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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번지의 비밀 - 1부[BGM]
게시물ID :
panic_16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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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동물의피
★
추천 :
37
조회수 :
747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06/30 13:20:00
총 11부작 장편을 2편으로 압축해서 올렸습니다 길지만 몰입도가 상당합니다 이 글로 잠시나마 식곤증을 달래셨으면 합니다(__) 이 이야기는 현직 경찰인 지인으로부터 들은 일화를 소설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등장 인물은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신고한 사람이 누굽니까?" 나의 물음에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넋을 잃은 채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나를 천천히 올려다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느낌으로 보아 사망자의 아내가 틀림없어 보였다. 헝클어진 퍼머머리와 흘러내린 눈물의 경로를 그려내고 있는 아이라인 줄기가 그녀의 심적 충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격이 크시겠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녀는 나에게 응시했던 시선을 풀더니 이내 멍하니 어딘가를 또다시 주시했다. "힘드시겠지만 수사에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40세의 한 남자가 죽었다. 안방에서 장롱에 몸을 등지고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죽었다. 방바닥에는 무려 17개의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고, 두어병은 채 비우지 못한 상태로 투명한 내용물을 밖에 쏟아내고 있었다. 현장조사가 한창이라 좁은 방안이 요란하고 시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사망자의 아내를 부축하고 집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주변 공원의 한적한 벤치로 인도하여 그녀가 깊은 숨을 몰아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불편하시면 오늘 말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초동수사가 가장 중요한거라서...." "네, 뭐든 물어보세요." 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수사관의 본능처럼 펜과 수첩을 꺼내 바로 심문에 들어갔다. "남편의 사망 당시 같이 계셨습니까?" "아니오." "그럼 어디 계셨습니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어요." "그럼 마트에 가기 전에 남편을 보셨겠군요." "아뇨. 그 때까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발견 당시 남편 혼자 있었나요?" "네." "죽은 줄 어떻게 알았나요?"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고, 남편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장롱에 기대 앉아 있더라구요. 죽은 것 같았는데...혹시나 해서 팔과 얼굴에 손을 갖다대었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거예요. 입술은 이미 파랗게 변해있구요.." 바로 몇 십분 전의 기억이 생생한지 그녀는 잠시 양손으로 두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런데 119가 아닌 경찰에 바로 신고하셨더군요." "그냥 무서웠어요. 널부러져 있는 그 많은 소주병을 보니까 더 무서웠어요. 평소의 남편 같지가 않았어요." 두려움이 몰려오는지 그녀의 음성이 다소 높아졌다. "인기척이나 낯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던가요?" "없었어요." "혹시...원한을 살 만한 주변 사람들이 있나요?" "그건 잘 몰라요. 워낙 바깥일 때문에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편이라...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몰라요" 질답이 오가는 동안 그녀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그럼 마트에 얼마 동안 계셨나요?" "네 시간 정도 있었어요."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옆집 새댁이 마트에서 내내 같이 있었어요. 물어보면 알겁니다." "음...네시간이라.....네시간 동안 소주 17병을 마신다는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묻는거죠?" "아..아닙니다. 그냥 의문이 드는 것들은 통상적인 수사관례상 물어보는게 저희들의 규칙입니다." 알리바이에 대한 추궁은 계속되었지만 나의 직감은 이미 그녀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남편 분의 직업이 뭡니까?" "포크레인 기삽니다." "외근이 잦겠네요." "네." "남편분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잘 몰라요. 제가 술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연애 때도 같이 술을 한 적이 거의 없어요." "최근에 남편분을 본게 언젭니까?" "그저께였어요." "혹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습니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던가..아니면 이상한 말을 한다던가..." 나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갑자기 시선을 돌려 나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생각나요!!" 그녀의 급박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순간 긴장감이 몰려왔다. "어떤 것 말입니까?" "들어오자마자 뭔가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채 피곤하다며 잠이 드는 겁니다." "......." "평소엔 집에만 들어오면 이곳 저곳 친구들 전화해서 불러내기 바쁜 사람이예요. 당구가 되었든, 술이 되었든 친구들 불러내서 노는 것 좋아아는 사람인데 그 날은 그냥 그렇게 잠이 드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 다시 나갔나요?" "잠이 든지 서너시간이 지나자 야간작업이 있다며 다시 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나가면서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무슨 말 말입니까?" "주연이를 봤다는거예요." "주연이요?" "5년 전 사고로 죽은 저희 딸이예요." 예전의 악몽같은 기억까지 떠오르는지 그녀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흐흐흑!!" 나는 잠시 심문을 멈추고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대답은 무슨 대답이요? 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 사람을 쳐다 봤고, 그 사람은 그렇게 더 이상의 아무 말없이 집을 나섰어요." "그리고나서 오늘 사건현장에서 보신 겁니까?" "네....흐흑흑..."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간략히 메모한 후 수첩을 접었다. 