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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남조 송나라 시절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68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9
조회수 : 6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7/05 10:58:10
송을 건국한 유유가 재위 2년만에 죽고, 그가 죽고 2년 뒤에 아들인 유의륭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훗날 문제(文帝 : 재위 424-453)라고 불렸으며 그의 치세는 당대의 연호인 원가를 따서 <원가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평온한 시대였습니다. 문제는 시호에서도 나타났듯이 문치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송문제 연간 동안 송의 정치는 왕홍, 왕화, 왕담수, 은경인 등 고위귀족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귀족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체제가 점차 정비되었습니다. 귀족계급인 사(士)와 평민 사이의 신분적 구별은 황제의 힘으로도 바꿀 수 없게될 정도였습니다. 아래의 이야기는 이것의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당시 문제가 총애하는 사람들 중에 서기가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신분은 귀족이 아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발판으로 귀족에 편입하려고 했습니다. 서기는 황제에게 이를 말하였고, 황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의 신분에 들어가고 싶으면, 귀족인 왕구에게 가서 부탁하거라, 그가 너의 청을 받아준다면 확실할 게야. 그에게 가거든 내가 말했다고 하고 자리에 앉으면 된다."



황제의 말에 그는 왕구의 집으로 가 왕구에게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구는 부채를 부치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봐, 자네. 그것은 아니되네."



그는 그대로 황제에게 돌아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네."



이렇듯 원가의 치 연간은 동진 시절의 귀족들의 영광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귀족들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433년 문제 치세 10년째에 일대를 풍미하던 시인인 사령운이 송왕조를 폭정으로 악명 높은 진(秦)에 비유하는 등 송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고 하여 반역의 죄목으로 광동의 번화가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사령운은 보통 귀족도 아니었고, 동진 시절부터 이어지는 최고의 귀족가문인 사씨 일족의 한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송왕조 이래로 귀족들은 군부의 실권을 잡을 수 없었고, 귀족들에게 한문(寒門)이라고 불리며 업신여겨 온 자들이 황제나 황족들의 신임을 받아 크게 성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전 왕조인 동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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