 반환했고, 참십자가를 비롯한 성물들을 돌려주었다. 
드디어 전쟁은 끝났고, 원로원은 황제에게 스키피오라는 명예로운 직함을 수여하기로 결의하였다. 
사람들은 신의 적들은 모두 사라졌으며 새로운 황금 시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4. 이슬람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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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TV 시리즈 오마르에 등장한 할리드


"그대는 성공했으며, 그 어떤자도 그대가 한 것처럼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알라께서 행하신 일이다."

-우마르, 할리드에게-


그러나 633년, 이슬람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자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알라의 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지휘 아래 사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아랍기독교 세력과 동시에 전쟁을 시작하였다. 
황제가 사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진격은 멈출줄을 몰랐다. 
3년만에 제국은 다마스쿠스를 잃었고, 5년 뒤에는 예루살렘, 6년 뒤에는 시리아가 제국의 속주에서 사라졌다. 
이집트마저 함락되었고, 제국은 동방영토를 모조리 잃어버렸다.

황제가 늙어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다곤 하나, 할리드를 상대로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불운한 일이었다. 
거기다 신학논쟁에 휩싸여 제국의 분열이 동시에 일어났고, 황제는 병에 걸려 오늘 내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641년, 그는 백성들의 조소와 아들의 외면속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황제는 제국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황제는 몇번의 패전 이후 방어적 전략을 통해 영토를 내주더라도 군대는 보존하도록 했다.
덕택에 그토록 많이 패전했음에도 제국의 다섯 야전군은 고스란히 유지되었고, 
사산 페르시아와 달리 800년을 더 존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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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비잔티움 연대기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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