사건 현장으로 돌아오자 조금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현장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왜 다들 죽은 사람을 그렇게 보고싶어하는지 사람의 심리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김형사님." 현장 조사 중이던 박형사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과학 수사대 감식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외부 침입흔적도 없고, 독살흔적도 보이지 않고, 외상 흔적도 없고, 저항한 흔적도 없고....... 그냥 알콜수치가 치사량을 넘어서 죽은 것 같은데요?" 나는 잠시 사건현장의 출입문을 응시한고는 입을 열었다. "박형사 너는 사람이 17병의 소주를 먹는다는게 가능하다고 보냐?" "왜 불가능합니까? 어떤 연예인들은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놓고 마신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게 혼자서 가능하다고 보냐고? 그것도 단 서너시간만에...." "그건 그렇지만.....다른 사인이 없잖습니까?" "그리고 지나치게 소주냄새가 많이 나..."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까 박형사 너도 들어갈 때 느꼈잖아. 소주 냄새가 문밖까지 나던거.....먹은 것보다 쏟은게 많을 수도 있어." "그럼 누가 강제로 먹였단 말씀이십니까?" "주변에 토사물도 없고, 너무 깨끗하잖아. 그리고 어떻게 장롱에 기대어 바로 앉은 채 죽을 수가 있지? 너도 취해봐서 알잖아. 조금이라도 정신이 있으면 본능적으로 사람은 눕게 되어있어." "그렇긴 한데....일단 과학수사대 감식결과를 지켜봐야겠군요." "박형사 너는 일단 유족들 만나서 시신을 부검 의뢰할 건지 알아보고, 발인 전까지 주변에 피해자와 금전관계가 있었거나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봐" "네. 알겠습니다." 박형사가 멀어지는 모습을 본 나는 뒤돌아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막 불을 붙이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건 담당 형사님이시죠?" 나는 대답 대신에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치켜 뜨고는 그를 쳐다봤다. "저기.....죽은 친구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용기를 내어 말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이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사건과 아주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천천히 걷어내듯이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네...그런데요?" 그는 계속해서 두 손바닥을 쥐어짜듯 비벼대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친구.........말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계속 나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폈다. 그리고 정면으로 내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아...아닙니다." "뭐가요?" "아녜요." "뭐가 아니란 말입니까? 무슨 말 하려고 했잖아요?" 나는 그에게 추궁을 하며 천천히 그의 어깨에 손을 가까이 했다. 나의 손이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 그는 갑자기 몸을 움찔하더니 미친 듯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야! 거기 서!!" 갑작스런 나의 외침에 주변의 경찰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뭐해 임마!! 당장 저 자식 잡아!!" 그에 못지 않게 나도 이미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수명의 형사와 의경들이 그의 뒤를 좇았지만 다세대 주택단지의 좁은 골목길은 우리의 추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재래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인파로 넘쳐나 그 속으로 묻혀버린다면 사실상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몇 분간을 이리저리 내달리던 나는 추격을 멈추고 허리를 굽인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헉헉...아...그 자식 무지하게 빠르네..헉헉..담배를 끊든가 해야지.." "헉헉...김형사님! 무슨 일입니까? 헉헉!!" 내 목소리를 언제 들었는지 박형사가 내 뒤에 따라 붙어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헉헉...용의자입니까?" "헉헉...됐어. 얼굴도 기억해 뒀고, 피해자와 같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어..헉헉..당장 거기로 가자. 헉헉... 이거 뭔가 있어..." 박형사와 내가 피해자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쯤 이미 너울너울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퇴근 준비가 한창일 것 같은 일반 회사와는 달리 두 개의 콘테이너를 붙여서 만든 조립식 사무실은 아직도 네다섯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운동모자를 성의없게 눌러 쓴 건장한 체격의 30대 중반의 남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경찰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에 모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분주했던 동시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잠시 확인했다. "여기 대표자가 누굽니까?" 나의 물음에 모두가 누군가로 모든 시선을 모았다. 콘테이터 깊숙한 곳에 놓여있는 소파에서 반쯤 머리가 벗겨진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일어섰다. 그는 수차례 돋보기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우리의 얼굴을 확인하는 듯 보였다. "죽은 황승균이란 친구 때문에 오셨는가보네. 내가 여기 사장이오." 그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 뭐 좀 조사할게 있어서요." 나는 열심히 주변을 살피며, 한 시간 전에 보았던 그 낯선 남자를 찾았다.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경상도 억양이 약간 섞인, 지나치게 침착한 그의 말투가 잠시 귀에 거슬렸다. "직원이 죽었는데 회사는 바삐 돌아가네요." "중장비 다루다보면 다치는 사람,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여긴 또 지입차들이 많아서 소속감도 덜하고...." "여기 직원 명부 좀 볼 수 있을까요? 사진있는 걸로." "직원 명부요? 그러시죠." 나는 남자가 꺼내온 묵직한 서류철에서 사진만 확인한 채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누구 찾는 사람 있습니까?" "죽은 황승균씨.. 요 근래에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나는 서류철을 훑어보는 와중에도 관련자 심문을 잊지 않았다. "그 친구야 뭐...일 잘하겠다. 노는 것 좋아하겠다. 이상하게 여길 틈이 없어요." "그 사람 술 좋아합니까?" "좋아하지요.