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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프랑스 병사들은 탄약통에 원수봉을 넣고 다닌다.
게시물ID : history_168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ble6
추천 : 12
조회수 : 2008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4/07/04 11:32:47
현대 민주사회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바로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누구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요. 각자의 노력 투입 여하와 환경 여건이 작용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구 시대보다 나은 점이라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성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일겁니다. 구 시대 계급사회에서는 꿈도 못꿀 일이지요. 물론 구 시대 사회에서도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성공하는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에게 다 열려있던 사회는 아니었으니까요.
 
프랑스 혁명이 있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의 전반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직위는 귀족 계층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군대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능력이 있든 없든지 간에 귀족들은 군대에서 가장 높은 계급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평민들은 일반 병사나 부사관으로나마 시작할 뿐 고위계급은 꿈도 못꾸었습니다. 능력이 얼마든지 되었든 간에요.
 
영국 귀족들만 하더라도 능력에 관계없이 집안 배경 혹은 돈을 주고 계급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며(물론 이는 개혁 전 육군 한정이었습니다. 해군은 철두철미하게 능력위주였지요.), 러시아 귀족들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군적에 등재하여 성인이 될때까지 자동적으로 계급이 올라가게 하여 위관급 계급을 다는 일이 많았습니다. 프로이센 귀족들은 그 자체가 군사 문화가 강한 사회인지라 모든 귀족들이 군인의 의무를 짊어졌으며 때문에 프로이센에서 군인 하면 프로이센 귀족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풍조는 제 2차 세계대전때까지 이어집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롬멜 장군 같은 경우 프로이센 귀족 계급이 아닌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던지라 장군이 될 당시만 하더라도 귀족 계급의 군인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롬멜 장군 역시 그런 귀족 계급들의 보이지 않는 벽과 거부감을 느꼈고요. 히틀러 역시 군인들을 믿지 못한 게 이 고집센 프로이센 귀족 출신 군인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보이지 않는 경멸을 느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귀족계급이라고 해서 다 무능한것은 아닙니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름을 떨친 군인들 상당수가 이러한 귀족계급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들만의 리그를 형성하여 폐쇄적이고 개혁을 거부하여 무능하고 정체된 집단이 되어 썩게 된다는 것이지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대육군, 그랑드 아르메는 나폴레옹과 함께 전성기와 몰락을 겪었습니다. 이 그랑드 아르메가 승승장구하여 유럽을 재패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천재적인 전략도 있겠지만, 그 전략을 뒷받침 시켜줄 수 있었던 다양한 인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다양한 인재들은 귀족 계급 한정이 아닌, 여러 계층에서 나왔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 휘하 장군들은 그 배경이 다양했습니다.
 
 
 
300px-Murat2.jpg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전투에서 이집트 군 진영을 기병돌격으로 한바탕 휘젓고 이집트 군 지휘관의 막사까지 들이치는 용맹성을 보여준 뮈라. 그는 이때 턱에 총을 맞는 부상을 당하나 회복하고 나서 병신같지만 멋진 말을 합니다. "파리의 여성들이여, 안심하라! 다행히도 내 (섹시한)입술은 무사하다!".... 뮈라가 여자를 좀 많이 밝히긴 했거든요....)
 
나폴레옹이 가장 신임했던 기병원수 뮈라, 그는 사실 군사적인 지략은 매우 떨어집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 자신도 뮈라를 평가하기를, 뮈라는 작전지도조차 읽지 못한다고 툴툴댑니다. 거기에다 한술 더 떠서 뮈라는 자신이 직접 말하기를, 내게 군사전략까지 요구한다는 것은 사치이다! 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하지만 그 누구도 못따라갈 과감함과 결단력을 갖추었으며 언제 기병돌격이 적기인지를 잘 파악해내는 직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말 짐승같은 직감이라고 밖에 할수 없을 정도였지요. 이집트 원정 당시 아부키르 전투에서, 그리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대규모 기병돌격을 이끌었던 이 뮈라는 용맹과 결단력과 함께 시기 적절한 기병 돌격 타이밍이 언제인지를 잡아채서 돌격하는 직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뮈라는 귀족계급이 아닌 평범한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기병대원으로 복무하던 중,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기와 나폴레옹과의 인연을 통해 출세가도를 거침없이 달립니다. 물론 그의 천부적인 기병 지휘관으로써의 재능도 한몫하구요. 다만 그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시기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범한 기병 하사관으로 떠돌다 어디 전장에서 전사하던가, 은퇴하여 부상으로 잔병치레하다 죽었을 겁니다.
 
