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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보고 싶다. 적은놈 입니다..."가 낚시 였네요...
게시물ID : humorbest_1690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ΧBOX
추천 : 58
조회수 : 2399회
댓글수 : 2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7/06/28 09:19:19
원본글 작성시간 : 2007/06/27 23:01:20
http://todayhumor.paran.com/board/view.php?table=humorbest&no=162507
다시 해보고 싶다
http://todayhumor.paran.com/board/todaybest_view.php?no=168958&page=1&ask_time=1182952211
다시 해보고 싶다 적은 놈 입니다.

위에 있는 두 글 중 아래 글이 낚시 글 이였네요.';;;;;;

아래 글은 '도쿠다 도라오'의 '107개의 병원을 가진 남자'(열린 사회)의 본문 내용 중

'수험 생활의 모든 것' 부분을 일본어 지명과 문단의 순서만 살짝 바꿔 쓴 글 입니다.

먼저

<107개의 병원을 가진 남자>
그때 나는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 도쿠노시마의 교육 수준은 매우 낮았다. 내가 다니던 도쿠노시마의 고등학교에서는 개교이래 국립대학의 의과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을 목표로 한 이상, 오사카 고등학교로 전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축농증 치료를 받으면서 두세 군데 편입 상담을 해보니, 모두 8월에 편입한 시험이 이었다.
축농증 치료가 끝난 9월쯤 두쿠노시마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에게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우리 집의 경제적인 능력은 내가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갈 형편이 아
니었다. 그렇게 하려면 그 당시 물가로 매월 7,8천 엔 정도의 돈을 송금 받아야 
하는데, 한 달치 생활비를 빼고 나면 약 3,4천 엔의 돈밖에 남지 않았고, 저금한 
돈도 없었기 때문에 밭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내가 생각한 대로해라" 하시면서 
"내가 돈을 보낼 수 없는지, 네가 오사카 대학의과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없는지 한 번 내기를 걸어 보자구나" 라는 덧붙이며 나의 편 입학을 허락하셨다.
아무 말씀도 없이 묵묵히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아들에 대한 깊은 신
뢰가 담겨 있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을 뵙고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오사카 고둥학교로 전학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척이나 놀라시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는 '네가 과연 해낼 수 있겠니? 아마 불가능할 걸' 하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모였다. 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무엇 하나 두드러지지도 않는 학생이 국립대학에 들어가겠다니. 가소로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기죽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가려고 한다는 소문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물론 섬 전체에 퍼졌다.
나는 부모님께는 경제적으로 무리한 부담을 드리고, 선생님한테서는 조소를 당하고, 마을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이 나자,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내가 만약 국립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경우, 나는 도쿠노시마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날 것이며, 이는 곧 인격을 부정당하는 것과 똑 같았다.
그후 나는 전학에 필요한 준비를 착실하게 실행에 옮겼다. 토요일, 일요일, 축제, 정월 연휴는 물론 그해 가을 고둥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달렸다.
1956년 3월 10일, 오사카 고등학교로 전학하기 위해 다시 도쿠노시마를 뒤로 하고 섬을 떠났다. 배의 출항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울리는 산바 시 부두에서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성공할 때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죽고 싶다면 철도도 있고 바다도 있다!"

그리고

<낚시 글>
보름전 재수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서울 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부산에 있는 학원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집의 경제적인 능력은 내가 재수(학원)에 갈 형편이 아니지만.. 집에 저금한
돈이 없어서 배를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읍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내가 생각한 대로해라 하시면서
"내가 돈을 보낼 수 없는지, 네가 서울 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갈 수 없는지 한 번 내기를 걸어 보자구나" 라며 편 입학을 허락해주었습니다.
묵묵히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아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을 뵙고 서울 대학 경제에 가기위해 재수학원으로 전학한다고 말씀 드렸더니
무척 놀라시는 표정이더군요 표정에는 네가 과연 해낼 수 있겠니? 하는 비웃음이 담겨 있더군요 ...
무엇하나 뛰어난 것도 아닌 놈이 서울 대학에 들어가겠다니 ... 무리가 아니죠...

그러나 저는 그때도 지금도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기죽지 않고 서울 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 대학에 가려고 한다는 소문은 내가 다녔던 학교는 물론 섬 전체에 퍼졌어요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무리한 부담을 드리고,
선생님한테서는 조소를 당하고, 마을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이 나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하더군요...
만약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경우, 나는 섬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날 것이며,
이는 곧 인격을 부정당하는 것과 똑 같은...

보름 전 출항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올리는 부두에서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성공할 때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죽고 싶다면 철도도 있고 바다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공책 표지에는 죽느냐 사느냐란 단 한마디가 씌어 있내요...
'죽느냐 사느냐!'란 단 한마디가

사이버공간이지만은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 제 소식전합니다
이젠 합격 후 뵈여...
참..if님그래요 저의 미래는 지금부터입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확연히 베꼇다는 티가 납니다.

사실 같은 내용을 낚시 글에 리플로도 달아 봤지만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이렇게 글로 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07개의 병원을 가진 남자>의 본문은

http://www.bestofdoctors.co.kr/upload/upload_file1/%B5%B5%C4%ED%B4%D9%20%B5%B5%B6%F3%BF%C0%20107%
B0%B3%C0%C7%20%BA%B4%BF%F8%C0%BB%20%B0%A1%C1%F8%20%B3%B2%C0%DA.txt

에서 확인하실수 있습니다.

낚시글에 진지한 리플로 격려해주신 오유인분들이 바보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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