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싫어한다는게 말이 됩니까?" "주량이 얼마나 됩니까?" "뭐더라....전에 보니까....한......세병 정도?" 나는 잠시 서류를 훑어보는 것을 멈추고 사장이란 남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게 마시면 얼마나 취합니까?" "그냥 곤드레 만드레 해가지고는 쓰러져 잠만 잡디다." 나와 박형사의 의심스런 눈빛을 눈치 챘는지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와요? 뭐 잘못 됐습니까? 도대체 그 친구 뭐 때문에 죽은 겁니까?" "술 먹고 죽었어요." 나 대신 박형사가 답을 했다. "뭐요? 술?" 어색하게 놀라는 표정의 사장보다는 그의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다른 이들이 눈에 거슬렸다. 뭔가 서로 간에 대화를 주고 받고 싶은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피해자에게 요 근래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습니까?" "없었다니깐 참 내...." 나는 다시 한번 사장의 등 뒤에서 조심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을 잠시 살핀 후 다시 서류철을 훑어보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내가 원하던 얼굴이 서류철 중간 쯤에서 나왔다. "이 사람 어딨어요?" 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자 사장은 안경을 잠시 매만지며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입을 열었다. "노영주씨네. 이 친구 오늘 출근 안했는데..."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게차 차주인데, 지입차량이라 일거리가 없으면 안나와요. 지금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르지요. 그냥 거기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보시던가....." "사장님 핸드폰 좀 빌려주겠어요?" "내...내것 말이요? 왜요?" 나의 요청에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타살일지도 모르는 사건 수사중입니다. 협조해 주시죠." "타...타살이요? 그런데 핸드폰은 왜요?" 미적대며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자 나는 잽싸게 그것을 낚아챘다. 어색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우리에게 향한 시선을 쫓아냈다. "뭣들 하십니까? 신경쓰지 말고 일들 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은 나중에 부를 테니까요." 그 곱지 않던 시선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그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십여차례 벨소리가 울리고 난 다음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침묵으로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네..사장님...딸꾹..." 전화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흥건히 술에 젖어 있었다. "사장님....딸꾹..이젠 무서워서 못살겠슴더..." 다소 충격적인 그의 말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통화내용이 사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자리를 떴다. "듣고 있슴니껴." 나는 혹시나 그가 눈치 챌까봐 작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응." "황승균이...그 놈아가 미친 것 맞지예?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거지예?" "으...응" 그런데 그의 귀는 아직 술에 절은 것 같지가 않았다. 갑자기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목소리가 와그럽니까? 누....누꼬? 사장님 아닝교?" "............." "너..누구야!!" 어쩔 수 없이 나는 신분을 밝혔다. "경찰입니다." 나의 한마디에 그가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덜그럭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신호가 끊어졌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을 사장에게 건내고는 입을 열었다. "사장님. 우리하고 할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사장의 눈빛이 매우 공격적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아챘다. 게다가 각자 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부들이 박형사와 나를 둘러싼 채 어떤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서 있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눈빛을 보내던 사장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형사님들이 범인 잡는다니 도와드려야지요." "지금 하실 얘기 없습니까?" "없소이다." "이곳엔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시오? 그럼 찾아 보구랴" "나중에 다시 찾아뵙지요. 그 때는 오늘보다 좀 오래 머물러 있을 것 같습니다." "훗....얼마든지 그러시지요. 형사님" 그들의 기분 나쁜 시선을 뒤로한 채 우리는 발걸음을 차량으로 옮겼다. 안달이 났는지 박형사가 걸음을 재촉하는 내 옆에 붙어 나를 닦달했다. "김형사님. 저 콘테이너 뒤져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사람들 좀 수상해요" "수색영장도 없이 뭐하게? 저래뵈도 엄연한 하나의 회사인데." "지금 어디 가시게요?" "그 노영주라는 사람 집으로 가는거야." "그 사이에 서류철에서 주소지 외우셨어요?" "날 뭘로 보는거야?" "하여튼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두번째 사건을 접한 건 노영주라는 사람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던 중이었다. 박형사의 휴대폰이 다급하게 울렸다. "뭐라고? 사람이 죽었다고?" 나의 눈빛을 확인한 박형사는 급히 차를 돌렸다. 시체는 콘크리트로 만든 2미터 정도의 너비의 농업용 수로 가운에 엎어져 있었다. 물은 거의 매말라 발목 정도만 차올랐고, 다소 어둠이 몰려와 어둑어둑했지만 대략 보이것만으로도 시체는 매우 개끗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둠이 몰려오는 이 시간에 인적이 드믄 농업용 수로에 사람이 빠져 죽는 경우는 대부분 사체유기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감식반을 불렀다. "신고자가 누구야?" "논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농부였습니다." "사인은?" "익사 같습니다." "뭐? 익사? 아니 물도 없는데 뭔 익사?" "그게 참....재수가 없으려면 접싯물에 코박고도 죽는다는 말이 딱 지금 상황입니다." "그럼..뭐야? 저 친구가 지금 발목도 안차는 물에 코박고 죽었단 말야?" "수로 벽에 약간의 혈흔이 있는 걸로 봐서 수로에 빠지면서 수로벽에 머리를 부딫힌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음 얼굴을 옆으로 하고 엎어졌는데 한쪽 코에 계속해서 물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인은 내일이나 나올 것 같은데, 현재로서 직접적인 사인은 익사로 보입니다." "다른 데서 죽고 유기된 건 아니고?" "술냄새가 많이 나고, 머리에 작은 타박상이 있는 것 외에 특별한 외상이 없습니다." 