물론 후일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살다가 결국에는 총살당하지만요. (이때도 상남자 답게 "내 얼굴이 아닌 심장을 쏘라!"고 외친 뒤 아내의 초상화에 입을 맞추고 당당히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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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란 원수. 나폴레옹의 몇 안되는 친우이자 공석이든 사석이든 간에 나폴레옹에게 야야, 너말야 너!! 이렇게 막말을 할 수 있었던 상남자.....즉 황제 폐하에게 존칭안하고, 막 너 임마!거리며 막대한 용자 중의 용자...(물론 나폴레옹은 란 원수와 매우 친했기에 그가 이리 대해도 서로 낄낄대며 대화했다고 합니다.)
 
란 원수 역시 농부의 아들이었으며, 병사로 시작하여 원수로 출세한 군인이었습니다. 군사적인 지략도 뛰어났거니와 특히 그 용맹함과 과감함은 나폴레옹 휘하 어느 원수들도 따라가지 못할만큼 대단했습니다. 1809년 4월 23일 2차 오스트리아 전쟁 중 벌어진 레겐스부르크 전투에서 그는 이 용맹성과 과감함에 걸맞게 정말 전설적인 일화를 넘깁니다.
 
적군 방어선에 막혀 공격이 연거푸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따라 휘하 병사들이 재차 공격을 머뭇거리게 되자 란 원수는 직접 사다리를 들고 ""이 몸도 원수이기 전에는 척탄병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라고 외친 뒤 정말로 원수의 신분으로 직접 사다리를 들고 돌진해 성벽을 타올랐습니다. 이를 본 병사들은 사기 버프를 받고 란 원수의 뒤를 따라 돌격하여 적군 방어선을 돌파, 성을 점령하게 되지요.
 
후일 아스페른 에슬링 전투에서 대포탄에 중상을 입고 결국에 숨을 거둡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죽음에 대성통곡을 할정도로 크게 슬퍼합니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명장을 잃은 것과 동시에 친우를 잃은 것이었거든요.
 
'난장이인줄 알았으나 거인이었다.' 라고 나폴레옹이 평할 정도로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 중 최고 명장이었던 장 란 원수.
 
그 외에도 니콜라 술트 원수 역시 서기의 아들로 태어나 이등병으로 군인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쥬르당 원수 또한 비단장사를 하다가 군생활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뒤마의 아버지 역시 일개 기병 하사관에서 시작하여 장군이 된 군인이었습니다. 뒤마 장군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져 있을 정도였지요.
 
수많은 프랑스의 장군과 원수들이 귀족이 아닌 평범한 혹은 미천한 계급 출신으로서 장교가 아닌 병사부터 시작하여 고위 계급에 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랑스 군은 능력만 보인다면 그 출신 성분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기용하여 그 재능을 활용하였던 것이지요.
 
때문에 제목과 같이 "프랑스 병사들은 탄약통에 원수봉을 넣고 다닌다."라고 말이 떠돌만큼 프랑스 병사들은 누구든지 출세의 기회가 열려있었고, 다양한 인재들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유럽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라면 감히 상상할수 없지만요.
 
현대 사회는 능력 위주의 사회라지만 요새는 그 능력 위주라는게 많이 호도되어 판단되고 또한 또다른 형태의 계급 성립과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만들어내어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이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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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역사를 취미로 보는 아마추어의 아마추어적인 역사 이야기입니다. 언제든지 리플로 모두들 다양하게 의견과 사실들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번 댓글에서 보았듯이 아무래도 그랑 다르메라는 명칭보다는 그랑드 아르메라고 하는게 좀 더 적절해보이는 것 같아서 다시 고쳐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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