나는 엎어져 죽어있는 시체에 다가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조심스레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이게 누구야?" 나의 놀라는 목소리에 박형사가 다가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박형사에게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노영주란 사람 만나러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나의 말뜻을 알아챈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 무지하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내일 오전에 그 회사에 다시 가봐야 겠다." "경찰서로 불러내죠." "경찰서로 불러낸다고 주눅들 사람이 아닌 것 같더라.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들 구역에 있어야 이말 저말 다 꺼내 놓는다." 나는 다시 한번 죽은 노영주를 쳐다보았다. "망자는 말이 없다 했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지?"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나는 경찰서로 나섰다. 여기에 온 지 1년 간은 이런 강력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바빠진 듯 했다. "김형사님...." 형사계로 들어서자 나보다 먼저 나온 박형사가 말을 걸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 "어제 밤 감식반에서 넘어온 황승균씨 유품 중에 놀라운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 "보세요." 박형사는 나에게 4분의 1로 접어진 A4용지를 하나 들이밀었다. 그 용지를 펼쳐보았을 때 박형사 말대로 이것이 아주 놀라운 유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굿잡~~~~" 나의 탄성과 함께 요란하게 사무실 전화벨이 울렸다. 박형사가 받아들었다. "네. OO서 강력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잠시 통화를 하던 박형사가 이내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다. "황승균씨 와이프라는데요?" "그래?" 나는 급하게 수화기를 받아들었다. "예. 사모님. 전화 바꿨습니다." "밤 사이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예? 도둑이요?" "네. 장례식장에 밤새 있다가 아침에 들어왔는데...집이 어지럽혀져 있어요" "없어진 물품이 있나요?" "거의 다 그대로 있는데, 남편 옷장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있어요." "흠....그래요? 범인이 누군지 알겠군요." "예? 범인을 아신다구요?" "확실하진 않지만....일단 사건접수는 해 놓겠습니다. 당분간 몸조심하시구요. 되도록 집에 혼자 있지 마세요." "네...알겠습니다. 형사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입술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의외로 사건이 빨리 풀리겠는걸? 야..박형사 지금 당장 이 자식 잡아 와!!" "네." "김태섭씨....나 본 적 있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중장비 사무실에 들렀을 때 나를 처음으로 맞이했던 성의없이 모자를 눌러 쓴 그 친구였다. 취조실이란 곳을 처음 왔는지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네...." 나는 그의 신상명세서를 한 장씩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보기보다 젊네. 이제 서른 둘이네." "..........." "너 어제..밤 황승균씨 집에 왜 갔어?" "예? 무..무슨 말입니까?" 그의 놀라는 모습은 전혀 진실성이 없었다. 나는 탁자를 손으로 치며 그를 다그쳤다. "다 알고 있어!! 너 어제 이거 찾으러 간 것 아냐?" 난 그 앞에 접힌 자국이 선명한 A4용지를 꺼내 들었다. 그 용지를 보는 순간 그는 모자를 눌러 쓴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을 내뱉았다. "아....씨발...미치겠네.." 나는 잠시 그가 진정을 되찾기를 기다렸다. "노영주 죽은 거 알지?" "예? 그 사람이 죽었어요?" "어젯밤 농업용 수로에 빠져 죽었어." "누...누가 죽였어요?" "나도 모르니까...지금 심문하고 있는 것 아냐?" "그...그럼 제가 죽였다고 생각하시는거예요 지금?" "그럼 이 상황에 너 말고 누가 있냐?" "아...진짜.. 난 아니라니까" 나는 잠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미소를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번 이 용지에 있는 내용을 읽어주지... 차용증...본인 깁태섭은 6월 16일자로 일금 천만원을 황승균으로부터 차용한다. 상환일자는 10월 16일이며, 매월 이자는 원금의 5부로 하며 원금 상환시 납부한다. 차용인 김태섭, 보증인 노영주.....도장 쾅. 지문 쾅!!" 내용을 읽는 동안 그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노래를 부르듯 말을 내뱉으며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제 너는 좆된거라네~~~~ 지금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라네~~~ 황승균이는 그렇다치고, 니 보증 서준 노영주는 왜 죽인거야?" "아...씨발 진짜!! 노영주는 안 죽였다니까요." "그럼, 황승균이만 죽인거야?" "둘 다 안죽였다니까요!!!" 그의 말과 표정에서 왠지 모를 진실성이 묻어 나왔다. 황승균이는 타살 가능성이 있어보였지만 노영주는 사고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유도심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대로 물러서면 황승균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다. "너, 이 사건에 더 엮이기 전에 니가 알고 있는 것 다 불어. 안 그러면 너만 피보게 된다." 그는 잠시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씨발....그 때 그 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뭔가를 말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나는 그에게 담배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담배 피우냐?" 그는 말없이 조용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길게 연기 한모금을 빨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달전이었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죠. 비가 오니까 모든 야근 계획이 취소가 된 겁니다. 우린 밤에 사무실에 모여 여섯명이서 포커판을 벌였죠. 나, 승균이 형님, 영주 형님, 그리고 다른 기사 세 명하구요. 보통 일주일에 한번은 포커를 했는데, 그 날은 월급날을 며칠 앞 둔 날이라 금액이 조금 컸어요. 시작한 시간이 9시 정도였죠. 그런데 11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승균이 형님이 먼저 돈이 떨어진 거예요. 보통의 경우 돈이 떨어지면 집에 가는데 그 날은 그 형님이 너무 일찍 돈이 바닥난 겁니다. 형님이 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노름판에서 무슨 소리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 형님이 이 차용증을 내밀며 호통을 치는 거예요. 사실 그 차용증에 적힌 금액은 한 번에 빌린게 아니라 세 차례 빌렸다가 제가 자꾸 갚는 걸 미루니까 쓰게 된 거예요. 친구처럼 지내는 영주 형님이 보증을 서 준거구요." "그 돈... 노름돈으로 빌린거지? "빌린 건 빌린거고, 판돈은 판돈인데...차용증을 내밀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윽박을 지르는까 엄청 기분이 언짢더라구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서로 형동생 하며 지냈었는데 안면 몰수하고 갑자기 형님이 그러니까 너무 서운하기도 하고. 그 때 갑자기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는 잠시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았다. "사무실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산 중턱에 폐가가 하나 있어요. 한 때 잘 나가던 식당이라고 하던데, 20년 전에 그 집 주인이 죽고나서 다 떠나고 방치된 집이래요. 게다가 고가도로가 마을 앞에 들어서면서 그 자리엔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더군요. 그거 있잖아요. 작은 도로만 있을 때는 지나가는 도시 사람들이 들러서 밥도 먹고 가고 작물도 사주고 하는데, 큰 도로가.. 그것도 고가도로가 나니까 사람들이 들리지 않는거 말이예요. 지금 그 집은 흉가로 유명해요. 귀신이 나타난데요. 야근 중에 그 곳을 지나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몇몇 작업자들도 텅 빈 그 집에 사람이 서 있는 걸 목격했다고 합니다. 저 또한 사람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한 두번 목격했었구요. 우리 작업자들 사이에서는 공포의 장소였어요. 낮에 지나가면 멀리서 모두 깨진 창문 사이로 그 집 거실이 보입니다. 그 거실에는 누군지 모르는 영정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게 보이거든요? 불현 듯 포커판이 벌어졌던 그날 밤...... 그 사진이 떠올랐습니다. 전 형님한테 제안했죠. 지금..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이 자리에서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 시간이 밤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그 날은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전 형님이 갈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지.. 가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놀려줄 생각이었죠. 그 때 그 형님이 술이 약간 취해 있었어요. 원래 술이 좀 약하거든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형님이 가겠다는거예요." "그래서 황승균이가 갔어?" "형님이 우비를 뒤집어 쓰더니 터벅터벅 걸어나가는거예요. 우리는 사무실 창으로 형님이 흉가쪽으로 걸어가는 걸 계속 지켜봤죠.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에 우린 아무도 말리지 않았죠. 형님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죠. 10분...20분...30분.... 벌써 왕복 두 번은 했을 시간인데 안오는 겁니다. 우리는 형님이 흉가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거라고 확신했죠. 그리고 미친 듯이 도망나올거라고 했죠. 그런데....우리의 예상은 하나도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포커를 치면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40분을 넘기자 슬슬 걱정이 되었죠. 어떤 사람은 집에 도망쳤을거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흉가 앞에서 기절해 있을거라 하고, 아니면 근처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을거라 하고.... 그런데 저희를 더 걱정스럽게 만든 건 형님이 전화를 놓고 갔다는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장대비도 거기에 한 몫했죠. 혹시나 발을 헛디뎌 어디선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그 흉가에 가보자는 사람은 없었어요. 솔직히 무서웠죠. 다 들 무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혹시나 누가 가보자는 말을 할까봐 두려워하며 눈치만 보기에 급급했죠. 그런데 그 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덜커덕 열리는 겁니다. 형님이 문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우와..........그 땐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죠." 그는 잠시 떨리는 손으로 담뱃재를 털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무섭던지....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쫘악 돋습니다. 그거 있잖아요. 스릴러영화 보면 범인이 빗속에서 사람 파묻고 돌아올 때 그 모습.....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우비 속으로 형님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겁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진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형님을 바라보았죠. 바로 그 때 형님이 우비 속에 감춰진 뭔가를 우리 앞에 탁 던져 놓는 겁니다. 그 영정사진이었죠.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아니 그것보다는 승균이 형님이 미친 것 같았어요. 미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영주 형님은 비명까지 질렀다니까요. 놀랄만도 했죠. 우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앉은 자세를 유지한 채 사진으로부터 재빨리 물러났습니다. 영정사진의 얼굴은 확인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우비를 벗을 생각도 안하고 형님이 사무실 안으로 발을 옮기는 겁니다. 그리곤 저에게 다가와 약속한 돈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줬어?" "형사님이라면 안주고 배기겠어요? 저는 얼만지도 모르는 제 앞에 놓인 만원권을 쓸어담아 형님한테 냉큼 건넸죠. 형님은 여기저기 돈을 우겨넣더니 다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거예요. 더 웃긴건 뭔지 아세요? 형님이 그 영정사진을 다시 들고 나가는 겁니다. 그 형님이 어디로 가려는지 아무도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단지 그 사무실에서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랬던 거죠. 형님이 나가자 저희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기 시작했어요. 포커판은 이미 끝난거나 마찬가지였구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승균이 형님이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수근거렸죠." "양승균......딴 사진으로 사기친 것 아냐?" "그 생각도 해 봤죠.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폐가를 지나가는데 그 사진이 안보이는거예요. 형님이 가져온 게 분명했어요. 사기를 쳤다 하더라도 그 때 그 형님 얼굴빛을 본 사람은 저와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죽은 것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거야?" 나는 애써 그의 얘기를 무시하려 했지만 나도 이미 그 것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형님이 조금씩 이상해졌어요. 며칠동안은 모든 작업이나 회사일은 정상적으로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날이 갈 수록 형님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게 조금씩 보이더라구요. 일단 술이 늘었어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 세병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부터인가 일곱여덟병을 나발 분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이상한건 그러고도 정신이 멀쩡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 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모두들 형님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심지어 눈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했죠. 그 즈음에 사람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승균이 형님이 귀신을 불러낸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뭐라고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살인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형사가 귀신 얘기나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얘기를 중지시킬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님이 죽은 딸내미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순간 피해자의 아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주연이라는 딸 애?" "예. 딸내미를 만났다는 거예요. 모두들 승균이 형님이 이젠 정상상태가 아님을 직감했죠. 다들 그 형님이 미쳤을거라 얘기했지만, 속으로 혹시나 진짜로 귀신을 불러내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하고 있었죠. 생각해 보세요. 그 폐가를 들락거리면서 사무실에 들어올텐데... 그것도 순간의 실수만으로도 큰 사고로 이어지는 중장비를 다루는 회사인데, 귀신이 몸에 붙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죠. 그런데 그 때 영주 형님이 뭔가 제안을 하나 했죠." "...?" "그 집....폐가를 부수자는거예요. 벽돌집이라 부수는건 눈깜짝할 사이예요. 그런 구조의 집은 포크레인으로 슬쩍 밀기만 해도 넘어가거든요. 처음엔 불태우자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 주변의 눈도 있고... 아무리 버려져 있다해도, 소유자가 누구인지만 모르는 엄연한 사유재산인데....." "그래서 부셨어?" "부수자는데는 모두 동의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있었어요. 그걸 누가 하냐였죠. 눈치만 살피던 저희들은 제비뽑기를 했죠. 그 때 영주 형님이 걸린겁니다." "노영주는 지게차 기사 아냐?" "면허증 없으면 운전 못하나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분야가 아니어도 중장비의 간단한 조작은 다 할 줄 알거든요. 승균이 형님이 비번인 날을 골라서 영주 형님이 회사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로 갔죠. 모두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마냥 포크레인 뒤로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수십여미터 근처에 다다르자 영주형님만 빼놓고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섰어요. 영주 형님은 그 때까지도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어요. 조심스럽게 영주 형님이 포크레인을 몰고 그 폐가에 다가갔죠. 그리고 삽을 들어 굉음을 내며 옆의 창고를 막 부수고 있는데........" 태섭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짓이겼다. "그 비오는 날 승균이 형님이 사무실에 나타났을 때만큼 놀랐어요. 거실에서 형님이 뛰쳐 나오는겁니다." "뭐?" "놀란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요. 갑자기 형님이 호통을 치는거예요. 내 집에서 썩 물러가라며... 그런데 그 목소리가 형님 것이 아니었어요. 너무나도 낯선 생소한 목소리였어요. 그나마 멀리서 바라 본 저희들이 그럴 정도였는데, 바로 앞에 있던 영주 형님은 어땠겠어요? 비명을 지르며 영주 형님이 운전석에서 뛰쳐나왔죠." "포크레인을 놓고 도망쳤단 말이야? 황승균이 그 걸로 무슨 짓 할 줄 알고?" "다행히도 영주 형님이 키를 뽑아들고 도망을 쳤던거죠. 저희는 사무실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 때 저희를 수상히 여긴 사장님이 무슨 일인지 물었죠. 그제서야 저희들은 그간의 일을 사장님께 모두 털어놓았죠. 얘기를 모두 듣고 난 사장님은 같이 그 폐가로 가자는거예요. 사장의 명령이니 안 따를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 저희들은 그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황승균이 있었어?" "예. 경비원처럼 어디서 몽둥이 하나를 들고 와 거기서 지키고 있더라구요." "가서 뭐했어?" "사장님이 형님한테 가서 말을 걸었죠. 나머지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봤구요. 그런데 웃긴 건 승균이 형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우리 직원들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면서 연신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더군요. 포크레인만 가지고 갈테니 화를 푸시라고 말을 하더라니까요.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승균이 형님이 몽둥이를 내려놓더니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는거예요. 귀신이 빠져나간 것처럼 말예요." 태섭은 잠시 양 팔을 쓸어내렸다. "그 날이 언제야?" "형님이 죽기 이틀 전이었어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지?" "어떻게 되긴요? 승균이 형님을 업고 사무실로 내려갔죠. 정신이 돌아온 형님이 집엘 가겠다며 사무실을 나선거예요. 그리고 이틀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시체로 발견이 된거죠. 연락이 없음에도 우리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승균이 형님이 우리에게 연락을 할까봐 두려웠죠.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했어요."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불을 붙이며 입을 열었다. "너...황승균이 죽은 걸 어떻게 알았어?" "예?" 내 예상대로 그는 놀라는 눈치였다. "신고 접수 후 경찰이 도착한게 대략 4시 반이야. 10분도 안되서 도착했지. 내가 도착한 건 20분 후고.... 그 사이에 죽은 황승균 와이프가 회사에 연락을 취할만큼 여유롭진 않았겠지. 회사 사람들은 마치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느냥 여유로웠어. 아무리 소속감이 적다해도 무리가 있지. 게다가 현장에서 도망을 쳤던 노영주는 이미 황승균이 죽을 걸 알고 있던 사람 같더라구..."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누가 그 전에 다녀갔어.....그렇지?" 태섭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사람이 노영주일 수도 있고, 바로 너 일수도 있지. 노영주가 어제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하고자 했던 그 말이 지금 니가 하고 있는 말보다 더 깊은 내용일 것 같아. 형사들은 직감이라는게 있거든. 내가 볼 때 노영주는 황승균 집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어. 그러지 않고서야 비번인 날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사람 주변에 나타난다는 것은 쉽지가 않거든." 태섭은 나를 노려보던 시선을 접더니 오히려 나의 시선을 회피하기 바빴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들을 족치면 되거든. 그러면 누가 거짓말 하는지 자연스럽게 나오게 돼. 오늘 니가 한 얘기의 대부분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다.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취조실을 빠져 나갔다. 문 밖을 나서자 박형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형사님, 죽은 황승균씨가 3억짜리 생명보험에 가입되어 있던데요?" "뭐? 그래?" "그런데...가입자는 황승균으로 되어있고, 수혜자는 황승균씨 와이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뭐야...황승균 본인이 가입하고 보험료를 냈단 말야." "예. 보험회사 알아보니까 본인이 직접 싸인했다하더라구요. 보험료도 본인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도록 했구요. 가입일도 20여일 전이예요." "뭐야...자기가 죽을 줄 알고 있었단 말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김홍선씨하고 몇 차례 큰 돈거래가 있었는데요?" "김홍선?" "아...그 중장비 업체 사장이요." "무슨 돈거래?" "월급 같지는 않고 수백만원 몇 차례 계속 왔다갔어요. 그런데 정리는 깨끗이 한 것 같아요. 더하기 빼기 하니까 빵이 되더라구요." "노름돈 빌렸나 보지. 아참...박형사... 김태섭 취조장면 봤어?" "예." "어떻게 생각하냐?" "믿기도 그렇고 안믿기도 그렇고...." "그 폐가에 대한 등기부 등본 좀 뽑아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자." "예." "참...황승균씨 내일이 발인인데, 유족들 부검할지 물어봤어?" "별로 탐탁치 않아 하던데요." "음...그럼 우리가 빨리 알아보는게 나을 것 같군. 나 급히 어디 좀 다녀올테니까 뒷 일 좀 부탁해" "어디 가시게요?" "그 마을에 가장 최근까지 살고 이사갔던 사람을 알아보고 만나야겠어." 나는 군청을 들러 가장 최근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비교적 고령자를 찾았다. 가장 적합한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10년 전에 이사를 했고, 그 때까지 마을의 이장을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이사를 해서 차를 몰고 40여분 정도만 가면 만날 수가 있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 아닌 비교적 도심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아파트 단지에 그는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는지 반백발의 노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내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지만 남편은 매우 정정해 보였다. "그 집...참 안타깝지... 그 고가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장사가 잘 되던 가겟집이었어. 이름이...대흥상회였나? 이봐 할멈..맞지? 최씨가 하던 가게.." "맞아요. 그 집 모르면 간첩이지." "그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거라곤 없었는데, 그 집은 어디서 그렇게 음식 기술을 배웠는지, 식당 일을 같이 하면서 지나가는 외지인들을 상대로 맛난 음식을 팔더라고. 알다시피 그 집이 얼마나 외진 곳에 있나? 마을 자체가 촌구석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구석에 그것도 산 중턱에 있지 않은가? 그런 곳에서 장사를 해 먹고 살다니 참 신통했지. 돈도 많이 벌어들이고 말야. 그 사람이 마을 노인정까지 지어줬다니깐. 모든 시골인심이 그렇듯이 우리는 서로 정도 많이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렇게 살았지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낯선 도시 사람들이 마을에 나타났어. 그리고 이장인 나를 찾아오더니 여기 저기 토지들을 매입하고 싶다고 그러더라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 사람들이 왜 갑자기 우리 마을에 나타나 저러는지 몰랐지. 알고 보니까 1년안에 우리 마을에 고가도로가 들어선다는거야. 그 고가도로가 들어온다는 얘기가 돌면서 마을에 분란이 생기기 시작했어.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고가도로가 들어서는 걸 반대했지. 돈 보다는 우리 삶의 터전인 논과 밭이 먼저 아닌가? 그 사이에 낀 이장인 나는 어땠겠나? 그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 설득해 주면 한 명당 얼마식 주겠다 하면서 나를 계속 돈으로 매수하려고 했지. 에이..난 싫었어. 난 논과 밭이 있고, 자식새끼들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그 깟 돈 몇푼에 마을 사람들을 팔 순 없진 않은가? 그런데 그 도시 사람들과 업자들이 우리를 설득 못하니까 도시에 살던 자식새끼들을 꼬드긴거야. 아주 난리가 났지. 생판 얼굴 한번 비치지 않던 놈들이 부모라고 여기저기서 찾아 오더군. 결국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개발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특히 업자들에게 돈으로 매수가 되었는지 마을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가 여기저기 설득하며 도장 받으러 다녔어." "청년회 회장이오?" "늙어서 그런지 그 친구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월남전까지 다녀와서 국가에서 나오는 돈으로 조금씩 연명하던 친구야. 거기 가기 전에는 참 착하고 순진했는데 다녀와서 성격이 많이 망가졌어. 업자들 앞잡이가 되어서 마을 사람들 선동하고 다니는 게 영 꼴불견이었지. 사실 청년회도 도시 사람들 들락거리기 시작하면서 급조된 모임이야. 그 넘의 시골에 젊은 사람들이 없는데 무슨 청년회란 말인가? 그렇게 토지보상이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문제가 발생했어. 고가도로 교각 하나가 대흥상회 주인 최씨 밭을 지나가는데 마지막까지 최씨가 동의를 안해주는거야. 솔직히 보상금도 쏠쏠해서 그 때까지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냥 도장 찍어줬어. 업자들이 구슬려보기도 하고, 협박도 해보기도 했지만 꿈쩍도 안하더라니까 특히 청년회 회장이라는 그 친구가 최씨를 많이 닥달했지. 아마 그 때 그 친구 눈빛 봤으면 도장 안찍고는 못배겼을 거야. 그런데도 최씨는 장사를 그만 둘 수 없었던 거야. 고가도로가 나면 망한거나 마찬가지거든.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구.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 날 밤 최씨가 집 근처 개천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어." "예? 누가 죽인건가요?" "아냐. 그 친구가 원래 엄청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는데, 그 날도 술 한잔 하고 읍내에서 집에 돌아오다가 쓰러진 것 같더라구. 그 개천길이 굵직굵직한 돌길이라 발을 헛딛기 쉽상이야. 넘어지면 머리를 부딪힌것 같애. 결국 남은 가족들이 그 동의서에 도장을 찍었지. 그리고 소리소문없이 그 집이 제일 먼저 마을을 떴어. 그런데 최씨가 죽은 뒤로 이상한 소문이 나돌더라구. 최씨가 죽은 날, 마지막까지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이 청년회 회장이라더군. 터무니없어 보였지만 그 친구가 최씨를 죽인 것 같다는 소문이 나도는거야.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는 어떤 놈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다녔지. 아니 대낮에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들고 다니더라니까. 그 땐 진짜로 누굴 죽일 것 같았다니깐. 마을 사람들 모두 입을 다물었지. 그 정이 넘치던 우리 마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최씨 가게는 개발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집은 그대로 남았어. 물론 그런데 있는 집을 사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지. 그대로 폐가가 되어 버린거야. 동네 아그들 놀이터가 되어버린거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그 집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는거야" 노인은 목이 마르는지 주전자의 물을 한 컵 따라 들이켰다. "그 집에서 놀던 어린 아그들이 최씨 아저씨를 봤다는거야. 한 둘이 아니었어. 어떤 아그는 최씨 아저씨가 줬다면서 장판 밑에 오랫동안 묵혀둔 듯한 천원자리 지폐를 보여주더라구. 그 집이 식당하면서 생선요리 많이 해.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비린내가 좀 나. 그런데 그 천원짜리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거야. 어휴...그 애 부모들은 사색이 되서 애를 야단치더라구.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말라고. 어느 날 밤에는 그 집에서 최씨 목소리를 들은 사람도 있다더군. 그 친구가 술에 취하면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었지. 비가 오는 밤이면 그 노랫소리가 들린다는거야. 혹시나 귀신이라도 옮겨 붙을까봐 모두들 최씨집을 멀리했지. 게다가 더 이상한 건 그 청년회 회장이란 친구의 모습이었어." "뭐가 말입니까?" "어디서 피를 빨려서 온 사람처럼 갈수록 몰골이 상하더라구. 눈은 휑하니 꺼져 있고, 눈 밑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라구. 며칠 동안 굶은 사람처럼 볼이 함몰되어 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고,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는 것 같더라니까. 죽은 최씨한테 시달린다는 괴담이 떠돌기 시작했지. 혹시나 그 친구한테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어. 그 날밤.... 최씨가 죽었던 그날 밤....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게야.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친구가 보이질 않더라구. 어차피 먹여 살릴 처자식이 없어서 언제든 어디서 빌어먹고 살겠지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는게 너무 이상했다네. 마을이 극도로 흉흉해졌지. 그 뒤로 하나 둘씩 사람들이 이사를 떠났어. 그나마 내가 가장 늦게 떠난거지. 나야 뭐, 가까운 읍내에 아들 내외가 살아서 언제든 이사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르신, 혹시 예전 마을 사람들 사진같은거 가지고 계시나요?" "꺼림칙해서 몇 년간 꺼내보지도 않았는데...잠깐 기다려보게" 잠시 후 노인은 두꺼운 앨범 하나를 들고와 그 위의 먼지를 닦아내며 나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바래진 앨범 표지를 보니 오랜 전 지워진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받아 든 앨범을 한장씩 넘기자 주로 노부부의 사진들이 먼저 펼쳐졌다. 몇 장을 넘기자 노인이 손가락으로 어떤 사진을 가리켰다. "이 사람이 최씨라우...그 대흥상회 주인.... 어휴...술을 엄청 잘 마셨지. 상상도 못할걸?" 건장하다고 해야 할지, 풍만하다고 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지만 매우 풍체가 좋은 선한 얼굴의 40대 얼굴의 모습이었다. 페이지를 계속 넘기자 전형적인 시골 촌부의 모습들이 여기저기 펼쳐졌다. 그 순간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이런...." "아는 사람인가?" "예." "이 친구가 바로 그 청년회 회장이었다네." "뭐라구요?" 나는 노인의 말을 듣자 마자 휴대폰을 꺼내 박형사를 찾았다. "응. 박형사 나야. 지금 당장 김홍선 사장 행적 파악해!! 지금 당장!!" 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노인이 맞장구를 쳤다. "형사 양반... 맞아!! 그 친구 이름이 김홍선이었지." 나는 순간 일이 복잡하게 꼬여감을 느꼈다. "형사 양반...그 친구 봤나? 지금 어디 있나?" "어르신 살던 마을에서 작은 중장비 회사를 하나 하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이쿠...세상에나 이젠 정신 차렸나 보네." "어르신..김홍선씨...아니 그 청년회 회장 얘기 좀 더 해주실래요?" 노인은 앉은 자세를 잠시 옆으로 틀더니 입을 열었다. "군대 가기 전에는 정말 착하고 순진한 친구였지. 그 때는 홍선이..홍선이 하면서 이름도 잘 불렀는데 조금 전엔 왜 기억이 안 났는지 몰라. 사람이라는게 안 좋은 기억은 본능적으로 자꾸 잊버리려고 하나봐. 월남전 갔다왔다며 마을에 돌아왔는데...어이쿠...사람이 좀 이상해 보이더라구. 얼굴은 전보다 더 시커멓게 그을려 있고, 체구는 더 왜소해 진 것 같앴어. 거기에다 눈빛에 살기가 돌더라구.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네. 최전선에 있었다는데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겠나? 동네 사람들 모두 그 친구를 반가히 맞았지만, 얼굴빛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 술만 마시면 전쟁 얘기를 하는거야. 자기 손으로 월남군 수십명의 목을 땄다면서 목을 따는 시늉을 앞에서 막 보여주는거야.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킥킥대면서 말야...... 게다가 마치 그 전장에라도 있는 것처럼 혼자 총질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엎드려서 포복하는 자세도 취하다가, 혼자 고함을 지르며 돌격 앞으로 하면서 전쟁 놀이를 하더라니까 그 순진한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나. 그리고 알아 듣지도 못하는 월남노래를 혼자 군가처럼 막 부르고 다녔지. 동네 사람들은 그 친구가 월남귀신에 쓰인 거라며 서로 수근댔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2부에서 계속 [출처]웃긴대학 글쓴이:하드론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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